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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지령 받고 국가변란음모 지하조직” 중앙정보부, ‘인민혁명당’ 41명 구속

14일, 중앙정보부북한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적인 지하조직으로 국가를 변란하려던 ‘인민혁명당사건’을 적발,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을 전국에 수배 중에 있다고 발표했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하여 “이 인민혁명당북한 노동당 강령을 토대로 지난 62년 1월에 발족, 전 혁신계 일부 인사, 일부 현직 언론인, 대학교수, 학생 등을 주동인물로 하여 조직을 확대하여 지난 3월 24일 한일굴욕외교를 반대하는 순수한 학생 데모가 일어나자 절호의 기회가 온 것으로 판단, 데모 주도 학생을 포섭하여 데모의 방향과 구호를 통일하도록 전국 학생조직에 지령하는 동시에 현 정권이 타도될 때까지 학생데모를 계속 조종함으로써 북괴가 주장하는 노선에 따라 남북평화통일을 성취할 것을 목표로 암약해 왔다”고 말했다. 또한 김 부장은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한 인민혁명당 사건은 지난 6·3사태의 주동학생에 대한 수사를 진행 중 단서를 잡고 캐낸 것이라며, 이미 구속된 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은 증거인멸을 위해 자살을 꾀했으나 미수에 그쳤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일부 합법정당에도 침투했으며 합법정당 인사 2명도 구속자 중에 끼어 있으나 그 명단과 내용은 “아직 수사 중이기 때문에” 발표되지 않았다. 정보부는 이들을 수일 내에 일반 검찰에 송치할 예정이다. 정보부가 발표한 사건전모와 검거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사건전모(중앙정보부발표) 62년 1월 우동읍 집에서 간첩 김영춘 사회로 우동읍, 김배영, 김영광, 김금수, 도예종, 허작, 김한덕, 박현채 등이 모여 창당발기인회를 열었다. 이는 북괴의 대남사업 강화책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은 64년 2월 북괴 중앙노동당에서 한일회담반대 학생데모를 조직적으로 일으키라는 지령을 받고 당의 지도체계를 이러한 방향으로 개편, 학생·언론계 인사 포섭에 주력하고 일본 경유 북괴에 사람을 보내는 등 연락과 지령을 전달받았다.
이들은 중앙 및 서울시당을 비롯한 일반 당부와 특수조직에 착수, 학생부, 노동부, 농민부, 청년부, 언론기관부, 합법정당부 등을 만들었다.
3·24 학생데모가 일어나자 도예종, 정도영은 박현채를 중앙당 데모 총지휘자로 기용, 데모 주동학생들과 조선일보 기자 박범진(미체포) 등을 포섭했고 이를 전국적으로 배후에서 조종했다.
이들은 계엄선포 후 조직망이 폭로될까 봐 학생데모 주동자들과 일체의 연락을 끊었으며, 그중 1명은 조사 도중 안경알로 자살을 기도 입원수술까지 받았다.
구속자 명단 도예종(40. 중앙당무위원회 위원장. 무직), 박현채(30. 중앙상무위원회 조직위원. 한국농업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서울상대 강사), 정도영(39. 중앙상무위원회 교양위원. 합동통신사 조사부장), 김영광(34. 전국학생지도부 교양책. 회사원), 김금수(28. 중앙상임위원회 연락책. 운수업), 이재문(31. 중앙상임위원회 조직부책. 대구매일신문 기자), 임창순(51. 전국학생지도부 위원장. 태동고전연구소 주간), 김한덕(33. 경남도당 교양책. 목재상), 허작(31. 발기인 및 초대 경남도책. 부산 내성국민교 교원), 김병태(37. 서울시당책. 농협자문위원. 대학강사), 강무갑경향신문은 강무용으로 보도(『경향신문』 1964.8.14 석1면)(46. 경남도당책. 무직), 이영석(33. 경남조직책. 한의사), 박상홍.경향신문은 박조홍으로 보도(『경향신문』 1964.8.14 석1면)(45경북도당책. 서적상), 김경희경향신문은 김병희로 보도(『경향신문』 1964.8.14 석1면)(27. 서울학생지도부책. 민중서관 사원), 오병철(27. 전국학생지도부 의장. 서울문리대 철학과 4년), 전무배(33. 서울시당 교양책. 서울신문사 기자), 김영한(30. 중앙상위교양부연락원. 미국인회사 사원), 정혁택경향신문은 도혁택으로 보도(경향신문』 1964814 석1면)(31. 경북도당 교양책. 문호사 편집원), 박중기(29. 서울시당원. 한국여론사 취재부장), 서정복(24. 전국학생지도부 조직책. 서울문리대 철학과 4년), 송상진(37. 경북도당간부. 건축자료상), 이종배(29. 중앙상무위원회 총무위원. 제일은행본점 행원), 김배균(27. 부산학생지도부책. 부산대상대 경제과 4년), 박익수(30. 학생지도부 전남책. 회사원), 황건(24. 후보당원. 서울법대법학과 4년), 하일민(24. 서울대대학원 철학과 1년), 박영섭(28. 군인. 병장), 김정강(25. 불꽃회 창설자. 서울문리대 정치과 3년), 김정남(22. 불꽃회 조직책. 서울문리대 정치과 3년), 김중태(24. 데모주동자. 서울문리대 정치과 4년), 현승일(21. 데모주동자. 서울문리대 정치과 4년), 김도현(21. 데모주동자. 서울문리대 정치과 4년), 백승진(22. 데모행동대원. 서울문리대 사학과 2년), 김승균(26. 데모배후조종. 성대동양철학과 4년), 정만진(24. 후보당원. 대구대학법학과 4년), 이영호(28. 후보당원. 명지고교 강사), 이병일(42. 후보당원. 광업), 장상호(45. 후보당원. 무직), 김득수(37. 후보당원. 무직) (2명은 미발표)『동아일보』 1964.8.14 석1면, 『경향신문』 1964.8.14 석1면. 박태순·김동춘, 『1960년대의 사회운동』, 까치, 1991, 212~213쪽
제1차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 1964년 3월 한일국교정상화회담이 본격화되자 학생과 시민의 반대가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1964년 3월 24일 서울대학교 시위를 시작으로 고등학생까지 참여한 학생시위는 전국 주요도시로 계속 번져나갔다. 6월 3일에는 1만 2000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광화문까지 진출하며 정권퇴진을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이날 밤 9시 50분 서울시 전역에 8시부터 소급 실시되는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6월 4일 자정부터 육군 4개 사단이 진주하였고 대량 검거가 시작되었다. 7월 29일 계엄이 해제되기까지 55일 동안 구속된 인원은 학생 168명, 민간인 173명, 그리고 언론인 7명으로 총 348명이었다.
5·16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은 박정희 정권은 밖으로부터의 압력과 내부로부터의 저항 속에서 정권을 보다 더 튼튼하게 다질 조치가 절실하게 필요하였다. ‘인민혁명당 사건’의 발단은 학생운동의 배후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의 배후조직 중의 하나였던 불꽃회 대표 김정강의 일기에서 인민혁명당의 도예종과의 관련성이 드러남으로써 단서가 주어졌던 것이다. 이에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1964년 8월 14일 세칭 ‘인혁당 사건’을 발표하여 한일회담 반대투쟁의 열기를 꺾으려 하였다.
1964년 8월 14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기자회견을 소집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적인 지하조직으로 국가를 변란하려던 인민혁명당 사건을 적발,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은 전국에 수배 중에 있다”고 발표했다 중앙정보부 발표에 의하면 인민혁명당은 1962년 1월 “북한으로부터 특수 사명을 띠고 남하한 간첩 김영춘,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북도 간사장이던 도예종 등이 발기인회를 갖고, 외국군 철수와 남북 서신·문화·경제교류를 통한 평화통일을 골자로 한 노동당 강령 규약을 토대로 발족”했고, 3·24 학생 시위가 일어나자 불꽃회 간부 등을 포섭, 배후조종하여 현 정권 타도와 국가 변란을 음모했다는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47명을 송치하였다.
사건을 담당한 공안부 검사(이용훈, 최대현, 김병리, 장원찬)들은 구속연장 만료일인 9월 5일, 만장일치로 기소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관련자들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불온단체를 조직했다는 혐의는 하나도 없다"면서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었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고 항명의 경위를 밝혔다. 이용훈 부장검사, 김병리, 장원찬 검사는 동시에 사표를 제출하였다. 중앙정보부는 검찰에 압박을 가해 이 사건을 당시 숙직담당 검사를 통해 간신히 기소할 수 있었다.
기소 뒤에 피의자들에 대한 고문사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인권옹호협회에서는 인혁당 사건의 무료 변호를 맡기로 결정하고, 피고인들에게 가해진 혹독한 고문 내용을 폭로하였다.
그 뒤 한신옥 검사가 47명 중 26명만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반국가단체 구성)로 구속 기속하였으나, 재수사 결과 14명이 공소 취하되고 나머지 12명은 반공법 위반(반국가단체의 찬양 고무)으로 공소 변경되었다. 1965년 1월 20일 서울 형사지법 합의 2부(재판장 김창규)는 피고 13명 중 도예종에게 반공법 4조를 적용해 징역 3년, 양춘우(추가 기소)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하고, 나머지 피고인 11명에 대해서는 전원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들이 서클을 구성한 적이 있었음은 인정할 수 있지만, 북괴에 동조하는 인혁당 강령 심의에 참여한 사실이 없으며, 그 강령 내용을 알았다는 점을 인정할 수도 없고, 그 밖에 북괴에 동조한 사실 또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무죄 이유였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발표한 어마어마한 국가변란사건은 용두사미로 끝을 맺었다.검찰이 제기한 항소심에서는 1심판결을 모두 파기하고 13명의 피고 전원에게 유죄판결을 선고했는데, 대법원에서도 상고 기각판결을 내려 항소심 형량이 그대로 확정되었다.(이상우, 「민족일보·인혁당 사건의 전말」, 『신동아』, 1985년 6월호, 336쪽)
제1차 인혁당 사건은 정권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거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다시피 하는 용공조작사건의 전형을 보여준 시초였다. 그러나 고문으로 조작된 조직사건을 통해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려던 박 정권의 시도는 성사되지 못했다.
인혁당 사건의 망령은 10년 뒤,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신직수 중앙정보부장과 중앙정보부 5국 대공과장이었던 이용택 중정 6국장의 손에 의해 또다시 제2차 인혁당 사건으로 부활하게 된다.『사료해제집 제1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74~75쪽. 이상우, 「민족일보·인혁당 사건의 전말」, 『신동아』, 1985년 6월호, 333~3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