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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수에서 재야운동가로 - 민주회복국민회의와 문학평론가 김병걸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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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단에 ‘땅꼬마 삼총사’로 불리는 세 분의 어른이 있다. 신경림, 민영, 김규동 시인이 바로 그분들이다. 일미터 육십을 절대 넘지 않는 키에 다들 재주 많은 어른들이라 후배들이 애칭 삼아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이 분들은 모두 시인인데 소설가와 평론가를 끼워놓으면 소설가로는 “분지(糞地)”의 작가 남정현 선생이, 그리고 평론가로는 재야 운동가로 이름 높았던 김병걸 선생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남선생은 키는 그래도 그 중 좀 큰 편이지만 몸무게가 오십 킬로를 절대 넘지 않으니 그 축에 끼어도 섭섭하지 않을 터이고, 김병걸 선생은 딱 그 수준이다. 초등학생처럼 작은 체구에 안경을 쓰고, 눈처럼 하얗게 센 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넘긴 스타일은 김규동 선생이나 김병걸 선생이 똑 같아서 처음 보는 사람은 한동안 두 분을 구분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다 두 분 다 그렇게 맑고 선량한 눈빛을 할 수가 없고, 또한 말투조차 같은 함경도 출신이라 그런지 두런두런 하시는 폼이 비슷했다. 동갑인 나이에, 그러고 보니 돌아가신 해도 비슷했다.

이 ‘작은 거인’ 들이 우리나라 문단에 남긴 발자취와 숱한 일화는 내내 후배 문인들의 술자리의 화재가 되고 추억이 되었지만 그 분들 모두 어려운 시절,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와 ‘작가회의’의 중심에서 문학과 현실을 동시에 고민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신 점에서 지금까지 존경을 받고 있다. 그 중의 한 분이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문학평론가 김병걸 선생이다.

그러면 이 선량하고, 눈이 크고, 약간 혀가 짧은, 그래서 누구나 그 분과 이야기하는 동안 함께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전형적인 학자 스타일의 김병걸 선생이 그 무시무시한 유신 독재 권력과 마주서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1974년은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으로 유신헌법의 독소조항 중의 독소조항인 제 53조 대통령 긴급조치권을 발동하여, 1월에는 장준하, 백기완 선생 등을 1호 위반으로 구속하고, 4월에는 그 유명한 ‘민청학련사건’ 이란 걸 만들어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학생들을 사형에서 무기 징역까지, 그리고 그 배후라는 명목으로 ‘인혁당’ 이란 걸 만들어 진보적인 교수들을 포함해 8명을 실제로 사형시켜버렸다. (사형 집행은 다음해 75년 4월) 

세상은 얼어붙어버렸다.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했고, 귀가 있어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람이 입을 다물면 광야의 돌멩이가 일어서 외친다고 했던가.

그해도 다 저물어가는 11월 27일 재야인사 70여명이 기독교 회관에 모였다. 백발이 성성한 함석헌 선생을 필두로 이병린 변호사, 천관우, 이태영, 계훈제, 서남동, 이우정 등 학계와 종교계, 문화예술계 인사들이었다. 그 속에 문인을 대표해 김규동 선생과 백낙청 선생, 그리고 김병걸 선생이 들어 있었다. ‘민주회복국민회의’가 창설된 것이다.

‘민주회복국민회의’는 얼음장 같았던 박정희 유신독재의 한 가운데서 온갖 협박과 공작을 뚫고 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들의 말없는 지지 속에 만들어진 유일무이한 재야단체였다. 당시 경기공업전문학교 교수로 있었던 김병걸 선생은 훗날, 소심한 선생에 지나지 않았던 자기가 그런 ‘무시무시한 단체’에 가입하게 된 것은 자기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재야인사들이란 그때나 지금이나 대체로 직업이 없거나 종교 단체에 소속되어 있어, 상황이 어려워진다 해도 생계문제가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러나 김병걸 선생은 달랐다.

당장 그 달 30일자로 10년간 몸담고 있던 국립 경기공업전문대에서 해고 통지가 날아왔다. 소명이고 뭐고 필요가 없었다. 김병걸 선생뿐만이 아니었다. 서울대 영문과 교수로 있던 백낙청 선생에게는 파면조치가, 연세대 등 사립대 교수로 있던 서남동, 이우정, 안병무, 문동환 선생에게는 경고조치가 내려졌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가장 위험에 빠진 사람은 김병걸 선생 당신이었다.

“나이 오십에 처자식을 거느리고 있는 몸이 하루 아침에 밥줄이 뚝 잘렸으니 어찌 걱정이 없을 수 있겠어요? 그러면서도 그 당시 나라와 민주화를 위하다가 사형을 당하거나 무기 혹은 몇 십 년의 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 판에 일터에서 쫒겨난 것이야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그렇게 자위를 하곤 했어요.”

그리고 막상 쫒겨나고 보니 좋은 일도 있었다고 했다.

“솔직히 말해 교단에 있을 땐 입조심도 해야 했고, 글을 쓰다가도 내 그림자에 놀라기도 했어요. 박정희 때가 어떤 땝니까? 그러나 해직 후에는 꺼릴 것도 없었고, 두려울 것도 없었어요. 양심에 어긋나지 않은 일, 사리의 정당한 이치를 앞에 놓고, 눈치를 살피거나 몸을 움츠리거나 옆길로 빠져나갈 생각이 추호도 들지 않았어요.”

그해 12월 25일. 민주회복국민회의는 열 명의 중앙운영위원을 뽑았다. 지금은 대부분 작고하셨지만 당시는 아직 젊었던 법정 스님, 계훈제 선생, 함세웅 신부, 한승헌 변호사 등과 김병걸 선생이 뽑혔다. 본인 말로는 자기는 그런 일에 통 성향이 맞지 않아 안 하겠다고 완강히 버텼지만 주변에서 떠맡기다시피 하여 맡게 되었다고 했다.

박정희 정권 때는 그의 친위대이자 비밀경찰인 ‘중앙정보부’라는 것이 있었다. 지금 안기부의 전신인 중앙정보부, 일명 ‘중정’ 혹은 ‘기관’으로 불리던 그곳은 ‘하늘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는 말이 들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과 멀쩡한 사람도 간첩으로 둔갑시키는 고문으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 책임자는 박정희의 심복 중의 심복인 이후락이었다. 

그 시절, 반정부 대열에 섰던 사람 치고 그 중정에 끌려가 곤욕을 치러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민주회복국민회의 중앙위원인 김병걸 선생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는 동안 협박도 하고 회유도 하고 잠도 재우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내가 국민회의에 참가하게 된 경위를 집요하게 추궁하는 것이었어요. 나는 어느 누구의 사주를 받은 적도 없고 순전히 나의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고 강력하게 우겼죠. 사실 내가 국민회의에 참가하게 된 것은 친구인 김규동 시인 때문이긴 했지만요. 밤새 교대로 문초를 해도 견디며 묵비권을 행사했어요. 그러자 나중에는 국민회의에서 손을 떼면 학교에 다시 복직시켜주겠다고 회유를 하는 것이었어요.”

이런 경우 고문보다 힘든 것은 회유다. 차라리 때리면 맞는 것이 속이 더 편했을지 모른다. 

“내 마음은 자꾸 산란해지고 동요했어요. 파도에 밀리는 일엽편주처럼 말이죠. 교직으로 복귀시켜주겠다는 회유, 가족까지 고생시킬 필요가 뭐냐는 설유에 나는 마음의 평형을 잡을 수가 없었어요. 정치인도 아니고 앞으로 정치인이 되겠다는 생각도 털끝만큼 없는 처지에 이처럼 불려 다니며 문초를 당할 필요가 뭐냐. 뭐 잘 났다고 고집을 부려야 하나. 정말 처자식까지 삶에 지치게 할 이유가 있나. 무서운 고민에 허우적거렸어요. 아, 잠도 못자고 이 고통을 당하다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 푹 쉬고 싶다는 정신적 갈증까지 더해졌죠.” 

당시 국민회의에 참가 했다가 중정에 끌려가 고통을 당한 사람은 김병걸 선생뿐만이 아니었다. 대표위원을 맡고 있던 이병린 변호사는 정치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사유에 의해 구속되었고, 민족의 대지성이랄 수 있는 함석헌 선생과 늘 고무신에 허름한 인민복 차림의 계훈제 선생 역시 끌려가 고초를 당하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국민회의는 그저 나이 드신 몇 분 선생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유신이라는, 또 영구집권이라는 어마어마한 꿈을 지니고 있던 박정희 정권에게는 이런 작은 불씨조차 용납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 역시 연초에 연달아 긴급조치를 날리고, 그 결정판으로 4월에 민청학련사건까지 터뜨린 이후였다. 마치 한바탕 거대한 폭풍이 지나간 후의 적막 같은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고나 할까. 국내외의 분위기도 결코 박정권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그런 판에 또다시 재야의 존경 받는 명망가들과 한판 일전을 벌이기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미행과 감시. 

그게 그들이 할 수 있는 남은 일이었다.

이렇게 민주회복국민회의 때문에 대학교수에서 길거리의 가난한 운동가로 변신한 김병걸 선생의 그 후 생활이 어떠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민주화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재를 굽이굽이 넘는 행려자의 고달픈 길이었다. 때로는 폭풍우 속에서 물살에 휩쓸리기도 하고, 때로는 눈발 속에서 갈 길이 막히기도 했다. 엄동설한에 동사의 위기에 부딪히기도 하고, 화창한 봄날 가시덤불에 찔려 상처가 나기도 했다. 냉혹한 정치현실의 암벽에 부딪혀 좌절하거나 절망하거나 자기 회의의 깊은 수렁에 빠진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꾸짖고 살갗도 꼬집으면서 자기 각성을 촉구했다. 칠흑 같은 어둠이 파도처럼 밀려오면 역사적 인물들의 고난에 찬 모습을 눈앞에 떠올리며 기진하고 쇠잔한 나 자신을 고무했다.”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할 무렵인 1979년 11월 24일. 독재자 박정희는 죽었지만 그 졸개들이 여전히 어둡고 시퍼런 권력을 장악하던 때. 이른바 ‘YWCA 위장결혼식사건’ 이란 게 터졌다. 서울의 봄을 가로막으며 안으로 은밀히 진행되고 있는 신군부의 등장을 저지하기 위한 대회였다. 여기서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잡힌 김병걸 선생은 곧장 보안사의 악명 높은 지하감옥 ‘서빙고’로 끌려갔고, 여기서 이십여 일이 넘게 보안사 대령 이학봉이 주도하는 끔찍한 고문을 당한 다음 구속되었다. 이때 당한 고문 후유증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 후에도 군복 입은 사람만 봐도 깜짝깜짝 놀라셨다고 한다. 

이 겁 많고, 눈이 컸던 함경도 산골 출신의 너무나 고지식한 학자요, 자상한 교수였던 그를 폭풍우 치는 한국 현대사의 중심으로 불러내었던 것은 무엇일까. 친구요 같은 ‘땅꼬마 어른’ 중의 하나인 소설가 남정현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무슨 죄가 있어 그 양반이 그렇게 많은 고초를 당해야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억울해요. 내 짐작엔 그에게 죄가 있다면 나잇살 먹어도 때가 묻지 않은 그 천진함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하여간 그 못된 천진함은 알아줘야지요. 수사기관에 끌려가 몇 번 죽다가 살아난 이후 후유증으로 허리를 잘 쓰지 못했는데, 그러고도 그 양반의 전용렌즈인 맑은 눈동자, 그 청정한 눈빛을 하나도 잃지 않은 걸 보면 놀라워요. 감탄스럽고…….”

글 김영현(소설가)
1984년 창작과비평사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로 등단,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해남 가는 길>, <내 마음의 망명정부>, 장편 <풋사랑>, 시집 <겨울 바다>, <남해 엽서>등이 있다. 제23회 한국창작문학상 수상, 실천문학사 편집장 역임, 한신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하다가 현재는 양평에서 창작과 공부에만 열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