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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김낙중 등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 발표
유신을 홍보하는 현수막 소각과 유인물 배포 사건의 주범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중정은 전 한맥회 회장과 재학생 회원들을 검거했다. 유신을 논의·반대하는 자를 처벌하는 긴급조치가 생기기 전이어서 이들을 엄벌하려면 “학생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는 증거가 필요했지만 이들과 북한과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중앙정보부는 18년 전에 월북한 전과가 있는 김낙중이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을 하고 있음에 착안했다. 한맥회 회원들이 방학에 강원 도계탄광으로 현장실습을 가면서 김낙중 노동연구소 사무국장의 조언을 받았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노동문제연구소 관계자 2명, 탄광 관계자 1명, 학생 8명(제적생 포함)으로 이뤄진 학원 침투 간첩단이 조작되었다.
3월부터 학생들이 검거됐고, 5월에 김낙중이 끌려갔다. 수사 도중‘NH회’라는 지하조직의 이름도 만들어졌다. ‘NH회’라는 조직이름은 한맥회가 회보 『한맥』을 발간하면서 제호 아래 “우리는 휴머니즘과 민족주의를 추구한다”는 모토를 항상 기재했고, 유인물 『민우』도 이 모토를 사용한 것을 근거로 중앙정보부가 한맥회 부활을 추구하는 학생들을 옭아매고자 날조한 것이다. ‘N’과 ‘H’는 각각 민족주의(Nationalism)와 휴머니즘(Humanism)의 이니셜이다. 이 사건은 반유신·반정부 학생운동을 간첩 사건과 연관시켜 억압하기 위해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이었다.
중앙정보부는 1973년 5월 24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사무국장 김낙중 교수를 간첩활동 혐의로, 고려대생 정발기 등 10명의 학생을 반국가단체조직, 불온유인물 살포 등의 혐의로 구속하는 등 도합 13명을 반국가활동 혐의로 구속, 검찰에 송치했다.
고려대 학생써클인 ‘한맥회’ 회원들은 1971년 당시 사회 전반의 구조적 모순의 결과로 나타난 전태일 분신자살 사건, 광주 대단지 사건 등의 노동·빈민문제를 적극적으로 여론화하기 위해 그 실태를 조사, “민족, 민주학원을 수호하자”, “광주는 죽지 않았다” 등의 유인물을 통해 진상을 발표하였고, 1972년에는 고대 정문에 걸려있던 “한국적 민주주의 이 땅에 뿌리박자”라는 유신찬양 현수막을 소각하고 유인물들을 통하여 유신체제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일련의 작업들을 벌이면서 유신독재에 저항하였다. 1973년에는 『민우』라는 유인물을 정기 발간하여 유신체제의 본질을 1인 영구집권을 위한 총통제라고 규정하는 동시에 유신독재정권의 본질을 분석하고 근로자문제의 진상을 알리는 글들을 실어왔다.
1973년 7월 12일 제2회 공판에서 김낙중은 과거의 학생운동이 데모 위주였는데 앞으로는 노동운동으로 전환시키라고 학생들에게 이야기했을 뿐이며 학생운동을 사회주의국가보다는 복지국가건설 방향으로 이끌려했다고 진술하였다. 또한 노중선은 민주적 노동운동에 의해서 ‘빈익빈 부익부’의 폐해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노동운동의 구체적인 방안은 생각해보지 못했다고 진술하면서 “능력이 없어도 부모의 유산만 있으면 먹고 살고, 능력이 있어도 부모의 유산이 없으면 못 산다”는 말과 “8.13조치로 부자만 잘 살게 되고 없는 사람은 더 못 살게 됐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고 공소사실을 부인했다. 그리고 손정박 피고도 『모택동 사상』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지만 그 책은 김상협 고대 총장이 저술한 일반 교양서적일 뿐이며,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학술적인 차원에서 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검찰측의 공소사실을 부인하였다.
10월 22일 결심공판에서 서울지검 공안부의 이창우 검사는 김낙중 무기징역, 노중선·손정박·함상근·정발기·최기영·박영환 징역10년, 자격정지10년, 정진영·윤경노·박세희 징역7년, 자격정지7년, 강태희 징역3년, 자격정지3년 등을 구형하였고, 11월 1일 선고공판에서 법원은 김낙중 징역7년, 자격정지7년, 함상근·노중선·손정박 징역5년, 자격정지5년, 정발기·최기영·박영환·정진영·윤경노·박세희 징역2년6월, 자격정지2년6월, 강태희 징역1년, 자격정지1년, 집행유예3년 등을 선고하였다. 이 판결은 1974년 6월 11일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됐다.
이 사건은 유신체제 출범 이후의 최초의 대규모 학생사건으로서 그 이전의 형량과 비교할 수 없는 유신정권의 강압정책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그러나 아직 유신체제에 대응할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민주·인권운동진영은 이 사건이 과대포장되어 조작된 정치적인 사건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2017년 4월 27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김태업 부장판사)는 10월 유신 이후 첫 대학 공안사건인 ‘고려대 NH회’사건으로, 내란음모 등의 혐의로 기소된 함상근(67), 최기영(64) 등 6명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2013재고합47). 함씨 등은 2013년 12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대법원은 2017년 2월 최종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었다.
- 분류
- 민주화운동 / 학생 1973-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