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 중앙정보부서 수사 받다 사망
김치열 중앙정보부 차장은 10월 25일 유럽거점 간첩단사건을 발표하면서, “최종길은 독일 유학 중 1960년 평양에 가서 노동당에 입당하고 공작금을 받고 돌아와 간첩행위를 해왔으며, 간첩혐의를 자백하고 나서 양심의 가책을 느껴 7층에서 투신자살했다”라고 거짓으로 발표했다.
최종길 교수 사망 다음 날인 10월 20일 중정 감찰실(실장 손종호)은 사망 경위에 대하여 감찰조사를 벌였으나 형식적인 조사로 끝냈고, 국과수 법의학과장 김상현은 중정 안가에 불려가 설명을 들은 뒤 사망진단서도, 부검영장도, 담당검사(서울지검 이창우) 입회도 없이 부검을 진행했다. 중정 감찰과장 이병정은 최종길의 동생 최종수에게 보상금 3천만 원(당시 여의도 아파트 2채 정도)을 줄 테니, 속히 화장하고 조용히 장례를 치르라고 요구했다.
1년 뒤인 1974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최교수가 전기고문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발표했다. 1988년 10월 6일 유가족과 천주교 사제단이 관련자 22명을 고발하여 검찰이 재수사에 착수했으나 “자살증거도, 타살증거도 찾을 수 없다”라고 발표하는 것으로 끝냈으며, 그해 10월 18일로 15년 공소시효가 만료되고 말았다. 이때 당시 제5국 단장 장송록과 관련자들은 중정 제5국 퇴직자 모임인 덕우회 사무실에 모여 대책회의를 열고 말을 맞췄다는 사실이 나중에 의문사위원회 조사에서 드러났다.
2002년 의문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사건 당시 제보자 이ㅇ우(제물포고 후배)의 모호한 진술 외에는 최종길과 관련하여 평양 방문이나 노동당 입당, 간첩활동에 대한 증거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최종길 교수가 간첩을 자백한 사실조차 없었다는 게 드러났다. 의문사위원회는 자필진술서나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기 이전 주무수사관이었던 차철권 등에 의해 강도 높은 고문이 행해지고, 그 과정에서 숨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의문사위원회는 또한 사고 후에 조일제 보안차장보의 지휘로 제5국장, 단장, 과장, 주무 및 감찰실 직원들이 사고 은폐조작 대책회의를 열어 긴급구속장, 신문조서 등을 사후에 허위로 작성하고, 부검의에게 압력을 가하였으며, 감찰을 형식적으로 진행토록 해서 자살로 위장하여 발표하기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의문사위원회는 설사 고문치사가 아닌 자살이라 하더라도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사망임은 부인할 수 없다고 결정하였고, 2006년 고등법원은 국가배상을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