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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 4.25교수단시위에서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 발표까지

'피의 화요일' 4월 19일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이기붕을 사퇴시키고 국무위원 일부를 경질시키는 것 등으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이는 이승만 체제를 그대로 이어가겠다는 것이었다. 4월 25일 교수들이 시위에 나서자 정국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고등학생들의 시위에서 시작된  4.19혁명은 4.25교수단시위 이전에는 지식인이나 교수 사회는 별 반응이 없었다. 학생들이 주도했고 시민 중에는 실업자나 구두닦이 등 기층민중들이 다수 참여했다.

서울대 이희승, 연세대 정석해 등의 교수들이 비밀리에 모여 학생들의 피에 행동으로 답할 것을 결의했다. 각 대학 258명의 교수들은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랜카드를 앞세우고 국회의사당까지 가두시위를 벌이고 시국선언문을 낭독했다. 교수단 시위에는 학생들도 스승의 행렬에 뒤따랐다. 거리에 나서자 수많은 학생, 시민이 시위행렬에 동참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위대열이 불어나는 만큼 기세도 올랐다. 시위대가 이기붕의 집으로 쳐들어가려 하자 집안으로부터 실탄 사격이 일어나 부상자가 발생했다. 실탄을 쏘며 시위대을 위협하던 이기붕은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 후 그의 가족들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거의 대상이었던 그의 집은 현재 < 4.19혁명 기념도서관>으로 변모해 4.19 정신과 이념을 실천하고 알리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또 다른 시위대열은 자유당 정권하에서 정치 깡패로 악명이 높았던 임화수와 이정재의 집을 습격해 값비싼 가구와 집기 등을 끌어내 불을 질렀다.  동대문 근처와 종로 일대 등 서울 시내 곳곳에서 밤늦은 시각까지 시위가 계속되었다. 학생들은 26일 새벽 2시까지 광화문 네거리에서 연좌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26일, 다시 시위가 시작되었다. 전국에서 10만여 명이 이승만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른 아침부터 세종로, 종로, 을지로 등 시내 곳곳에 모인 시위군중들은 "선거 다시 하라",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고 외치며 국회의사당과 광화문 네거리로 모여들었다. 서울에서는 차량 통행금지가 선포되었다.

군중의 수가 점점 증가하면서 일부가 중앙청 쪽으로 올라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위대가 점점 불어났고 경무대로 향했다. 계엄군이 최루탄과 수백발의 공포탄을 발사했으나 시위대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시위가 한창 무르익어 점점 전 시가로 번져가고 있을 무렵 오전 9시 45분, 파고다 공원 안에 몰려든 수많은 시위대는 구호를 외치다가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쓰러뜨리기에 이르렀다. 파고다 공원 파출소에 경찰은 한 사람도 없었으나, 군인들은 이를 보고도 말리지 않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흥분한 군중은 와이어를 맨 동상을 끌고 종로2가를 거쳐 세종로를 지나 서대문 이기붕의 집까지 행진했다. 군중들이 동상을 끌고 다니다 내팽개쳐 두자, 동상은 용산경찰서 뒷마당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후 오랫동안 명륜동의 한 민가 뒷마당에 방치되기도 했다.

26일 11시경,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이 발표되고, 27일에는 대통령 사임서가 국회에 제출되었다. 5월 29일에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망명길에 오름으로써 제1공화국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