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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문제와 한일회담

1965년 6월 22일 일본 도쿄에서 한일협정이 조인되었다. 이동원 외무장관한일협정에 서명하고 6월 24일 귀국해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이동원은 이 자리에서 독도문제에 대해 제기되고 있던 의혹을 전면 부인하였다. 독도문제는 앞으로 분쟁이 발생했을 때 의견을 교환하기로 한일 간에 합의했으나, 이는 법적 구속력을 갖는 것이 아니며, 제3국에 의한 중재에도 합의한 바 없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독도문제에 대한 정부의 방침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으며, 발표된 이외의 비밀은 일절 없다고 강조했다.『동아일보』 1965.6.25 석1면 한편 일본의 사토 수상도 7월 1일 기자회견에서 독도문제는 국민감정 및 영토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만큼 도저히 양보할 수 없다는 종래의 입장을 되풀이한 것으로 전해졌다.『경향신문』 1965.7.2 석1면 이 같이 독도문제에 대해 양 정부가 서로 다른 입장을 밝혔지만, 한일협정문에 독도영유권 문제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국정부가 독도영유권 문제에 대해 일본과 타협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즉, 한국 정부가 일본의 요구대로 고유영토인 독도 영유권 문제를 한일 간 ‘미해결’ 문제로 인정하고, 앞으로의 현안으로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한일협정에 포함된 ‘한일 양국 간 분쟁 해결에 관한 교환 공문’의 내용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한국 정부는 독도는 한국의 고유 영토이므로 교환 공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한 반면, 일본 정부는 독도는 양국 간 분쟁 대상으로 교환 공문에 의거해 앞으로 처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도학술조사단과 독도폭격사건
1945년 9월 27일 연합국총사령부는 일본 어선의 어로제한구역을 규정한 ‘맥아더선(MacArthur Line)’을 선포했다. 맥아더선에 따라 일본인들의 독도 근해 출어도 금지되었다. 그러나 1947년 여름 일본인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오가며 불법적인 어로활동을 하며, 독도에 대한 영유권과 어장권을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독도에 상륙해 점거하기도 하였다. 이에 울릉도민들이 일본인들의 독도 불법 점거 및 조업 방해를 해결해 줄 것을 진정하자 남조선과도정부는 연합국총사령부에 일본의 어업구역축소, 즉 맥아더선 축소를 요구했다. 한편으로 일본의 도발에 대응해 남조선과도정부는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단을 구성해 독도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활동을 벌였다. 1947년 8월 16일 역사·외교·교육·수산 전문가가 포함된 독도조사단은 독도에 상륙해 조사활동을 벌인 후 8월 28일 서울로 돌아왔다. 조사단은 귀환 후 8월 말부터 연말까지 귀환보고 강연회를 비롯하여, 사진전·보고전 개최, 조사결과에 대한 각종 보고서 작성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당시의 신문들은 그러한 활동을 비교적 상세하게 보도하였다.해방 직후 일본의 독도 침탈 상황과 독도학술조사단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정병준, 『독도 1947』, 돌베개. 2010, 허영란·박진희, 『독도 관련 한국 및 미국 사료 조사·해제-해방후~1950년대』, 한국해양수산개발원. 2008
일본의 독도 침탈로 고조된 한국인들의 독도에 관한 관심은 두 차례의 독도폭격사건으로 최고조에 달했다.1948년, 1952년 독도 폭격사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할 것. 박진희, 「독도 영유권과 한국·일본·미국」, 『독도자료』, 국사편찬위원회. 2008 1948년 6월 8일 미 공군 소속 폭격기들의 폭격으로 독도 인근에서 어로 중이던 한국 어민 다수가 사망하고 어선이 침몰한 사건이 발생했다. 미 극동공군사령부는 오폭을 시인하고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게 이 폭격사건은 자국민이 자국 영토에서 오폭으로 사망했다는 점에서도 충격적이었지만, 미군이 독도 영유권에 관해 어떤 정보를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자아냈다. 또한 이 사건은 독도 영유권문제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조사 없이 오폭사건으로 덮어짐으로써 언제든지 재연될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불행히도 1952년 9월 2차 폭격사건이 또다시 발생했다. 그러나 2차 독도 폭격사건은 미 공군의 우발적인 오폭사건이 아니라 일본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되고 연출된 결과였다.
1952년 9월 15일 미 극동공군사령부 소속 폭격기가 독도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했다. 당시 한국어선 광영호가 해녀와 선원들을 싣고 조업 중이었지만,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폭격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4월 25일 울릉도민의 요청으로 한국정부가 미 극동공군사령부에 문의한 결과 독도와 주변 섬에 대한 출입금지규정은 없으며, 폭격연습 목표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회신을 전달받았다. 그리고 이 회신 내용은 경상북도를 통해 울릉도에도 전달되었기 때문에 어민들이 안심하고 조업에 나선 때였다. 사건이 발생하자 변영태 외무장관은 주한미국대사관을 통해 유감을 표명하며 재발 방지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미 국무부는 러스크 각서를 언급하며 독도가 일본 영토이며, 미일합동위원회에서 일본 시설물인 독도가 폭격연습장으로 지정되었다고 회신했다. 폭격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인 1952년 7월 26일 미일합동위원회는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여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하였고, 같은 날 일본 외무성은 고시 제34호를 통해 이를 공시했다.
그러나 독도 폭격사건으로 한국 내 여론이 들끓자 미 국무부는 한일 간 독도 영유권 분쟁에 미국이 휘말리지 않도록 주의를 촉구했다. 결국 한국의 여론에 밀린 미 극동공군사령부는 독도를 폭격 대상지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고, 이 사실은 1953년 1월 한국정부에 통보되었다. 그리고 일본 정부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미일합동위원회는 1953년 3월 19일 독도 폭격장 지정을 해제하였다. 일본 외무성은 5월 14일 고시 제28호를 통해 이를 공시했다.
한편 주한미국대사관은 폭도 폭격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주한 미군당국이 한국정부에 독도 폭격장 사용 허가를 받아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951년 6월 주한 미 8군 부사령관 쿨터 중장이 장면 국무총리에게 독도 폭격장 사용 허가를 요청하자, 한국 정부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폭격장 사용을 허가하였다. 이처럼 독도 폭격사건 처리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 중 하나는 한국과 일본 주둔 미군 간에 독도 영유권에 관한 인식과 정보에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미일합동위원회가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한 데는 일본의 의도가 숨어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일평화조약 체결과정에서 당초 독도가 한국령으로 규정되자 일본은 미국을 상대로 집요하게 교섭했고, 그 결과 1951년 9월에 체결된 최종 조약문에서 독도는 명기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이 1952년 1월 평화선을 선포하며 독도 영유권을 재확인하자 즉각 반발했고, 미일합동위원회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은 폭격연습장이 필요했던 미 공군에게 독도가 자국 영토라며 연습장으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고, 미 공군은 과거에도 사용한 적이 있었던 독도가 적절한 대안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 공군이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한 충분한 고려와 정보를 활용했을지는 의문이다.

대일평화조약과 독도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활용하고 있는 또 하나의 사례는 대일평화조약이다. 1951년 9월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연합국과 패전국 일본 사이에 강화조약인 대일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현재 일본은 이 조약문에 독도에 관한 명기가 누락되었다는 점을 들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대일평화조약은 당초 일본에 대한 ‘징벌’ 조약으로 구상되었지만, 전 세계적으로 냉전이 확산되는 가운데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한국전쟁의 발발 등 동아시아의 안보 위기가 더해짐에 따라 ‘관용’조약으로 체결되었다. 미국이 아시아 반공진영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과의 강화조약을 조속히 체결해 일본을 반공보루로 편입한다는 정책 전환의 결과였다. 이과정에서 독도 영유권에 관한 미국의 입장 변화가 나타났다. 미국은 1947년 대일강화를 구상할 때부터 독도를 한국령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대일 유화정책으로 전환하면서 독도를 일본령으로 규정했고, 이는 ‘러스크 각서’로 나타났다. 미국은 1951년 8월 10일 미국 국무부 극동담당차관보 딘 러스크(Dean Rusk) 명의의 각서에서 독도는 1905년 이래 시마네현 오키 섬 관할이었고, 그동안 한국은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Letter by Dean Rusk to Yu Chan Yang, Ambassador of Korea, August 10, 1951, RG 59. Lot File 54 D423, Japanese Peace Treaty Files of John Foster Dulles, 1946~1952년, Box. 8 러스크 문서는 한국이 대일평화조약 조문에 독도가 한국령임을 명기해달라는 요청에 대한 회신이었다. 현재 일본은 이 러스크 각서를 유력한 근거자료로 제시하며,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러스크 각서가 미국의 최종적인 입장은 아니었다. 1953년 한일 간에 독도와 평화선을 둘러싼 분쟁이 고조되자 미국 정부 일각에서는 러스크 각서를 공개해 독도를 일본령으로 확정해주고 한일 간 분쟁을 종식시키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에 대해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덜레스(John F. Dulles)는 독도영유권 문제에 미국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덜레스는 1953년 12월 9일 러스크 각서가 독도 영유권에 관한 미국의 입장임을 재확인하면서도, 미국의 입장은 대일평화조약 서명국 중 1개국의 입장일 뿐이라고 못 박았다. 덧붙여 그는 독도 문제는 국제사법재판소에 위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강조했다.Secretary of State to Tokyo Embassy, December 9, 1953, RG 84, Entry 2846, Korea, Seoul Embassy, Classified General Records, 1953-1955, Box. 12 덜레스는 대일평화조약문의 해석은 서명국 전체의 합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적함과 동시에 한일 간의 갈등에서 미국은 중립적 입장을 취할 것임을 천명한 것이었다.

평화선 선포와 독도
독도 영유권 문제가 한일 간에 공식적으로 쟁점이 된 것은 평화선 선포를 계기로 해서이다. 한국은 1952년 1월 18일 국무원 고시 14호로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은 한일 간 평화와 우의를 증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평화선’이라 명명되었다.대한민국 공보처, 「인접해양주권선언에 대하여 부연」 1952.2.8, 『대통령 이승만박사 담화집』 2집, 1952, 84쪽 평화선은 영해와 대륙붕의 어업자원을 보호하고, 한일 간 어업분쟁 방지하며, 조속한 한일어업협정 체결을 촉진하기 위해 설정되었다. 그러나 일본 외무성은 즉각 항의각서를 전달하면서 평화선은 대일평화조약 체결에 따라 한국과 어업협상을 하려는 일본의 선의를 거부하는 행위이며, 다케시마 또는 리앙쿠르 암(Liancourt Rocks)으로 알려진 일본 영토를 침범했다고 주장했다. 한국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 언급할 가치가 없는 문제라고 반박했다.외무부, 「日側 口述書」 1952.1.28, 「我側 口述書」 1952.2.12, 『독도관계자료집(Ⅰ)-왕복외교문서(1952~76)-』, 1977, 1~6쪽 이렇듯 평화선 선포를 계기로 일본정부가 공식적으로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분쟁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평화선과 독도 영유권문제는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일본은 평화선 선포를 계기로 한국의 독도 불법 점유를 비난하며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항의각서를 한국에 전달한 이래 지속적으로 항의각서를 보냈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1952년 1월부터 1965년 말까지 33회나 구상서를 보냈고, 한국은 26회를 보냈다고 한다. 또한 동시에 일본 해상보안청 선박은 한일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독도를 순시하였다. 특히 ‘구보다 망언’으로 3차 한일회담이 결렬된 1953년부터 1955년 사이에 해상보안청 순시 횟수가 급증했다. 해상보안청의 독도 순시는 독도 영유권 주장을 강조하고, 평화선 수역에서 불법 조업을 하다 한국에 나포되고 있던 자국 어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 한일 간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다.

한일회담과 독도문제
일본은 한일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독도문제를 의제로 제안하거나 협의를 요청하지 않는 대신 한일회담장 밖에서 끊임없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제기하였다. 한일회담 과정에서 일본이 독도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것은 1962년에 이르러서이다.
1962년 3월 12일 최덕신 외무장관과 고사카 외상 회담에서 일본은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와 같은 공정한 제3자에게 조정을 의뢰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최덕신 외무장관은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나 한국의 영토이며, 한일회담에서 논의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거절했다. 고사카 외상은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문제와 이 문제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문제와는 별개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일국교 정상화 전이라도 이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한다는 원칙에 한국이 합의해줄 것을 거듭 요청했다.「한일외상회담 제1차 회의 회의록」 1962.3.12, 『제6차 한일회담 제1차 정치회담 V.2 최덕신-고사카(小坂) 외상회담, 1962.3.13-17』, 등록번호 733 이세키 아세아국장도 “사실상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다. 크기는 ‘히비야’ 공원 정도인데, 폭발이라도 해서 없애 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라고 언명하며,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한다는 원칙적 합의를 종용했다.「제6차 한일회담 제2차 정치회담 예비절충 제4차 회의 회의록」 1962.9.3, 『제6차 한일회담 제2차 정치회담 예비절충 : 본회의 1-65차, V.2 4-21차, 1962.9.3. 13-12.26』, 등록번호 737 일본은 이때 독도문제를 한일 간 분쟁지역으로 확인받고, 한일국교정상화 이후에라도 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을 한국과 합의한다는 원칙을 세운 것이다. 일본은 11월 12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외상은 청구권 문제를 타결하는 회의에서도 독도문제를 거론했다. 이에 김종필은 3국 거중조정안을 제안했다. 그동안 한국 정부가 독도 고유영토론에 입각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일축해왔던 것에 비추어보면 뜻밖의 제안이었다.
김종필의 3국 거중조정안에 따라 한국은 12월 21일 독도는 한국 영토이며, 한일회담의 현안문제도 아닌데 일본이 문제를 제기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며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국교정상화라는 대국적 견지에서 김종필이 제안한 제3국에 의한 조정안을 제시하며 이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이에 일본은 12월 26일 국교정상화 후 1년간 양국이 합의하는 조정기관에 의한 조정에 독도 문제를 회부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기로 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안이라며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하였다.「제6차 한일회담 제2차 정치회담 예비절충 제22회 회의 회의록」 1963.1.11, 『제6차 한일회담 제2차 정치회담 예비절충 : 본회의 1-65차, V.3 22-32차, 1963.1.11-3.28』, 등록번호 763 일본은 한국이 3국에 의한 조정방법을 취함으로써 해결을 지연시키겠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조정 결정에 따른다는 조건을 붙여 3국 조정의 구속력을 인정하는 식의 절충안도 가능하다고 제안했다.「한일회담 각 현안 문제에 관한 아측 최종 입장 결정」 1963.4.20, 『속개 제6차 한일회담 현안문제에 관한 한국측 최종입장 1963. 4-64. 3』, 등록번호 738 일본은 이 같은 절충안을 통해서라도 독도가 분쟁지역이라는 사실을 국교정상화 전에 한국이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독도문제는 1962년 일본이 제기한 이래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협의되었다. 한국은 독도문제는 한일회담의 현안이 아니므로 국교 정상화 후에 외교계통을 통해 해결을 도모하자는 입장을 견지했다. 김종필의 3국 거중조정안도 이 원칙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반면 일본은 한일협정 체결 전에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는 것에 대해 한국이 확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일본은 한국이 제안한 3국 거중조정안에 대해 신뢰하지 않았다. 한국이 조정 결과에 대해 준수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고, 제3국으로 미국을 예상하는데, 한일 간 문제가 미국의 영향하에 해결되는 인상은 일본 야당의 반대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에 독도 문제를 확실히 해결할 방법을 희망했다.「제11차 수석대표 회담(1965.4.13) 결과 보고」 『제7차 한일회담 본회의 및 수석대표회담, 1964-1965』, 등록번호 1459 일본은 한국이 일본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자 최종적으로 ‘교환공문’으로 해결하고자 시도했다.
1965년 6월 17일 일본은 교환공문에 ‘다케시마 주권에 관한 분쟁을 포함’한다는 문구를 삽입해 한국에 전달했다. 그러나 한국은 이를 거부하고, ‘양국 간에 일어날 분쟁’이라는 표현으로 대체하자고 제안했다. 일본은 이 표현이 독도문제를 제외시키려는 의도가 있다고 판단하여 ‘양국 간 분쟁’이라는 표현을 주장하였다. 6월 22일 한일협정 조인을 앞두고도 교환공문에 독도 문제를 포함시키는 표현을 둘러싼 한일 간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결국 이동원 장관과 사토 수상의 회담에서 최종 타협이 이루어졌다. 한국은 일본이 요구한 ‘양국 간 분쟁’을 수용하는 대신 일본은 한국이 요구한 ‘조정’이라는 문구를 받아들였다. 한일협정 조인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극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 회담에서 이동원 외무장관은 독도문제는 한국의 입장에서 다이너마이트 같은 것으로, 한국의 야당과 대중들은 일본의 야당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위협적이므로 한국정부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는 점을 이해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한국이 교환공문에 독도문제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취지로 발언해도 일본이 공식적으로 즉각 반론을 제기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요청이 일본 정부가 국회에서 교환공문이 독도를 포함한다는 취지로 답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말했다.「佐藤總理·李外務長官會談」 1965.6.22 『ⅩⅤ 竹島問題』, 문서번호 910 그의 발언은 독도가 한일 간 분쟁 대상문제라고 명료하게 말하고 있진 않지만, 교환공문의 대상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한일 정부가 각자 유리한 대로 설명하자는 취지이다. 이동원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의 해결법이었다.이동원, 「대통령을 그리며」, 고려원, 1992, 243쪽 따라서 한일 양 정부가 국회와 국민을 상대로 각각 유리한 쪽으로 협정 내용을 설명함으로써 의혹과 비판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65년 6월 22일 조인된 ‘한일 양국 간 분쟁 해결에 관한 교환 공문’은 “양국 정부는 별도의 합의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양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해 해결하도록 하며, 이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경우는 양국 정부가 합의하는 절차에 따라, 조정에 의해 해결을 도모한다.”고 작성되었다. 그런데 이 교환공문의 내용을 놓고 한국은 독도문제는 교환공문의 대상이 아니라고 한 반면, 일본은 대상이 된다고 주장했다. 양국 정부의 상반된 주장은 양국 국회에서 문제가 되었고, 한국 국민들에게도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이 같은 양국의 상반된 주장은 ‘독도 밀약설’의 배경이 되었다.
1965년 1월 11일 정일권 총리와 고노 이치로 건설상의 특명을 받은 우노 소스케 자민당 의원이 독도문제를 ‘미해결의 해결’이라는 대원칙 아래 4개항의 부속조항에 합의했다는 것이 ‘독도 밀약설’의 내용이다.노다니엘, 『독도밀약』, 한울, 2011 이에 따르면 한국과 일본은 “독도·다케시마 문제는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 해결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조약에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대원칙에 입각해 처리하기로 하였다. 이 같은 합의는 박정희 대통령과 사토 수상의 재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독도 밀약과 관련한 자료는 한일 양국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어 진위를 확인할 수 없다.
독도 영유권 문제는 한일협정 조인 직전까지 진통을 겪을 만큼 한일 간 첨예한 비공식 현안이었다. 한일협정 체결 과정에서 일본은 독도가 한일 간 분쟁지역이라는 사실을 한국으로부터 확인받고자 했고, 한국은 거부했다. 현재 일본은 분쟁지역인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독도는 고유 영토로 단 한 번도 분쟁대상지역이 된 적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