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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양상 변모, 경찰의 강경진압에 맞서 학생들의 태도도 경화

학생들은 경찰태도의 경화와 비례하여, 전례 없이 쏘아대는 최루탄에 일단 흩어졌다가 최루탄 가스가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집결, 눈물을 쏟으며 애국가와 해방의 노래를 부르는 등 3·24데모 때에는 못 본 광경이 경찰과 충돌할 때마다 벌어졌다.
3·24데모 때와 또 달라진 것은 시위대들의 플래카드와 구호이다. 처음에는 “대일굴욕외교 결사반대”, “평화선을 사수하자”, “김종필씨를 즉시 소환하라”는 것이 주 내용이었으나, 최근에는 그 내용이 사뭇 살벌해졌다. 21일 데모에서 서울대생들은 “아직도 모르겠느냐?”는 암시적인 내용의 플래카드를 내세우는가 하면, 성대 학생은 “5·16은 4·19의 연장일 수 없다”, “부정부패 고개 들면 4·19 다시 난다”, “벌 받는 애국자, 상 타는 매국노”로 격해졌고 이들이 ‘대통령에게 보내는 최후통첩’에는 3·24데모 때는 못 본 “현 정권이 더 이상 부패하기 전에 청와대 주변의 간신배를 완전히 제거하라”, “경찰력도 못 믿어 방첩대를 두고 이것도 모자라 중앙정보부를 두니 그것도 못 믿는다면 또 무엇을 만들 것인가?” 등에 삼분(三粉)폭리사건4대의혹사건의 진상규명과 책임자의 처벌도 요구하고 있다.『동아일보』 1964.4.22 석6면. 1964년 4월 19일을 전후한 반대운동의 단계에서 주목되는 것은 3·24데모 이후 주장해온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 구호 이외에 “학원사찰 중지하라”, “5·16은 4·19의 연장일 수 없다”는 새로운 구호가 등장한 것이다. 이는 강력한 경제외교를 표방하는 군사정권의 ‘근대화론’에 밀려 크게 위축되었던 4·19 민주주의 정신의 부활이었으며, 금기시된 군사정권의 독재정치에 대한 비판의 단초를 마련한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학생들은 당시 4·19의 계승자로 자처한 5·16 군사정권이 민주주의의 옹호자가 아닌 민주주의의 유린자임을 직시한 것이었다.(유영렬, 「6·3학생운동의 전개와 역사적 의의」, 『한국사연구』88, 1995, 145~1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