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예종·김정강학생데모 배후로 수배
수배된 주범
▶김정강(서울 문리대 정치과 3년, 가명 신일수(申一守, 申一洙)) 59년 서울대 정치과에 입학하여 좌경학생 서클인 신진회에 가입, 비밀로 공산주의를 연구하고 61년 서울대 민통련 조직의 핵심분자로 활동했다. 63년 서울 문리대에 마르크스 레닌주의자의 집결체로서의 강령과 규약 아래 모 비밀회를 동교 내에 점선조직하고 대구, 광주 및 각 지방에 핵포섭을 했다. 64년 초에는 정부의 등록금 인상조처 반대를 표면적인 명분으로 국가전복투쟁을 시도, 김중태 등을 배후에서 움직여 3·24 이후 학생 데모를 계속 일으켜 북괴의 적화통일에 합류하기 위해 책동했다.
▶도예종(전 민자통조사위원장, 전 민족민주청년동맹 경북도연맹 간사장) 5·16 후 민자통 등 반국가단체에 가입 활동한 혐의로 수배되자 도주, 김정강의 상부선으로 그를 배후에서 조종했다.
‘불꽃회 사건’이 터진 것은 김정강이 조직 구상을 하면서 메모해 둔 노트가 경찰에 입수됐기 때문이었다. 김정강에 의하면, 불꽃회는 김정강과 김정남(서울대 정치학과 4년)이 1964년 초에 만든 서울대 문리대 마르크스주의 연구 서클이었으며, 불꽃회란 이름은 레닌이 지하활동을 하면서 만든 ‘이스크라’(러시아어로 불꽃이라는 의미)라는 정치신문의 제목에서 따왔다. 멤버는 5~6명이었으며, 서울대 법대·공대·상대·사범대와 연세대·고려대 그리고 대구·부산·광주에도 비슷한 조직이 준비되고 있었다고 한다.
김정강은 불꽃회의 강령, 규약 등 10페이지를 직접 썼는데, 당시 한국사회를 ‘식민지 반봉건사회’로 규정하고, 제반 모순으로 판단되는 민족분단, 봉건적 모순과 외세의 억압 등을 타개하는 ‘민족통일 민족해방 민주주의혁명’을 방향으로 설정했다고 회고하였다. 강령에는 한반도를 대표할 정당은 북한의 조선노동당이라고 하였으며, 규약은 조직 운영 방식과 입회, 탈퇴 조건 등 4~5가지 내용이었다. 나머지는 활동하면서 가졌던 인식 등 김정강 자신의 생각과 구상을 적어놓은 것이었고, 몇몇 선배들의 이름도 있었다.
이 노트를 읽어봤던 사람은 김정남뿐이었는데, 김정남은 김정강 노트의 강령이 ‘5·16 쿠데타 세력을 미 제국주의의 직접적인 번견(番犬)’이란 표현으로 시작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발표된 연루자도 불꽃회와는 무관했으며, 이른바 ‘계보도’라는 것도 당시 학생시위를 주도하던 이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수사과정에서 불꽃회는 조직적인 반국가단체로 변해 검찰에 넘겨졌다. 노트를 보았다는 사실이 인정된 김정남에게는 불고지 혐의가 씌워졌으나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고, 김정강은 북한에 대한 고무찬양 혐의로 2년 형을 선고받았다. 나머지 30여 명은 모두 무혐의로 풀려났다.
결국 반국가단체를 조직하려 했다던 불꽃회 사건은 김정강 개인의 생각과 사상을 단죄하는 단독범행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도예종과의 만남 등이 기록되었던 김정강 노트는 당국에 1차 인혁당 사건의 빌미를 제공하는 결과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