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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문리대 학생회,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고 단식농성 돌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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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하오,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는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고 최근 정부가 행한 반민주적 처사를 규탄했다. 이 대회에는 처음으로 학생회가 참가하였는데, 문리대 학생회장 김덕룡(사회 4)이“우리는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시간과 체력을 담보로 하여 3·24로부터 5·25까지 투쟁을 계속해왔다. 정당한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폭력은 쓰지 않겠으나 반매판, 반외세, 반봉건, 반전제를 지향하는 금일의 단식투쟁은 내일의 피의 투쟁이 될지도 모름을 알리며 우리는 우리를 괴롭힌다”라는 요지의 선언문을 읽고 ‘최루탄박살식’에 들어갔다.
이들은 ‘최루탄사(詞)’를 낭독하고, 우유드럼통에 ‘최루탄귀(鬼)’라고 쓰고 뒤에는 ‘MADE IN USA’라고 쓴 위장 최루탄을 만들어 그 속에 일본 자민당오노 부총재와가 박 대통령을 가리켜 부자관계와 같다고 말한 것을 풍자한 ‘사망 부자지간 잔존’을 비롯하여 ‘부재지주 건재’,‘950불짜리 차관’, ‘매카시 씨 또 부활’, ‘친외세 친매판 친봉건’, ‘현상금제도 사쿠라 장학금’, ‘학원침략 교수구타’ 등이라고 쓴 11개의 색종이를 넣어두고 학생이 이것을 한 장씩 꺼내 폭로함으로써 최루탄의 정체를 힐난한 다음 드럼통을 불살랐다.
최루탄 박살식을 끝낸 학생들은 3시 10분부터 단식투쟁단식농성은 입체적으로 벌어졌다. 방송반과 방송문 작성반을 만들어 마이크를 5대 놓고 똑똑하고 말 잘한다는 문리대 여학생들이 새벽부터 전천후 요격기처럼 방송을 해대니 연구실에 있는 학생들은 물론 문리대 일대에서 하숙하는 학생들이 견딜수 없었다. 이들은 하나둘 꾸역구역 모여들었다. 불문과 연구실에 있던 김화영은 견디다 못해 나와서 시를 하나 써 척 던졌는 데, “엉겅퀴 가시나무 돌무더기에 있는 황량한 지평에 섰다. 아, 얼마나 긴 시간 우리는 고뇌 속에서 방황했는가” 하는 첫머리를 콱 쉰 목소리로 잔잔히 읽으면 크게 호소력이 있어 자주 애송되었다. 학교 구내방송만이 아니었다. 신문과 라디오에서도 단식농성 상황을 자세히 보도하고, 실황중개 비슷하게 단식 농성장을 녹음 취재하였다. 단식으로 쓰러지면 그는 어떻게 실려갔고, 심지어 부모들의 근황까지 방송에 나올 정도였다. 특히 동아방송의 열기는 대단했다. 단식에 쓰러진 학생들은 단가에 떠메어 문리대 바로 앞에 있는 의대로 실려 갔다. 그곳에는 의대생과 간호학과 학생 십수 명이 철야하면서 단식학생들을 간호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단식현장에는 인근의 주민들이 계란꾸러미나 박카스 우유 등을 들고 와 격려하고 갔다. 술집과 교수들, 윤보선, 함석헌도 왔는데, 함석헌은 “자유의 정의를 위한 투쟁방법은 단식농성이 가장 좋다.”고 격려하고, 단식투쟁의 방법까지 설명해 주었다.(서중석, 「6·3사태: 64년 봄의 한일회담 반대시위」, 『신동아』, 1985년 6월호, 313~314쪽)에 들어갔는데, 이때 최루탄가를 ‘녹두장군’ 곡에 맞추어 김지하가 가사를 지은 “탄아 탄아 최루탄아, 8군으로 돌아가라. 우리 눈에 눈물지면 박가분(朴哥粉)이 지워질라. 꾸라 꾸라 사꾸라야 대학가에 피지 말라, 네가 피어 붉어지면 사미생이 들려올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운동장에는 “구속학생 무조건 석방하라”, “법원 난입, 교수구타, 학원침략, 학생사형 주모자를 엄단하라”, “민생고 해결은 매판자본 몰수로부터”라는 플래카드도 보였다.『경향신문』 1964.5.30 석7면, 『동아일보』 1964.5.30 석1면, 『경향신문』 1964.6.1 석7면, 서중석, 「6·3사태: 64년 봄의 한일회담반대시위」, 『신동아』, 1985년 6월호, 313쪽. 단식을 시작한 날짜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단식 때 사학과 2년생으로 현장에서 활약한 이현배는 5·20 시위 이후 십수 명이 수배를 피하여 숨게 되자 5월 23일경 학생운동을 계속할 필요성을 느끼고 김지하, 이현배 등 5~6명이 「새세대」 편집실에 모여 단식데모를 하기로 결의하고, 25일부터 4·19 기념탑 앞에 가마니를 깔고 단식에 들어갔다고 기억한다. 첫날에는 10명 정도로 시작하였고, 밤이 되자 그나마도 5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신문들은 30일 오후 2시 20분부터 시작했다고 보도하고 있다.(서중석, 「6·3사태: 64년 봄의 한일회담 반대시위」, 『신동아』, 1985년 6월호, 312쪽)
자유쟁취궐기대회 결의문(요지) 우리의 정당한 요구는 당국의 고식적 태도로 인하여 완전히 묵살되었다. 저들은 우리의 정당한 의사 표시를 용공시 하는 등 실로 가증스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다.
1. 독선과 부패, 파쟁, 무능의 악순환으로부터 조국의 구출을 절규하다 구속된 애국학생을 무조건 석방하라.
2. 무장군인의 법원 난입, 경찰의 학원 침입, 교수구타, 학생 납치 고문 등 일련의 비인도적 만행을 철저히 규명하고 공개 사과하라.
3. 학생의 정당한 의사표시를 용공시하는 ‘매카시즘’적 수법과 학문의 자유를 침해한 치졸한 중상모략을 즉각 중지하고 자신의 무식을 자각 반성하라.
4. 학원의 주변에서 정보원, 형사를 즉시 철수시켜 이를 간첩색출에 투입하라. 5. 학원과 민족분열공작을 자진 폭로하라.
6. 사대주의적 외세의존 근성을 박멸하여 매국적 친일악덕재벌을 조사 몰수하라.
7. 일체의 파쟁적 편견으로부터 탈피하고 민생고 해결의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라.
이러한 우리의 의로운 주장이 관철되는 최후의 순간까지 우리의 투쟁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동아일보』 1964.5.30 석1면. 경향신문에 실린 결의문은 내용은 비슷하나 표현이 약간 다르다.(『경향신문』 1964.5.30 석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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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반대운동 / 학생 1964-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