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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태 등 공소장 내용 발표 정부전복기도내란죄를 적용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등은 현 정치정세는 부정부패와 무능독선의 극에 달했고 경제질서는 그 정책빈곤으로 파탄에 이르러 천정부지의 물가고로 민생고가 극심, 민족분열의 위기에 놓였고 한일회담은 매국굴욕적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화하는 일보 전에 있다고 망상단정하고 현사태는 정부전복의 요인이 됨에 충분하다고 생각,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세칭 3·24, 3·25, 3·26 성토대회 및 불법시위로 김중태가 구속되고 각 학교의 동조적 반응이 보이자 국민여론을 환기 동조케 할 목적으로 시위의 계속을 공모, 현승일, 김도현 등이 주동, 세칭 4·17 한일회담 성토, 4·19 영령 추도식, 4·20, 4·21 난동시위로 민심을 교란하고 반정부적 감정의 조장과 무정부적 무질서 상태를 초래케 하여 극도의 정국불안이 조성되자 일부 국민이 호응한다는 착각 아래 대안 없는 한일회담 무조건 반대를 표면상 구호로 정부의 고시책에 불만을 품고 정부전복을 획책했다.
피고인 김중태 및 현승일은 64년 5월 14일 하오 3시쯤 서울대 문리대 구내 잔디밭에서 정권타도에 관한 모의를 한 후 각 대학교와 연락을 취해 동 16일 김중태 등 21명이 중국요정에서 회동, 소위 ‘황소식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거행할 것을 합의했다.
이들은 동 20일 서울문리대 교정에서 2,000여 명의 학생이 운집한 가운데 대회를 강행했고, 공소외(公訴外) 박동인 외 700여 명은 교문을 출발, 난동시위에 돌입, 폭력 투석을 자행했다.
피고인 김중태는 6월 1일과 2일 표면적으로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 결정적 무정부 상태를 야기할 심산 아래 단식농성, 시위 중인 공소외 박삼옥 등 70여 명 앞에 나와 이들을 선동 격려, 이에 고무된 단식 데모대는 시위에 돌입, 타 대학과 합류 뇌동(雷同)코 세종로 경찰관 파출소 등 450여 만 원의 공공기물 및 건조물을 손상, 경찰관 960여 명에 상해를 입히는 등 폭동했다.
피고인 손홍민은 동 김중태를 5월 21일부터 6월 2일 하오 5시쯤까지 서울시 용산구 후암동 27의 7 피고인 집 2층에 은거시켜 범인을 은닉했다.”
민비연 사건’에는 1964년 ‘김중태 등의 내란 사건’, 1965년 ‘민비연 내란음모 사건’, 1967년의 ‘민비연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등이 있다. 이 사건들은 각기 명칭은 달랐지만 사실상 6·3항쟁이라는 한 가지 사안과 같은 인물들에 대한 상징적 정치 재판이라고 하여 이를 각각 1, 2, 3차 민비연 사건이라고 부른다.
1차 민비연 사건과 관련하여 당국은 최고 15년의 중형을 구형했지만 재판부에 의해 번번이 묵살됐다. 결국 내란죄 부분은 삭제되고, ‘소요 및 집시법’ 위반 부분만 적용되었다. 결국 이들은 구속 140여 일 만인 1964년 10월 28일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이라는 가벼운 형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런데 1차 민비연 사건은 민비연의 조직 사건이 아니라 6·3항쟁 이후 다수의 투쟁 주도 학생들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민비연 학생들이 포함된 것이었다. ‘2차 민비연 사건’과 완전히 조작된 ‘3차 민비연 사건’은 민비연이 조직 차원에서 다루어졌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학생 1964-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