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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실천문인협의회 - 표현의 자유를 온 몸으로 외친 문인들

유신체제가 들어선 뒤 한국 사회가 질곡으로 치닫던 1974년 11월 15일 오후 6시, 청진동의 귀향다방에 한 무리의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고은, 신경림, 염무웅, 백낙청, 박태순, 이문구, 조태일, 황석영 등이었다. 이들은 간단한 회의 형식을 통해 개별적인 발언을 시작했다.

“우리는 지난 1월 7일에 ‘문인 61인 개헌지지선언’을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문학인들이 불의한 시대에 맞서 결연한 입장을 보여준 양심의 발로였습니다.”

“맞습니다. 여기 모이신 동지 여러분은 유신체제와 싸우는 양심적인 문인들의 협의체가 필요하다는 데 뜻을 같이 하셨습니다. 작금의 동아, 조선 사태는 언론을 압살하는 박 정권의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입니다.”

“유신정권은 1월 25일 이른바 ‘문인간첩단사건’을 조작해서 이호철, 임헌영, 김우종, 장백일 등 우리 문인들을 구속했습니다.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어요. 표현의 자유가 실종되고 만 것이지요.”

“지난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 자유언론 실천운동은 모든 언론계의 화두가 되어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우리 문인들도 이 광범위한 실천운동에 동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귀향다방은 때 아닌 문인들의 시국 성토장이 되었다. 문인들이 이처럼 모이게 된 것은 지난 1월 중순에 터진 ‘문인간첩단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 교포사회에는 우리말로 된 《한양》지가 발간되고 있었다. 발행인이 민단계(民團系) 쪽 인사였지만 잡지 내용은 진보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 이 잡지는 꽤 많은 지면을 시나 소설, 에세이 등 문학 분야로 채우고 있었다. 일본을 왕래하는 문인들은 이 잡지사의 필자로서 방문하는 일이 가끔 있었고, 그곳 편집인 혹은 발행인과 만나 차를 나누며 담소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박 정권은 이 일을 빌미 삼아 모종의 흉계를 꾸몄다. 1974년 1월 15일, 중앙정보부는 ‘문인간첩단사건’을 발표해 이호철, 임헌영, 김우종, 장백일 등 문인들을 줄줄이 체포해 구속 수감한 것이다. 그동안 개헌운동 등 유신반대투쟁에 동참한 문인들에 대한 보복성 탄압이었다. 일주일 전인 1월 8일 선포된 긴급조치 1호의 막강한 권한에 의한 직격탄이었다.

긴급조치 1호의 내용은 “헌법의 부정 · 반대 · 왜곡 · 비방행위 금지, 헌법의 개정 · 폐지 발의 및 청원행위 금지, 유언비어의 날조 · 유포 금지, 위 금지행위의 선동 · 선전 및 방송 · 보도 · 출판 등 전파행위 금지”가 핵심이었다. 유신 당국은 “이 조치의 위반자 및 비방자는 영장 없이 체포 · 구속 · 압수 · 수색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의 징역과 1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긴급조치 선포는 국민들을 노예적 상태로 몰아가는 잔인한 채찍질이었다.

김지하는 시 〈1974년 1월〉에서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라며 긴급조치의 부당성과 유신체제의 폭압성을 고발했다. 김 시인은 그해 4월 25일 체포, 수감되었다.

문인들은 곧 김지하 석방운동을 벌여나갔다. 문인들이 한 목소리로 김지하 구명운동을 벌이는 가운데 국내외의 호응이 커져 갔다. 이에 굴복한 박 정권은 김지하를 슬그머니 석방시켰다. 이 일을 통해 문인들은 단합된 힘의 효용성과 필요성을 동시에 느꼈다.

문인간첩단사건 발표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호철, 임헌영에게는 형법상 간첩죄가 적용되었고 정을병, 김우종, 장백일 등 세 사람에게는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위반죄가 적용되었다. 그러나 기소 단계에서 간첩죄 항목이 모두 제외될 만큼 무리한 짜 맞추기였다. 그해 10월 31일 항소심 공판에서 정을병에게 무죄가 선고됐고, 나머지는 집행유예로 모두 풀려났다. 용두사미에 그친 이 사건은 유신정권에게 큰 오점을 남겼다.

이 사건을 접한 문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사건은 표현의 자유를 압살하는 유신정권의 폭거였다. 이 사건을 묵과할 경우 표현의 자유를 영영 속박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졌다. 문인들은 대체로 자유분방한 영혼의 소유자들이었지만, 이 같은 부당한 일을 좌시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1974년 11월 16일, 문인들은 전날에 이어 두 번째 회의를 이어나갔다. 고은, 이문구, 이호철, 최민, 이성부, 박태순, 백낙청, 염무웅, 신경림, 한남철, 조태일, 황석영 등은 유신정권에 대항하는 방안을 적극 모색하기로 결의했다.

“우리 문인들도 단합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인 단체를 만들어 유신체제와 싸워야 합니다. 표현의 자유를 압살하는 정권과의 싸움은 이 시대가 문인들에게 요구하는 사명입니다.”

“문인 단체 결성을 효과적으로 알리는 차원에서 문인 선언문을 발표할 것을 제안합니다.”

“좋은 의견입니다. 지난번 ‘문인 61인 개헌지지선언’은 다방에서 발표했지만, 이번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광화문에서 발표할 것을 추가로 제안합니다.”

이 제안은 모두의 동의를 받아 채택되었다. 문학인 선언 발표 날짜는 18일 아침으로 정해졌다. 발표를 누가 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나오자 시인 고은이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이번 긴급조치가 살벌하니, 주동자는 한 십년쯤 감옥에서 썩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땡초인 나 일초(一超)가 가장 적임자라 생각합니다.”

이로써, 시인 고은이 주동자 겸 문학인 선언문 낭독자로 결정되었다.

1974년 11월 17일, 문인들은 문학평론가 염무웅이 작성한 문학인 선언문 초안에 대한 논의를 마친 뒤 문인 단체 이름에 대해 최종 논의했다.

“이제 발표 주체 문제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의제로 떠올랐습니다. 발표 주체는 곧 우리 문인들의 정신과 지향할 점을 담는 우리의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문인 단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뜻이 담겨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문인 단체의 이름이 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이에 대해 작가 박태순이 시안을 제시했다.

“문학표현자유 실천운동위원회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문학자유 실천운동위원회로 고쳐 봅시다.”

박태순이 제시한 시안에 대해 시인 고은이 의견을 말했다. 그러자 백낙청이 문장 배열을 고쳐 말했다.

“자유문학 실천운동위원회라고 하면 어떨까요?”

“자유문학 실천운동위원회는 과거의 자유문학자협회를 떠올리게 합니다. 저는 자유실천 문학운동위원회라는 안을 제안합니다.”

고은이 우려가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 윤곽이 가다듬어가는 순간이었다. 그때, 박태순이 말했다.

“제 생각에는 위원회보다는 협의회가 더 낫지 않을까 싶은데요.” 박태순의 발언 뒤에 시인 고은이 ‘자유실천 문학운동협의회’라고 바꾸어 썼다. 이 모습을 지켜보며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던 백낙청이 노트에 ‘자유실천 문학인운동협의회’라는 글자를 썼다. 그러더니 그 옆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라고 고쳐 썼다. ‘문학인’을 ‘문인’으로, ‘운동협의회’를 그냥 ‘협의회’로 바꾸어 쓰고 보니 그럴듯했다. 백낙청이 노트를 높이 들어 올리니, 모두가 그 명칭에 만족감을 나타냈다. 비로소,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라는 명칭이 만장일치로 통과되는 순간이었다. 자실의 대표간사에는 스스로 고난을 자처한 시인 고은이 뽑혔고, 간사에는 신경림, 염무웅, 박태순, 황석영, 조해일이 뽑혔다.

선언문에 서명으로 동참할 문인들을 찾는 일은 의외로 쉬웠다. 문인들 대부분이 자신도 이 선언문에 참여하겠다고 자청했던 것이다. 서명자 수가 딱 100명이 되었을 때 박태순이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100명도 좋지만 101명이면 더 좋겠는데…….”

그때 전화로 서명에 가담한 사람이 작가 이문구였다. 이문구의 동참으로 선언문의 이름은 〈문학인 101인 선언〉이 되었다. 이 선언문을 시인 양성우가 밤새 등사원지에 철필로 글씨를 쓰고 등사기를 긁어 인쇄했다.

1974년 11월 18일 오전 9시 50분,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으로 고은, 이호철, 조태일, 양성우, 조해일, 조선작, 송영, 염무웅, 최민, 황석영, 한남철, 백낙청, 이시영, 송기원, 윤흥길, 이문구, 박태순, 김연균, 백도기, 임정남, 김국태, 석지현 등 30여 명의 문인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 모습을 20여 명의 내외신 기자들이 취재하는 가운데 자실의 대표간사인 고은 시인이 〈문학인 101인 선언〉을 낭독했다.

“오늘날 우리 현실은 민족사적으로 일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사회 도처에서 불신과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정직하고 근면한 사람은 살기 어렵고 거짓과 아첨에 능한 사람은 살기 편하게 되어 있으며, 왜곡된 근대화정책의 무리한 강행으로 인하여 권력과 금력에서 소외된 대다수 민중들은 기초적인 생존마저 안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러한 모순과 부조리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몇몇 정치가의 독단적인 결정에 맡겨질 일이 아니라 전 국민적인 지혜와 용기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라 믿고, 이에 우리 뜻있는 문학인 일동은 우리의 순수한 문학적 양심과 떳떳한 인간적 이성에 입각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결의 · 선언하는 바이며, 이러한 우리의 주장이 실현되는 것만이 국민총화와 민족안보에 이르는 길이라고 선언하는 바이다.”

선언문은 “시인 김지하 등 긴급조치 구속인사 즉각 석방”, “언론 · 출판 · 집회 · 결사 및 신앙 · 사상의 자유 등 기본권 보장”, “자유민주주의 정신과 절차에 따른 새 헌법 마련” 등 다섯 개 항의 결의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근처에 있던 수십 명의 경찰이 고은에게 일시에 달려들어 선언문을 빼앗았다. 선언문 낭독이 중단되자 황석영이 재빨리 선언문의 후반부를 낭독했다.

이때, “우리는 중단하지 않는다-자유실천문인협의회”, “시인 석방하라-자유실천문인협의회”라고 쓴 플래카드를 펼쳐든 채 송기원이 구호를 선창했다.

“유신헌법 철폐하라!”

모여 있던 30여 명의 문인들이 일제히 구호를 제창했다.

“유신헌법 철폐하라!”

작은 외침이었지만 큰 울림이 있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군중들이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다. 유신 정국에 처음 출현한 문인들의 반유신운동, 그 첫 걸음이었다. 돌연한 시위에 놀란 경찰들이 달려오자 문인들은 광화문 네거리 쪽으로 뛰어가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송기원은 패기만만한 신인답게 악착같이 플래카드를 지키려 애를 쓰며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이내 경찰 버스가 달려왔고,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전투경찰들이 문인들을 끌고 갔다. 고은, 이문구, 윤흥길, 조해일, 박태순, 송기원, 이시영 등 7명의 문인들이 닭장차에 실려 갔다. 황석영, 한남철 등 체포되지 않은 문인들은 광화문 네거리의 예총회관 내 한국문인협회 사무실에 들어가 연행된 회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다음날, 모든 신문이 이 사건을 일제히 보도하면서 문인들의 반유신투쟁이 전국에 알려졌다. 박 정권은 그 무렵 예정되었던 미국의 포드 대통령 방한 등의 일정을 코앞에 둔 상황이어서 다음날인 19일 오후 3시 전원 석방조치했다.

1974년 11월 18일 결성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이후 세계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선봉에 섰다. 1980년대 들어선 전두환 군사반란 세력에 의해 활동이 잠시 정지되었지만, 자실 문인들은 1984년 개편 총회를 거쳐 1987년 6월항쟁에 이르기까지 5공 정권과 맞서 싸웠다. 1987년 9월 17일 민족문학작가회의(민작)로 확대 개편한 뒤 1996년 6월 5일 자실과 민작의 정신을 계승하여 한국문학의 발전에 기여할 목적으로 사단법인으로 등록했으며, 2007년 12월 8일 한국작가회의로 거듭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엄혹했던 유신의 한복판,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문학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외친 유일한 문인 단체로서 겨울공화국의 폭압성을 들부수는 ‘광야에 외치는 소리’였다. 당시 문인들이 보여준 불굴의 정신은 탁하고 질식할 것만 같은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한 줄기 샘물, 청량한 바람이었다.

글 박선욱(시인, 평전작가)
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시 〈누이야〉외 3편이 실천문학 제1회 신인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그때 이후》《다시 불러보는 벗들》《세상의 출구》《회색빛 베어지다》 등의 시집과 《채광석 평전》《김대중 평전》《황병기 평전》《윤이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