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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문리대에서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성토대회

서울대 문리대생 70여 명은 25일 낮 1시 동교 4·19 탑 앞에 모여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성토대회를 열고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성토대회를 마친 학생 중 50여 명은 오후 2시부터 본관 제4강의실에서 전태일 씨의 죽음을 추도하는 48시간 기한부 단식농성에 들어갔다가 노동실태조사단을 만들어 겨울방학 동안 근로조건 실태를 조사하는 등 지속적 운동을 펴기로 하고 26일 오전 10시 자진 해산했다.『동아일보』 1970.11.26. 7면; 『경향신문』 1970.11.26. 7면; 『한국일보』 1970.11.26. 7면; 『대학신문』 1970.11.30. 3면 결의문 우리의 스승 고 전태일 선생의 죽음이 ‘공모타살’임은 명백하다.
우리 대학인도 바로 그러한 공범자 중의 일원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유기체적 사회 내에서 부여받은 대학의 사명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근로자의 한 사람으로 고 전태일 선생이 전개한 다수의 근로자의 권익을 위한 투쟁을 근로자만이 느낄 수 있고 견딜 수 있는 고통받는 근로자들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애정에서 연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외롭고 의로운 외침에 메아리하여 주는 사람은 없었다. 횡행하는 프로퍼갠더는 사회를 맹목의 동물로 만들었고 대학은 소시민적 사고체계만을 확고히 하면 학문 탐구의 지름길을 달린다는 착각의 세계에 방황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자기합리화의 반복 과정에서 대학인의 심층부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을 거세하기에 바빠 왔다. 허나 전태일 선생의 죽음은 대학 자유의 죽음도 동시에 확인시켜 주었다.

우리는 우리의 자기상실증에 방조 내지 공모한 살해 행위의 결과인 전태일 선생의 죽음에 뼈맺힌 회의감을 억누르며,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던 절규를 듣고 있다.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근대화의 미명 아래 가속화되는 불평등 심화과정에서 희생당하는 근로대중의 권익을 수호하기 위한 범 대학적 민권수호 학생 연맹의 결성을 적극 추진한다. 농촌의 황폐화, 도시 빈민들의 생존권의 위협, 각종 노동재해의 격화, 외기 노동쟁의 제한법과 같은 노동권이 박탈당하는 현실에서 민권수호의 투쟁을 본질적으로 대학의 자기실현으로 파악한다. 이에 학생 총회의 일원으로 민권수호를 위한 회의의 결성을 위한 준비위원회의 구성을 결의한다.
1. 우리는 고 전태일 선생의 죽음이 요구한 바를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즉 평화시장 내의 3만 근로자의 근로 조건 개선 및 그 지속성을 보장하기 위한 그들 자신의 노동조합의 결성이다. 허나 선생의 생존에 당하였던 기업주의 박해, 정부의 냉대, 사회의 외면 등의 상황은 선생이 가신 후에도 거의 달라진 바가 없다.

우리는 또 하나의 어용노조가 출현하여 선생의 죽음을 전혀 무의미한 것으로 하는 것을 경계한다. 동시에 일부 ‘바보회’ 회원들에 대한 해고의 철회를 요구한다.

1. 나아가 우리는 전국 근로자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노동실태 조사반’을 구성한다. 이는 민권수호회의 내에 구성하여 학생회, 대의원회, 행정 편집실 및 각종 써클과의 유기적인 관계하에 근로자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진정한 노조의 결성을 후원하며 노동실태조사에 착수하여 그 진실을 알리는 작업을 한다.
1. 마지막으로 학교당국에 항의한다. 학교당국이 스스로 교육을 포기하는 만행의 저의는 무엇인가? 제자들의 의로운 행동에 대하여 고작 학교 폐쇄만이 스승들의 취할 태도였던가? 앞으로 우리는 어떠한 형태의 휴교도 용납하지 않겠다.
1. 이 같은 우리의 결의가 관철될 때까지 우리는 성실한 실천과 투쟁에 임할 것이다.
1970년 11월 25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회 대의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