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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비장한 출정식 이야기 - 독립군 무명용사의 묘에서
수유리 국립4.19민주묘지 뒷산에 순국선열묘역이 있다. 여기에는 이준 열사를 비롯해 이시영, 김창숙, 김병로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의 묘가 백련사 올라가는 길 양쪽으로 여기저기 조성되어 있다. 백련사 올라가는 입구 관리초소를 지나 다리를 건너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접어들어 300미터쯤 올라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안내푯말을 보고 오른쪽 길 이시영선생 묘 쪽으로 다시 100미터쯤 올라가면 이시영 선생 묘가 나오고 그 오른쪽에 조금 왜소해 보이는 묘가 하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독립군 무명용사묘이다. 1985년 보훈처에서 이 일대 묘역을 정비하면서 광복군합동묘소라고 이름짓고 1940년에서 1945년 사이에 만주일대에서 순국한 17위의 독립지사를 모셨는데, 원래 1967년 광복군동지회에서 처음 이 묘를 조성할 때는 이름없이 순국한 수많은 독립 무명용사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 조그만 묘에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이야기가 하나 있다.
1983년 9월 30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의 창립은 1980년 광주항쟁을 진압하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 대해 처음으로 저항의 횃불을 든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때 민청련 창립의 주역이었던 김근태를 비롯하여 장영달, 박계동 등 집행부원들이 창립대회를 앞두고, 이 무명용사묘에 와서 참배하고 결의를 다졌다. 당시 수유리에 살고 있던 사회부장 연성수가 아침운동으로 백련사 길을 오르면서 이 묘를 발견하고, 결의를 다지기 좋은 장소라 생각하여 창립 전날 제안한 것이었다. 당시 상황을 민청련사(미발표)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대회 하루 전 9월 29일 아침 김근태 의장을 비롯한 집행부원 6명은 수유리 국립4.19민주묘지 뒤편에 있는 독립군 무명용사묘 앞에 모였다. 맨몸으로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민청련의 출범을 앞두고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무명용사들 앞에서 출정 의지를 다지는 자리였다. 창립대회를 무사히 치르게 해달라는 기원을 담은 고천의식이기도 했다.
연성수가 사회를 봤다. 독립운동에 몸 받친 순국열사들에 대한 묵념을 하고, 김근태 의장이 먼저 술을 한잔 올리고 준비해간 제문을 읽었다. 천지신명과 무명 독립용사들의 영혼이 출범하는 민청련을 돌봐주시길 간절히 기원하는 제문이었다. 모두 함께 두 번 절하고, 김근태 의장부터 한사람씩 돌아가며 추모와 다짐의 말을 했다. 그리고 둘러앉아 제주(祭酒)를 돌려 마셨다. 조촐하지만 비장한 출정식이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직원들은 4.19혁명 56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 국립4.19민주묘지 뒤편 백련사 길 인근의 독립운동가 묘역 청소를 했다. 작업 후에 직원들은 근처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고 사무실로 돌아갔지만 사료관 이인수 부장과 나는 뒤에 남았다. 언젠가 한번 찾아보리라 마음 먹고 있던 독립군 무명용사묘지를 이번 기회에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연성수 형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 전화를 했더니 마침 근처에 있어서 동행을 하게 되었다. 형은 요즈음 ‘우리헌법읽기국민운동’에 푹 빠져 있는데 오늘도 손바닥 헌법책을 4,19묘역 앞에서 입장객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막걸리 한병과 술잔을 챙기고 연성수 형을 앞장세우고 무명용사묘를 찾아 올라갔다. 묘로 올라가는 길 양 옆으로 마지막 남은 진달래와 산벚꽃이 아직 군데군데 피어있고, 신록이 눈부시게 올라오고 있었다. 이시영 선생 묘를 눈 앞에 두고 왼쪽 옆으로 난 오솔길로 접어드니 바로 광복군합동묘소라는 안내표지판이 나왔다. 묘 바로 옆에 작은 약수터가 있어서 잠시 목을 축이고 우리는 무명용사묘로 올라갔다.
1983년 당시에는 달랑 비석만 하나 있고 둘레석도 없이 초라했던 묘가 1985년 정화작업을 거쳐 지금은 제법 번듯하게 단장이 되어 있었다. 100여평쯤 되어 보이는 묘역 오른쪽에 ‘광복군선열지묘(光復軍先烈之墓)’라는 비석이 서 있었다. 묘 뒤편에는 대한민국순국선열숭모회 등 10여개 민간단체들이 올 2월에 참배하고 걸어 놓은 플랭카드가 눈에 들어오는데 “후손 없는 광복선열! 참배하는 애국국민!”이라는 구호가 이채로왔다. 묘 둘레에 심어놓은 관목 위에는 어느 참배객이 꽂아놓고 간 것으로 보이는 하얀 조화들이 점점이 꽂혀 있었다.
준비해간 술을 한잔 따라 올리고 함께 두 번 절했다. 그리고 머나먼 이역 땅에서 민족의 해방을 위해 싸우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산화해간 그분들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1983년 전두환 독재정권의 철권통치에 맞서 민청련을 창립하면서 이곳을 찾아 각오를 다졌던 민청련 집행부원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한때 야당정치의 새 시대를 열 정치인으로 기대를 모았었던 김근태 의장의 곱상한 얼굴, 준수한 외모와 부드러운 음성의 운동권 신사 홍성엽 형의 모습이 새삼 그리움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