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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 대학교수단 354명, 한일협정비준반대 선언문 발표

12일 오전, 한일협정비준국회 개회에 맞춰 재경 대학교수단 354명이 서울대에서 한일협정비준을 반대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재경교수단은 선언문에서 한일회담의 경과와 협정내용이 민족적 자주성과 국가적 이익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올뿐더러 장차 심히 우려한 사태가 전개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국회는 여야를 막론하고 당파적 이해를 초월하여 치욕적인 불평등협정을 결연히 거부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12일 오전 10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뒤뜰에 모여 미리 마련된 선언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한 후, 한일협정비준반대투쟁을 계속하기로 다짐하고 10시 20분경 헤어졌다.
이날 의장단으로 선임된 조윤제, 김윤경, 이헌구, 김경탁, 권오돈 등은 따로 회합하여 서명운동을 전국적인 규모로 계속하기로 합의하고 추후 행동은 정세의 추이를 봐서 결정하기로 했다.『동아일보』 1965.7.12 석1면, 『경향신문』 1965.7.12 석7면
재경교수단 한일협정 비준 반대선언 대한민국 주권자는 엄연히 국민이다. 국민은 정부의 정책을 언제나 자유로이 비판하는 권리를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국민의 비등하는 여론을 최루탄과 경찰봉에 의한 폭압 및 가식에 찬 선전으로 봉쇄하는 한편 일본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초조와 애걸로 굴욕적인 협정에 조인하고 말았다.
우리 교수 일동은 한일협정의 내용을 신중히 분석 검토한 끝에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것이 우리의 민족적 자주성과 국가적 이익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올뿐더러 장차 심히 우려한 사태가 전개될 것이 예견되므로 이에 그 비준의 반대를 선언한다.

첫째로, 기본조약은 과거 일본제국주의 침략을 합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우리 주권의 약화 및 제반 협정의 불평등과 국가적 손실을 초래할 굴욕적인 전제를 인정해 놓았다.
둘째로, 청구권은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재산상의 피해를 보상하는 것이 못 되고 무상제공 또는 경제협정이라는 미명 아래 경제적 시혜를 가식하였으며 일본자본의 경제적 지배를 위한 소지(素地)를 마련해 주었다.
셋째로, 어업협정은 허다한 국제적 관례와 선례에 비추어 의당히 정당화되는 평화선을 포기함으로써 우리 어민의 생존권을 치명적으로 위협하고 국가어업을 일본 어업자본에 예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넷째로,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에 관한 제규정은 종래의 식민지주의적 처우를 청산시키기는커녕, 철병 징용 등 일본 군국주의의 강제 노력동원 등에 의해 야기된 제결과를 피해자(재일교포)에게 전가시킴으로써 비인도적 배신을 자행했다.
다섯째, 강탈로 불법 반출해간 문화재의 반환에 있어서 정부는 과장적 나열에 그친 무실한 품목만을 ‘인도’받음으로써 마땅히 요구해야 할 귀중한 품목의 반환을 자진 포기한 결과가 되었다.

정부는 이 모든 희생을 무릅쓰는 이유가 일본과 제휴하여 반공세력을 강화하는 데 있다고 주장, 미국 역시 이를 뒷받침하여 왔다. 그러나 일본 측은 여전히 한일국교정상화가 반공을 위한 조치는 결코 아니라고 밝히고 있으니, 굴욕외교의 명분은 어디서 찾아볼 수가 있겠는가.
국민의 압도적 다수가 맹렬히 반대하는 한일협정의 비준을 정부가 그대로 강행하는 경우에는 한국을 위해서는 물론, 올바른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해서나, 전통적인 한미 간의 우호관계를 위해서나 불행한 결과만을 가져오리라고 우리는 단정한다.
이상의 모든 점을 고려한 끝에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첫째, 국회는 여야를 막론하고 당파적 이해를 초월하여 이 치욕적인 불평등협정을 결연히 거부하라.
둘째, 정부는 그동안의 애국학생들에 대한 비인도적 만행을 사과하고 구속학생들을 즉시 석방하라.
1965년 7월 12일
재경대학교수단
(서명자)
강동진 강신항 강윤호 고범서 고성환 고영복 구연철 권오형 권우혁 권이묵 길현모 김건 김경광 김경수 김경탁 김궤현 김규삼 김규태 김기범 김기호 김동길 김동식 김동욱 김명호 김병익 김상겸 김상협 김석목 김성근 김성두 김성식 김성준 김성태 김순응 김순회 김영덕 김영돈 김영일 김영호 김영훈 김완규 김용훈 김우탁 김유봉 김윤경 김윤석 김응렬 김재훈 김재희 김정준 김정중 김준민 김준엽 김진만 김진웅 김찬국 김채원 김치원 김태길 김황암 남상렬 노봉환 노정현 마경일 문상희 문창수 문효근 민경배 민광식 민병하 박경용 박광선 박기혁 박덕배 박동준 박두진 박배수 박병채 박성의 박수연 박승하 박영식 박영준 박인수 박종화 박창환 배용덕 백종기 서광순 서남동 서남원 서석순 성낙훈 성래운 성백선 소진탁 손승희 손현기 송갑호 송두용 송민호 송옥형 송정석 송종복 송태영 신순호 신일철 신태선 심치선 안병욱 양재현 양호민 엄영식 오기형 오병헌 오영근 오원철 오일홍 오형석 왕종순 우성구 유령 유준 유경노 유인호 유학노 윤덕진 윤원호 이구 이가형 이갑섭 이경일 이광린 이군철 이규항 이규호 이규화 이극찬 이근식 이기백 이기열 이기영 이기을 이길상 이남덕 이능욱 이도진 이두현 이만갑 이병섭 이병현 이보연 이봉국 이봉호 이상용 이상일 이상종 이상호 이석윤 이석희 이세순 이수호 이영식 이영해 이영헌 이영협 이용두 이용희 이우성 이웅식 이원식 이응백 이재철 이정우 이정인 이제민 이종무 이종성 이종영 이종하(李宗夏) 이종하(李鍾河)이주형 이태극 이하윤 이한용 이항녕 이해창 이혜숙 이효근 이훈섭 임근수 임상순 임원택 장기원 장덕순 장동환 장심현 장왕록 장익봉 전경인 전찬화 전형국 정명환 정범석 정병두 정병희 정석해 정연태 정영석 정은용 정인희 정증진 정한숙 조동필 조성식 조윤제 조지훈 조진하 주낙원 주요섭 지동식 지헌택 진세인 진원중 차기벽 최금덕 최대경 최동희 최명관 최수정 최옥환 최이순 최재희 최정훈 최종식 최주호 최진원 최현배 최호진 최흥재 탁희준 한기춘 한동섭 한배호 한봉세 한영기 한준석 한태동 함병춘 함홍근 홍사석 홍순각 홍순국 홍윤명 홍이섭 황산덕 황순원(가나다순)

(당일 서명자)
임갑 송선애 전응렬 정도영 이희봉 박노춘 김봉걸 김기웅 강빈국 이문원 박유봉 김영철 전경연 문덕수 오화섭 홍순민 이갑규 손재준 이승렬 김병철 윤명로 조규갑 박시인 김순곤 김정년 이완하 임중기 이병도 방곤 이문영 박기반 김철준 한창규 이명구 주선애 서정범 박상규 이용환 신연철 유승국 문익환 김봉식 김인명 이성삼 임진섭 한동세 김종현 정도영 유정동 차수권 유승조 오석규 남흥우 김성원 이인모 윤세원 심영섭 박준규 김영달 이창배 권혁소 이광신 손제석 송한진 허웅 이규갑 이병조 이종찬 이병찬 박희범 홍성유 나사행 이윤중 백환규 정경석 김삼수 윤세창 한상범 조규동 이가형 문동한 이우정 진세인 박성우 이정식 홍사모 황극덕 정도열 이종은 안영휘 이남표 박봉랑 윤연 조동규 차경권 안승봉 국정효 장기욱 임창한 전광용 홍빈국(무순)『동아일보』 1965.7.12 석4면, 『경향신문』 1965.7.12 석7면, 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503~5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