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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종·김정강학생데모 배후로 수배

6일 밤, 치안국은 3·24데모 이후 계속된 일련의 학생 데모에 공산세력이 배후를 조종한 증거문건을 압수하고, 주범 도예종(41), 김정강(25) 등을 보안법, 내란 소요 등 위반혐의로 각 10만 원의 현상금을 붙여 수배했다고 발표했다. 치안국 정보과는 이들 주범 2명과 관련된 학생 및 졸업생 등 17명을 이미 검거, 광범한 수사를 펴고 있다.
수배된 주범 김정강민통련 등의 좌경학생단체를 발기 또는 가입한 자며, 도예종은 전 민자통 조사위원장을 지냈던 자로 밝혀졌다. 치안국은 수배된 2명이 김중태, 현승일 등을 뒤에서 조종, 데모가 발생하자 이미 조직한 점조직 등을 구사하여 난동 데모를 변질시켜 정부 전복을 꾀하도록 반국가책동을 했다고 발표했다. 이날 밤 경찰이 밝힌 2명의 혐의는 다음과 같다.
▶김정강(서울 문리대 정치과 3년, 가명 신일수(申一守, 申一洙)) 59년 서울대 정치과에 입학하여 좌경학생 서클인 신진회에 가입, 비밀로 공산주의를 연구하고 61년 서울대 민통련 조직의 핵심분자로 활동했다. 63년 서울 문리대에 마르크스 레닌주의자의 집결체로서의 강령과 규약 아래 모 비밀회를 동교 내에 점선조직하고 대구, 광주 및 각 지방에 핵포섭을 했다. 64년 초에는 정부의 등록금 인상조처 반대를 표면적인 명분으로 국가전복투쟁을 시도, 김중태 등을 배후에서 움직여 3·24 이후 학생 데모를 계속 일으켜 북괴의 적화통일에 합류하기 위해 책동했다.
▶도예종(전 민자통조사위원장, 전 민족민주청년동맹 경북도연맹 간사장) 5·16 후 민자통 등 반국가단체에 가입 활동한 혐의로 수배되자 도주, 김정강의 상부선으로 그를 배후에서 조종했다.『경향신문』 1964.7.7 석3면
불꽃회 사건 1964년 7월 6일 정부는 “학생 데모를 공산 세력이 배후에서 조종한 증거 문건을 압수하고, 도예종(당시 41세, 1975년 2차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과 김정강(서울대 정치학과 3년)을 국가보안법 위반 및 내란 소요 등의 혐의로 각각 현상금 10만 원씩 전국에 수배했다”고 밝혔다. 이어서 7월 18일 내무부장관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집결체인 불꽃회가 학생 데모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며 김정강과 김정남 등 30여 명의 이름을 계보도와 함께 발표했다.
‘불꽃회 사건’이 터진 것은 김정강이 조직 구상을 하면서 메모해 둔 노트가 경찰에 입수됐기 때문이었다. 김정강에 의하면, 불꽃회는 김정강과 김정남(서울대 정치학과 4년)이 1964년 초에 만든 서울대 문리대 마르크스주의 연구 서클이었으며, 불꽃회란 이름은 레닌이 지하활동을 하면서 만든 ‘이스크라’(러시아어로 불꽃이라는 의미)라는 정치신문의 제목에서 따왔다. 멤버는 5~6명이었으며, 서울대 법대·공대·상대·사범대와 연세대·고려대 그리고 대구·부산·광주에도 비슷한 조직이 준비되고 있었다고 한다.
김정강은 불꽃회의 강령, 규약 등 10페이지를 직접 썼는데, 당시 한국사회를 ‘식민지 반봉건사회’로 규정하고, 제반 모순으로 판단되는 민족분단, 봉건적 모순과 외세의 억압 등을 타개하는 ‘민족통일 민족해방 민주주의혁명’을 방향으로 설정했다고 회고하였다. 강령에는 한반도를 대표할 정당은 북한의 조선노동당이라고 하였으며, 규약은 조직 운영 방식과 입회, 탈퇴 조건 등 4~5가지 내용이었다. 나머지는 활동하면서 가졌던 인식 등 김정강 자신의 생각과 구상을 적어놓은 것이었고, 몇몇 선배들의 이름도 있었다.
이 노트를 읽어봤던 사람은 김정남뿐이었는데, 김정남은 김정강 노트의 강령이 ‘5·16 쿠데타 세력을 미 제국주의의 직접적인 번견(番犬)’이란 표현으로 시작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발표된 연루자도 불꽃회와는 무관했으며, 이른바 ‘계보도’라는 것도 당시 학생시위를 주도하던 이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수사과정에서 불꽃회는 조직적인 반국가단체로 변해 검찰에 넘겨졌다. 노트를 보았다는 사실이 인정된 김정남에게는 불고지 혐의가 씌워졌으나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고, 김정강은 북한에 대한 고무찬양 혐의로 2년 형을 선고받았다. 나머지 30여 명은 모두 무혐의로 풀려났다.
결국 반국가단체를 조직하려 했다던 불꽃회 사건은 김정강 개인의 생각과 사상을 단죄하는 단독범행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도예종과의 만남 등이 기록되었던 김정강 노트는 당국에 1차 인혁당 사건의 빌미를 제공하는 결과를 가져왔다.『한국일보』 2003.4.25 석A21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김정강(구술)」, 『내가 겪은 민주와 독재』, 선인, 2001, 59~89쪽. 김정강, 「운동권 전설적 이론가 김정강의 ‘4·19에서 6·3까지’」, 『신동아』, 2007년 6월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사 연표』, 선인, 2006, 130쪽. 신동호, 『오늘의 한국정치와 6·3세대』, 예문, 1996, 144~1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