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정식 발족
8월 12일 지학순 주교가 15년 선고를 받은 이후, 기도회는 전국으로 번져갔다. 항상 성당 안과 마당을 가득 채운 기도회 자리는 긴급조치라는 살인적 탄압과 통제 속에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의 불법성을 알리고 민청학련의 진상과 근황, 가족의 호소 등을 알리는 유일한 언로였다. 또한 그 곳은 전국에 흩어져 있었던 사제들이 만나고 의견을 교환하며 결집하는 장소가 되었다.
9월 23일 원주에서 개최된 성직자 세미나에 모인 사제 300여 명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라는 명칭에 합의하고 집중적으로 인권회복과 민주화를 위한 기도회를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세미나가 끝난 24일 사제단 결성에 합의한 세미나 참석 신부들은 원주 원동성당에서 사제, 수도자, 평신도 1,5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첫 기도회를 가졌다. 이틀 뒤인 9월 26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명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집전으로 순교찬미기도회를 열고 「제1 시국선언」을 발표하였다. 미사가 끝난 후 사제단은 십자가를 앞세우고 수도자 200여 명, 평신도 1,000여 명과 함께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날의 시위는 사제들에 의한 최초의 가두시위였다. 또한 수녀들이 시위에 참가한 것도, 촛불 가두시위가 이루어진 것도 이 나라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출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출범당시 「제1 시국선언」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이 침해당할 때면 언제 어디서나 그의 편에 서서 그의 권리를 회복시켜주기 위하여 저항하고 투쟁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선언하였다.
이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은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현장에서 중요 고비마다 계속되었다. 특히 아무도 쉽게 나설 수 없었던 김지하 구명운동, 인혁당사건 진상조사와 구명운동,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의 고문치사사건 폭로, 김재규 사건, 5·18광주민중항쟁,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박종철 고문살인사건, 임수경 방북사건 등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은 거침없는 발언과 행동으로 민주화운동에 큰 기여를 하였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으로 교회는 인권운동의 중심이 되었으며 양심의 보루라 불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