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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타임〉지, 한일협정 및 한일협정반대운동에 대해 보도

미국 주간지 〈타임〉은 2일자 17면에 한일협정한일협정반대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했다. 과거 대동아공영권에 속했던 모든 국가 중 한국보다 더 신랄하게 일본을 증오하는 나라는 없다.
그리고 반감은 양국이 똑같다. 제국주의 일본에 의한 36년간의 잔혹한 식민지배에서 아직도 고통을 겪고 있는 한국인들은 그들의 과거의 상전을 한국의 경제적 지배를 다시 노리는 잔인하고 교활한 인종으로 간주한다.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일본인에게 있어서는 한국인들이란 도쿄의 암흑가를 지배하는 마늘 냄새 풍기는 한국인 깡패들에 의해 상징되는 ‘센징’(천한 인간)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강렬한 적대의식은 혁명과 치솟는 민족주의에 의해 분열된 아시아에서는 쉽사리 중화되지는 않는다.
지난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한국은 우정 어린 관계와 순수한 상호번영을 향해 마침내 발걸음을 내디디었다.
이러한 진전은 14년 동안의 분규에 쌓인 협상 후 도쿄에서 이뤄졌으며 일본과 한국의 외무장관들은 국화로 장식된 에이사쿠 사토 수상 관저의 전실로 의젓하게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서 만면에 미소를 띤 관리들은 양국을 현대사에서 최초로 정치 및 외교상 동등국으로 성립시키는 ‘정상화’조약과 26개의 관계문서에 서명했다. 그러고 나서 헨델의 ‘용감한 자를 위한 조종’이라는 낭랑한 곡조에 맞춰 사토와 외무장관들은 프랑스 샴페인으로 서로 건배를 들었다.
1876년 이후 처음으로 양국 사이의 외교사절교환을 규정한 기본조약과 함께 뿌리 깊은 경제 및 인종적 마찰을 감소하고자 한 4개의 보조협정문서가 수반된다. 한 의정서는 한국에의 8억 달러의 일본차관, 상품 및 민간차관의 공급을 규정했다. 또 다른 의정서는 일본에 거주하는 57만 한국인에게 충분한 교육, 보건 및 복지혜택을 제시했다.
사토 정부는 또한 서울당국에 일본인들이 점령기간 중 훔쳐간 도자기에서 서예에 이르는 다량의 한국 국보를 반환하기로 동의했다. 그중 가장 논란이 컸던 한국 연해의 풍부한 어장을 취급한 협정에 있어서 일본은 12마일 제한선(전에는 제한선이 60마일이었다.) 밖에서 어로작업을 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함으로써 추가로 약 8만 5천마일의 귀중한 수역에 제한된 출입권을 얻었다.
이 조약은 오랫동안 양국이 그들의 분쟁을 매장하도록 작용해 온 워싱턴에서 크게 환영받았다. 이 협정은 공산주의 지배하의 북한을 의미 깊게도 배제하기 때문에 아시아의 공산주의자들은 그것은 ‘미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계획 중 또 다른 단계’라는 북평방송의 비난을 소리 높여 반복했다.
일본과 한국의 좌익들은 성급히 거리로 뛰쳐나와 항의했다. 서울에서는 가장 추악한 난동이 벌어졌고 군중들은 거리에서 소란을 떨며 1905년 일본침략에 항거하며 칼로 찔러 자살한 한국의 국가적 영웅 민영환 씨의 동상 아래로 모여들었다.
서울 경찰은 수십 명의 머리를 두들겼고 1,000여 명 이상을 감방으로 마구 실어갔다. 이러한 모든 소요에도 불구하고 사토 수상이나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은 그들의 의회가 연말까지는 조약을 비준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박 대통령은 이처럼 표현한다. ‘만약 그것이 오늘과 내일에 있어 우리들에게 혜택이 된다면 우리가 어제의 적과도 손을 잡는다는 것은 현명한 것이다.’『경향신문』 1965.7.7 석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