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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문으로 본 4.19혁명

1. 고려대 4.18 선언문 친필본

친애하는 고대학생 제군! 한 마디로 대학은 반항과 자유의 표상이다. 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독재의 최후적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기에 역사의 생생한 증언자적 사명을 띤 우리들 청년학도는 이 이상 역류하는 피의 분노를 억제할 수 없다. 만고 이와 같은 극단의 악덕과 패륜을 포용하고 있는 이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리라.

말할 나위도 없이 학생이 상아탑에 안주치 못하고 대사회투쟁에 참여해야만 하는 오늘의 20대는 확실히 불행한 세대이다. 그러나 동족의 손으로 동족의 피를 뽑고 있는 이 악랄한 현실을 방관하랴.

존경하는 고대학생동지 제군! 우리 고대는 과거 일제하에서는 항일투쟁의 총본산이었으면 행방 후에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사수하기 위하여 멸공전선의 전위적 대열에 섰으나 오늘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한 반항의 봉화를 높이 들어야겠다.

고대학생동지제군! 우리는 청년학도만이 진정한 민주역사창조의 역군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여 총궐기하자.


단기4293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일동

1960년 4월 16일, 이날은 고려대생들의 신입생환영회가 계획된 날이었다. 마산 2차시위에 고무된 고대생들은  이날 시위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낌새를 챈 형사들이 학교로 들이닥치는 바람에 신입생환영회와 시위계획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18일 아침 이들은 학교 안으로 몰래 숨어들어가 점심시간 사이렌이 울리면 학생들을 교정에 있는 인촌 동상 앞으로 모이도록 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동태를 알아챈 학교 측은 사이렌을 울리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학생들은“인촌 동상 앞으로”라고 외쳤다.  순식간에 3,000여 명이 교정에 모여들었다.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고대신보] 박찬세 편집국장이 기초한 선언문을 박수로 채택했다. 오후 1시 20분, 고대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민주 역적 몰아내자”, “자유 정의 진리 드높이자”는 플래카드를 높이 쳐들고 교문을 나와 태평로에 있는 국회의사당을 향해 달렸다. 평화적으로 진행된 시위는 저녁 6시 40분까지 계속되었다. 

학생들은 경찰 차량의 선도에 따라 귀교길에 올랐다. 행렬이 을지로 4가에 다다르자 선두의 경찰 차량은 청계천 4가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오후 7시 20분경 행렬이 청계천 4가 천일백화점 앞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도로 옆 골목 안에서 괴한들이 뛰어나와 행렬을 습격하였다. 100여 명의 괴한들은 쇠망치, 몽둥이, 벽돌 등의 흉기로 닥치는 대로 학생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선두에 있던 학생 수십 명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10분도 채 안된 사이에 학생 200여 명이 쓰러졌다. 중상자 20여 명은 병원으로 옮겨졌고 나머지 학생들은  8시 40분경 해산하였다. 괴한들은 반공청년단 종로구단 동대문 특별단부 소속 조직폭력배들이었다. 

2. 서울대 문리대 4.19선언문 필사본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선언문

상아의 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질풍과 같은 역사의 조류에 자신을 참여시킴으로써 이성과 진리 그리고 자유의 대학정신을 현실의 참담한 박토(薄土)에 뿌리려 하는 바이다. 오늘 우리는 자신들의 지성과 양심의 엄숙한 명령으로 하여 사악과 잔학의 현상을 규탄 광정(匡正)하려는 주체적 판단과 사명감의 발로임을 떳떳이 선명(宣明)하는 바이다. 

우리의 지성은 암담한 이 거리의 현상이 민주와 자유를 위장한 전체주의의 표독한 전횡에 기인한 것임을 단정한다.

무릇 모든 민주주의의 정치사는 자유의 투쟁사다. 그것은 또한 여하한 형태의 전제(專制)로 민중 앞에 군림하는 ‘종이로 만든 호랑이’ 같이 헤설픈 것임을 교시(敎示)한다. 

한국의 일천(日淺)한 대학사가 적색 전제(赤色專制)에의 과감한 투쟁에 거획(巨劃)을 장(掌)하고 있는데 크나큰 자부를 느끼는 것과 똑같은 논리의 연역에서, 민주주의를 위장한 백색 전제에의 항의를 가장 높은 영광으로 우리는 자부한다.

근대적 민주주의의 기간(基幹)은 자유다.

우리에게서 자유는 상실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니 송두리째 박탈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성의 혜안으로 직시한다. 이제 막 자유의 전장엔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정당히 가져야 할 권리를 탈환하기 위한 자유의 투쟁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다. 자유의 전역은 바야흐로 풍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민중의 공복이며 중립적 권력체인 관료와 경찰은 민주를 위장한 가부장적 전제권력의 하수인으로 발 벗었다. 민주주의 이념의 최저의 공리인 선거권마저 권력의 마수 앞에 농단되었다.

언론 · 출판 · 집회 · 결사 및 사상의 자유의 불빛은 무식한 전제 권력의 악랄한 발악으로 하여 깜박이던 빛조차 사라졌다. 긴 칠흑 같은 밤의 계속이다.

나이 어린 학생 김주열의 참시(慘屍)를 보라! 그것은 가식 없는 전제주의 전횡의 발가벗은 나상(裸像) 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저들을 보라! 비굴하게도 위하(威嚇)와 폭력으로써 우리들을 대하려 한다. 우리는 백번을 양보하고라도 인간적으로 부르짖어야 할 학구(學究)의 양심을 강렬히 느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打手)의 일익(一翼)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퇴 아래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의 사수파(死守派)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 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대열은 이성과 양심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대열이다. 모든 법은 우리를 보장한다.


단기4293년 4월 19일 서울대학교문리과대학 전학생일동

4월 19일 정오, 학생들은 태평로 국회의사당을 거쳐 지금은 광화문이 들어서 있는 중앙청 앞 광장까지 달려온 후 연좌시위를 하고 있었다. 김치호가 우리 앞에 나섰다. 오전에 이미 경찰에 잡혀 심하게 구타를 당했노라고, 그러나 굽힘없이 불의와 싸워나가겠노라고 결연히 선언했다. 얼마 후 우리는 경무대 쪽으로 몰려갔다. 우리 앞에 이미 많은 학생들이 경무대 입구 가까이 에서 전투복을 입은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곧 이어 격렬한 총성이 울려 퍼졌고, 많은 학생들이 쓰러졌다. 김치호도 그 중의 하나였다.... (서울대 장회익 교수 글 중에서)

김치호는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이라 불리는 이날, 불의한 정권 타도를 위해 시위에 나가 죽음을 맞이한 서울대생 6명 중 한 명이었다. 경무대에서 경찰의 실탄 발포로 시민, 학생 수십 명이 사망, 부상당했고 전국적으로 124명이 사망, 558명이 부상당했다(정부 발표). 이에 4월 25일 전국 교수단이 14개항 시국선언문을 채택한 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랜카드를 들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했다. 이에 힘을 얻은 시민과 학생 등은 철야 시위를 벌였고 드디어 4월 26일 11시경, 대통령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