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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고문치사사건 - 진실이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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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실을 알린 첫 제보자 이홍규 과장

1987년 1월 15일 아침, 대검찰청 공안4과장 이홍규는 실로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공안부장 티타임에서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어제 아침 대학생이 경찰 수사를 받다가 죽었다는군.” 

“네? 그게 정말인가요?” 

“이 일은 절대 외부에 발설하면 안 돼. 다들 입 조심해!” 

공안부장은 팀원들에게 단단히 함구령을 내렸다. 참석자들은 모두 가슴에 무거운 납덩어리를 매단 듯 중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매일 회의를 겸해 차를 마시는 이 시간은 지나간 여느 날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날만은 자신이 알 수 없는 진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속도감과 아득함을 동시에 느꼈다. 티타임이 끝난 뒤, 10층 사무실로 돌아온 이홍규 과장은 가슴속 양심의 소리가 격렬히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것을 애써 누르고 있었다.

‘어린 학생의 죽음을 이렇게 덮어두어도 되는가? 그것은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르는 짓 아닌가?’

그는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동안 검찰이 권력의 눈치를 봐왔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진실을 묻어둔 채 넘어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윗사람들의 결정에 그냥 따르기가 무척 괴로웠다. 오전 회의를 마친 뒤, 내내 서성이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1분, 1초가 흐를수록 진실의 무게가 태산처럼 자신의 존재를 압도해오고 있었다. 

오전 9시 50분, 중앙일보 사회부의 신성호 기자가 찾아왔다. 이 과장은 차나 한 잔 하라며 자리에 앉혔다. 법조계 출입 6년차인 신 기자는 서소문동 검찰청사를 매일같이 드나들어 이 과장과는 오랜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편이었다.

“경찰들 큰일났어.”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이 과장이 불쑥 내뱉었다. 뭔가 긴급한 일이 터졌다는 느낌이 꽂혔다. 자칫 서두르다가는 줄기를 놓칠 수 있었다. 그는 상황을 알고 있다는 투로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경찰들이 요즘 너무 기세등등했거든요.”

신성호 기자는 이날 그가 딥 스로트(deep throat), 즉 내부 비리를 고발하는 익명의 고발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과장은 어제 경찰 조사를 받던 학생이 죽었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털어놓았다. 

“서울대생이라지, 아마? 그 대학생이?”

이어지는 그의 말이 천둥처럼 들렸다. 하지만 신 기자는 태연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갔다.

“어디서 죽었대요?”

“남영동이라던가?”

말을 마치자, 이홍규 과장은 가슴속 바윗돌 하나를 덜어낸 것처럼 후련해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던 신 기자의 눈에 언뜻 살아 꿈틀거리는 기사의 몸통이 보였다. 남영동은 치안본부 대공분실을 의미했다. 남영동은 이 사건의 뇌관이었다. ‘경찰 조사를 받던 서울대생이 죽었다.’는 게 이 사건의 핵심이었다. 여기에 뇌관을 집어넣으면 어마어마한 메가톤급 문장이 되었다. 그 후폭풍의 범위는 아무도 측량할 수 없었다. ‘남영동에서 조사 받던 서울대생이 죽었다’는 것은 곧 ‘고문에 의한 사망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군사독재 시절의 은유가 직유로 바뀔 절호의 타이밍이었다.

2. 탐사보도의 주역 신성호 기자

신성호 기자는 대검찰청을 나온 뒤, 데스크인 이두석 사회부장에게 곧장 전화했다.

“이 부장,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이 갑자기 죽었답니다.”

“뭐라고? 그거, 큰일이군. 이봐, 신 기자. 중앙수사부와 서울지검에 가서 고문 사실 여부와 사망자 인적 사항을 철저히 확인해봐.”

전화 통화를 끝낸 두 사람은 바삐 움직였다. 이 부장은 서울대 출입기자와 부산 주재기자에게 각각 학적부 조회, 가족관계 확인을 지시했다. 신 기자는 곧장 중앙수사부 1과장 이진강 부장검사에게 달려갔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대뜸 이 부장검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조사받던 대학생이 죽었다는데, 고문 아닐까요?”

“가능한 일이지만 속단할 수는 없지.”

“다른 데도 아니고 남영동이잖아요.”

“경찰이 쇼크사로 보고했다잖소. 조사를 더 해보면 알겠지.”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이진강 부장검사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비치며 말꼬리가 처졌다. 중앙수사부 사무실을 나온 신 기자는 서울지검으로 발길을 돌렸다. 서울지검은 공안사건 보고를 받고 처리하는 곳이었다. 그는 최명부 1차장 검사를 만나 따지듯이 물었다.

“젊은 청년이 쇼크사했다는 걸 믿을 수 있어요? 노인도 아닌데요. 고문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 검찰이 직접 수사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최 차장은 난감한 얼굴이었다. 사실 확인을 해주는 대신 굳은 표정으로 한 마디 했다.

“당신, 조금이라도 기사를 잘못 쓰면 곤란해.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걸.”

신 기자는 쐐기를 박는 듯한 최 차장의 말을 어깨로 받으며 사무실을 나섰다. 오전 11시 30분, 그의 다음 행선지는 서울지검 공안부 김재기 검사실이었다. 신 기자는 취재수첩을 펴들고 사망한 학생의 인적 사항 확인에 들어갔다.

“검사님, 경찰 조사를 받다 사망한 서울대생 이름이 뭔가요?”

김 검사는 신 기자가 이 사건에 대해 거의 다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선선히 대답해주었다.

“박종, 뭐라고 했는데…….”

“학과는요?”

“언어학과 3학년.”

그는 숨 가쁜 오전 취재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의 손에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진실의 조각들이 쥐어져 있었다. 서둘러 발품을 판 보람이 있었다. 데스크에도 각 주재기자와 출입기자들의 보고가 이어졌다. 학생의 이름은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박종철이었다. 부산 가족들과도 통화가 이루어져 가족관계 확인도 마쳤다. 가족들은 경찰의 연락을 받고 서울로 떠난 뒤라서 부재중이었다. 이제, 신성호 기자의 머릿속에는 조각조각 나뉜 진실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었다. 그는 기사를 작성한 뒤 데스크에 전화했다.

“신 기자, 시간 없으니 기사 쓴 것 지금 불러줘.”

그가 기사를 불러주자 데스크가 받아 적기 시작했다.

“14일 연행되어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아오던 공안사건 관련 피의자 박종철 군(21.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 이날 하오 경찰조사를 받던 중 숨졌다. 그러나 검찰은 박 군이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 중이다.”

3. 군사정권과 맞선 언론

데스크에서 기사를 모두 확보한 시간은 오후 12시, 점심시간이었다. 편집국에 비상이 걸렸다. 석간 초판 인쇄는 이미 끝난 뒤였고, 이제 막 돌판(1.5판) 인쇄가 돌아가고 있었다. 인쇄소 안에는 레일 위를 달리는 기차바퀴 소리 같은 규칙적인 기계음이 가득했다. 

“윤전기 세워!”

금창태 편집국장대리가 인쇄소에 직접 가서 지시했다. 윤전기가 일시에 멈췄다. 그는 신성호 기자가 쓴 속보성 기사를 사회면에 2단 기사로 집어넣었다. 윤전기를 돌리라는 그의 지시에 따라 윤전반의 기사들이 신속히 움직였다. 가동을 다시 시작한 윤전기에서 거친 쇳소리가 들렸다.

1987년 1월 15일 오후 3시 30분, 가판대에 쏟아져 나온 《중앙일보》가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특종이었다. 사람들은 커다란 활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死).”

주먹만 한 제목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이 기사는 바야흐로 온 세상을 폭풍 속으로 휘몰아갔다. 국내 신문들이 다투어 후속 보도를 내보내는 사이, 《AP》《AFP》 등 서울발 외신의 긴급 타전이 이어져 박종철 군 사망 소식은 전 세계에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신문이 가판대에 깔린 뒤, 편집국에는 전화가 빗발쳤다. 

“기사 당장 안 빼?”

맨 먼저 문공부 홍보조정실 담당자가 금창태 편집국장대리에게 전화해 대뜸 욕설을 퍼부으며 항의했다. 문공부는 보도지침을 충실히 이행하는 정권의 나팔수였다. 강민창 치안본부장도 뒤이어 전화를 걸어 핏대를 세웠다.

“그 기사 오보야, 오보!”

하지만 진실을 언제까지나 은폐할 수는 없었다. 다급해진 경찰은 긴급 대책회의를 연 뒤, 오후 6시에 대국민 기자회견을 가졌다.

“어젯밤 술을 많이 마셔서 밥맛이 없다고 냉수를 달라고 하여 냉수를 몇 잔 마신 후 10시 15분경 심문을 시작, 박종운 군의 소재를 묻던 중 책상을 탁 치자 억 하고 소리 지르며 쓰러져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에 사망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발표문은 지나가던 개도 웃을 만큼 황당무계한 내용이었다.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은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다. 이 기자회견은 전국의 모든 청년 학생들을 궐기하게 했고, 도시와 농어촌에 이르기까지 분노의 함성으로 메아리치게 만들었다.

4. 지옥도의 야차들

1월 14일 새벽녘, 박종철은 치안본부 대공분실 소속 수사관들에 의해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실로 끌려갔다. 수사관들은 박종운의 소재를 대라고 닦달하며 박종철에게 고문을 가했다. 고문에 가담한 자들은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황정웅 경위, 반금곤 경장, 이정호 경장 등 5명이었다. 그들은 수배 중인 박종운을 체포해 일계급 특진을 하겠다는 일념에 불타 있었다. 현상금까지 붙은 박종운은 탐욕스런 먹잇감이었다. 그들은 이리떼처럼 사납게 덤비며 수시간 동안 가혹행위를 가했다. 오전 11시 20분경, 물고문을 받던 도중 박종철은 끝내 숨을 거두었다. 야수적인 군사독재의 만행에 의해 스물세 살의 꽃다운 청년은 그렇게 무참히 꺾이고 말았다.

박종철의 죽음 이후,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비롯한 경찰 고위직들은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시신을 처음 본 중앙대 부속 용산병원의 의사 오연상을 협박해 입막음을 시도했다. 부검의(剖檢醫)로 정해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1과장 황적준 박사에게도 사건을 축소해달라고 압력을 넣었다. 수사관들을 시켜 시신을 경찰병원으로 옮기려 했지만, 무위에 그쳤다.

1월 19일, 강 치안본부장은 할 수 없이 고문치사 사실을 인정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조차 “고문 경관은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 두 사람뿐”이라며 진실을 축소했다. 두 경관을 고문치사 혐의로 구속 수감하는 과정은 더욱 가관이었다. 경찰은 승합차 안에 똑같은 방한복을 입은 10여 명의 경관을 앉혀놓고 누가 고문 경관인지 알아볼 수 없도록 연막을 쳤다. 삼류 희극보다 못한, ‘잘못된 동료 감싸주기’의 작태는 국민들의 공분을 자아냈다.

17일자 《동아일보》에 오연상의 기사가 실리면서 사인(死因)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제가 대공분실에 처음 갔을 때는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습니다. 박 군은 복부 팽만이 심했고, 폐에서는 수포음이 들렸습니다.”

사실에 기초한 발언이었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물고문을 떠올렸다. 

“박종철 군의 사인은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입니다.”

부검의 황적준 박사도 언론사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경찰의 쇼크사를 정면으로 뒤집었다. 모든 언론이 이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숨졌다는 것은 이제 숨길 수 없는 여론의 대세가 되었다. 경찰은 박종철군고문치사사건을 자체적으로 조사하겠다고 했다. 고양이 스스로 생선가게를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검찰은 경찰의 자체 조사를 눈감아주려 했다. 이를 지켜본 국민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고문살인의 죄목으로 감옥에 갇힌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는 고문 가담 경관이 다섯 명인데 자신들만 잡혀왔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이때,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된 이부영이 교도관들과의 통방(간접 대화)으로 이 사실을 전해 들었다.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인 그는 민통련 사무처장으로 있다가 시국사건으로 감옥에 온 터였다. 그는 전직 교도관 출신 전병용에게 사실을 알렸다. 전병용은 재야 민주화운동의 일꾼인 김정남에게 전달했다. 김정남은 이 사실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게 신속히 알렸다. 5월 18일, 김승훈 신부는 5․18광주민중항쟁 희생자를 위한 추모미사에서 이 사실을 만 천하에 공표했다.

진실의 힘은 위대한 것이었다. 궁지에 몰린 5공 군사정부는 김종호 내무부 장관과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해임시켰다. 뿐만 아니라 박처원 치안감과 유정방, 박원택 경정 등 대공 간부 3명을 사건 축소 조작 및 범인 도피죄로 구속했다. 고문 근절 대책을 수립하는 등 유화적인 제스처를 썼으나, 국민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5공 정부는 급기야 장세동 안기부장과 노신영 국무총리를 해임시킨 뒤, 국민들 앞에 6․29선언을 발표했다. 6월항쟁은 국민의 승리로 끝났다.

글 박선욱(시인, 평전작가)
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시 〈누이야〉외 3편으로 제1회 실천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그때 이후》《다시 불러보는 벗들》《세상의 출구》 등의 시집과 《채광석 평전》《윤이상 평전》《김대중 평전》《황병기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