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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끝났다. 언론사를 장악하라! - 1980년, 언론통폐합
1980년 여름.
청진동 뒷골목에 신문 방송사 기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흉흉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언론사별로 대량해고자 명단이 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누구누구가 그 명단에 올라가 있다는 둥, 어느 기자가 미운 털이 박혀 짤리게 되었다는 둥 하는 이야기였다.
“리스트를 만든 게 누구냐?”
소리를 죽인 K 기자가 말했다.
“응. 보안사 강전무라는 사람인데, 비상계엄 때부터 언론대책반 반장을 맡고 있던 자야.”
“아, 시청에 앉아 보도 검열을 하던 그 땅딸막한 친구? 계급이 준위라면서. 육군 준위.”
“쉿! 조용해. 계급이 중요한 건 아니야. 그 자가 지금 염라대왕이라구, 염라대왕. 우리 목이 그 자 손에 왔다 갔다 해.”
“끙.”
강전무. 보안사 준위.
그가 바로 1980년대 언론계의 염라대왕으로 통하는 이상재였다.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오른팔이 보안사 정보처장 육군대령 권정달이었다면 그 바로 아래 권정달의 오른팔이 바로 보안처장 보좌관 육군준위 이상재였다. 나중에 전두환이 민자당을 창당하면서 권정달이 사무총장이 되자 그는 사무차장이 되어 국회의원까지 지낸 코미디 같은 한국 정치사의 슬픈 얼굴이었다.
이야기는 모두 보안사령부 내부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시 정권에 조금이라도 비판적 기사를 쓴 모든 사람들은 불안하였다. 12.12 사태로 군부를 장악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실재적인 권력의 중심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떨치고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광주는 피바다가 되었고, 공포는 세상을 덮고 있었다. 누구라도 불량하게 보인다 싶으면 당장 어디론가 끌려가 곤죽이 되곤 하였다.
그 가운데 언론사 담당 핵심 인물이 바로 강전무, 보안사 준위 이상재였던 것이다.
한용원 당시 보안사 정보처 정보과장은 후일 이렇게 증언했다.
- 이상재가 대공처에서 정보처로 파견나온 경위를 알고 있나요.
“자세한 경위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당시 제가 각종 정보 수집과정에서 강전무라는 사람이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알아보니 강전무가 바로 이상재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권정달에게 ‘언제부터 이상재가 정보처 일을 하게 되었습니까’ 하고 물어보았더니 허삼수가 파견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러면 직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정보처장 보좌관이라고 하여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 그때 권정달로부터 이상재의 임무가 무엇인지는 듣지 못했나요.
“권정달의 보좌관으로 왔다는데 제가 자세한 임무를 물어볼 수 없었고, 권정달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 10.26 사건으로 계엄이 선포되면서 계엄사 내에 보도처를 설치하고, 보도검열단이 구성되어 서울시청에서 신문, 방송, 잡지, 통신, 대학신문 등 모든 언론매체에 대해 보도검열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별도로 정보처 정보2과 소속이 아닌 공작의 일인자라는 이상재 준위를 팀장으로 한 언론대책반을 따로 설치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당시 저에게 들어오는 정보보고를 보면 이상재가 언론인뿐 아니라 정치인 할 것 없이 각계 각층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으로 알려진 것으로 보아 단순한 언론검열 업무가 주업무가 아닌 것은 분명한 것 같았습니다”
비록 계급은 준위였지만 ‘강전무’ 앞에선 장군은 물론 이름깨나 있다는 정치인, 기업인도 꼼짝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언론사 기자들이 그를 염라대왕이라고 부르는 것도 과언이 아니었다. 1980년 봄. 계엄령이 확대되자 언론검열의 책임자로 시청에 앉아 신문사, 방송사, 잡지자 편집자들이 검열을 받으려고 들고 오는 원고를 검은 매직으로 찍찍 그어가며 통제했던 그 책임자도 바로 그 자였다.
1980년 여름이 되자, 그는 검열을 넘어 드디어 언론인 대학살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름하여 ‘언론인 자체 정화계획서’, 대량해고 명단도 바로 그 ‘정화계획서’ 속에 들어있던 것이었다. 자체 정화라는 합법적 탈을 쓰고 있었지만 폭력적인 강제해고였다.
그 계획서에 따라 1980년 7월 29일 신문협회와 방송협회는 임시총회를 열어 언론인 해직조치를 단행하였고, 8월 16일 933명이 데스크를 떠나 바람 부는 거리로 쫒겨났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들이 집권하고 있는 한 영구히 언론에 재갈을 물려둘 필요가 있었다. 바로 이 작업에 뛰어 든 또 하나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그가 5공 내내 ‘쓰리 허’ 중의 하나로 통하는 허문도였다. 여기서 ‘쓰리 허’란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출신의 허화평, 보안사령부 인사처장을 지낸 허삼수를 뜻한다. 5공 권력의 핵심들이다. 군인이 아니면서 보안사 군사정권의 핵심 자리에 들어간 허문도는 어떤 사람인가?
조선일보 기자 출신으로 일본 대사관 공보관으로 있으면서 반공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던 그는 운 좋게도 10. 26 이후 고교 동창생인 허삼수를 만나 권력자 전두환을 알현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1995년 검찰에서 나온 그의 기록을 보자.
- 전두환 보안사령관과는 언제부터 알게 되었나요.
“1980년 1월 말 문공부에서 열린 해외주재 공관 공보관 회의에 참석차 귀국했다가 저녁에 저의 고등학교 동창인 김진영, 허삼수 등을 만나 일본 방위청과 언론계에 돌고 있는 북한 동향이 심상찮다는 등의 정보와 일본 사정을 얘기해 주자 허삼수와 김진영이 ‘우리가 소개해 줄 테니 직접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만나 지금 말한 내용을 보고해 달라’고 부탁하여 그들의 제의를 승낙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전두환의 비서실장이 된 그는 일약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런 그의 머리 속에는 독특한 소명의식 같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언론 통폐합’, 말하자면 말 잘 듣는 언론사 몇 개만 남겨놓고, 나머지 시끄러운 언론사를 한꺼번에 청소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소명이었다. 반민주적이고 비민주적인 이런 발상은 전두환 독재시대를 열어가는 데 가장 중요한 전제이기도 했다. 그렇게 하여 작성된 것이 소위 ‘건전언론 육성방안’ 이라는 것이었다. 언론 대학살의 청사진이었다.
- 언론 통폐합 구상은 언제 최초로 했나요.
“1980년 5월 말경 제가 국보위 문공분과위원으로 들어가서부터 언론 통폐합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통폐합안을 작성하기 훨씬 전인 기자 생활을 할 당시부터 사이비, 공갈 기자 등이 활개치는 것을 보고 이 상태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일본 체류 중 우리나라 언론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언론사 난립으로 사원들에게 월급도 못주는 경영주가 있었고, 또 그런 관계로 사이비 기자가 넘치는 상황에서는 그런 언론사나 종사원은 사회적으로 기생충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 진술인이 공부한 일본의 언론 통폐합 사례는 어떠했나요.
“제가 책을 보던 중 일본도 2차 세계대전 중 통신사 등을 통폐합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신문사는 전국지는 3개(아사히, 마이니치, 요미우리), 지방지는 1道 1社 원칙이고, 통신사는 1개로 통폐합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억지로 끌어들인 논리였다. 청와대에서 허문도가 이런 작업을 하고 있을 때 보안사에서는 이상재가 또 그와 유사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1980년 11월 12일.
보안사 지하실로 각 언론사 대표를 태운 검은 색 승용차들이 집결했다.
그들은 보안사령관이라도 만날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보안사 위관 장교, 그리고 그들 책상 앞에 놓인 것은 달랑 종이 한 장, 언론사 포기각서였다. 약간의 불만 어린 실랑이가 벌어지긴 했지만 그 유명한 보안사 취조기관 ‘동빙고’로 모실까요, 한마디에 순순히 싸인을 했다.
각서 내용은 <본인은 새 시대를 맞아 국가의 언론정책에 적극 호응해 본인이 대표로 있는 신문 방송사를 다음과 같이 조치할 것을 다짐해 이에 각서하며, 이 각서에 의한 조치에 대해 앞으로 민형사소송 및 행정소송 등 여하한 방식에 의해서도 일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였다.
모두 45개 언론사 사주들로부터 52장의 각서를 받았다.
그로부터 이틀 후, 1980년 11월 14일, 신군부는 신문협회와 방송협회에 강요한 ‘건전언론 육성과 창달을 위한 결의문’을 빙자하여 언론통폐합을 단행하였다. 인기를 누리던 동양방송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대신 모두 국영방송인 KBS로 통합되었다. MBC는 당시 별도 법인으로 운영되던 21개 지방제휴사 주식 51%를 인수하여 계열화하였고, 5.16장학회가 가지고 있던 서울 MBC 주식 30%를 제외한 민간인 소유 주식은 주주들로 하여금 국가에 헌납하도록 하였다. 정치에 비판적이었던 기독교 방송은 보도기능을 없애고 선교방송만 남겨두었다. 통신사는 연합통신 하나로 통합되었고, 나머지 군소 통신사는 없애버렸다.
신문사는 더 엉망이었다. 1도 1사라는 허무맹랑한 발상에 따라 지방 신문사는 모조리 정리 대상이 되었다. 부산의 유력지 국제신문은 자기보다 덩치가 작은 부산일보에 흡수되었고, 경남일보는 경남매일신문에 흡수되었다. 원칙이고 뭐고가 없었다.
정기 간행물도 예외가 아니었다. 7월 31일에 172개의 정기 간행물 등록을 취소한데 이어 11월 29일에는 66개의 정기 간행물을 추가로 등록 취소하였다. 시사 잡지는 물론이고 ‘창작과 비평’이나 ‘문학과 지성’ 같은 순수 문예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작가들은 글을 발표할 지면을 잃어버렸고, 창작은 극도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씨알의 소리’ 같은 양심적인 잡지가 사라진 것도 이때였다.
독재자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칼을 지녔으니 칼은 그들의 것이다.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 그러나 칼 못지않게, 아니 칼보다 더 무서운 것, 그것은 바로 펜이다.
당시 언론사에 쫒겨난 청진동 막걸리집의 K 기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K 기자를 쫒아내게 만들었던 두 사람은 이후 승승장구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1995년 마침내 전두환 노태우와 함께 내란 협력자로 재판대에 섰을 때 그때 일은 모두 자기가 한 것이아니라며,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며 허둥지둥 발뺌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