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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의 생애를 바꾼 세 친구
윤동주와 송몽규
문익환에게는 평생에 걸쳐 잊을 수 없는 세 친구가 있었다. 송몽규 윤동주 장준하이다. 셋 다 비극적인 운명의 소유자가 되었는데, 그 첫 번째 비보의 주인공은 윤동주였다.
“뭐라고? 동주가, 동주가 죽었다고?”
1945년 2월의 어느 날, 뜻밖의 소식을 접한 문익환은 온 몸이 얼어붙었다.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윤동주는 바로 그 달 16일에 운명했다. 그는 일제의 악랄한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고통에 겨워하다가 29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하게 된 것이다. 그는 송몽규와 더불어 재일 유학생들 앞에서 “우리는 조선 독립의 의지를 불태워야 하며, 민족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 특고경찰에 잡혀갔다. 똑같이 생체실험을 당하던 송몽규는 3월 7일 절명했다. 문익환에게 이 두 사람은 북간도 용정의 명동촌에서 함께 나고 자란 죽마고우였다. 숭실중학 시절에는 시 작품을 함께 교류하며 문학의 꿈을 키우던 동반자였다. 부음을 접한 문익환은 원통한 심정에 온 몸이 덜덜 떨리고 하늘이 캄캄하기만 했다. 뿌옇게 된 문익환의 눈앞에 송몽규 장준하 윤동주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무렵의 어느 날, 윤동주가 말했다.
“익환아. 네가 쓰고 있는 모자, 내 것하고 바꾸자.”
문익환이 “호떡을 사주면 바꿔 줄게.”라고 하자 윤동주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문익환은 윤동주가 사준 호떡을 실컷 먹은 뒤 모자를 건네주었다. 그 무렵엔 머리 둘레를 재어 모자를 맞춰서 쓰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문익환의 모자는 번듯한 데 비해 윤동주의 모자는 약간 우그러져 있었다. 윤동주는 그게 걸렸는지 문익환의 모자를 탐냈던 것이다.
송몽규는 193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콩트 〈술가락〉을 발표하여 입선상을 받았다. 열여덟 살 청년 문사의 탄생은 윤동주에게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문익환은 윤동주의 시재(詩才)를 부러워했고 윤동주는 송몽규의 문재(文才)를 부러워했다. 하지만, 윤동주 사후에 발견된 그의 시들은 한국문학의 빛나는 봉우리로 우뚝 섰다. 문익환은 그중에서 〈서시〉를 떠올려 보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와했다(……)’. 시의 구절들이 가슴속에 아프게 박혀 왔다. ‘몽규야! 동주야! 너희들의 몫까지 열심히 살아 낼게.’ 하고, 문익환은 굳은 다짐을 했다.
훗날 미국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한 뒤 목사가 된 문익환은 히브리어에 능통한 구약의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성서 공동번역의 책임자인 ‘대한성서공회 신구약 공동번역위원장’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여전히 시의 샘물이 흐르고 있었다. 공동성서 번역을 하는 틈틈이 시를 쓰던 그는 늦봄이라는 호를 지어 첫 시집 『새삼스런 하루』(1973년)를 펴낸 이후 『꿈을 비는 마음』(1978년) 등의 시집을 냈다. 벗들에 대한 다짐으로 늦깎이 시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장준하
절친한 친구의 세 번째 비보가 전해진 것은 1975년 8월 17일, 문익환의 나이 58세 때의 일이었다.
“문익환 목사님! 장준하 선생이 돌아가셨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장 선생이 돌아가시다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문익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장준하는 숭실학교는 물론이고 청년 시절 한신대에서도 함께 공부하며 고락을 나누던 벗이었다. 비할 데 없이 큰 슬픔이 밀려왔다. 때는 바야흐로 유신 통치가 절정에 달하던 무렵이었고, 박정희의 폭거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한 사람이 바로 장준하였다. 장준하는 일본 학도병에서 극적으로 탈출하여, 장장 6천 리의 대장정을 거쳐 광복군에 들어간 독립투사였다. 일본 만주국 황군 출신으로서 관동군에 배속돼 친일에 앞장섰던 박정희와는 모든 것이 대조되는 인물이었다.
이태 전인 1973년 12월 24일, 장준하는 서울 YMCA 2층 총무실에서 '개헌청원100만인서명운동'을 발표하며 박정희 대통령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또한, 잡지 『사상계』를 발행하면서 민주 회복을 위한 이론적 논거를 제공하며 유신체제를 매섭게 질타했다. 박정희는 그러한 장준하를 늘 두려워했고,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아! 나의 벗 장준하! 그대가 기어이 박정희 정권의 제물이 되고 말았는가?”
오열이 터져 나왔다. 장준하는 문익환보다 두 달 늦게 태어났고, 학창 시절 동생과 같은 반이었기에 자신의 3년 후배였던 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문익환은 장준하를 늘 동생으로 여겼다. 하지만 해방 후 한신대에 함께 다닐 때 옆에서 본 장준하는 달랐다. 학문하는 태도나 토론에 임하는 열정, 당대 상황에 대한 시국관에서 그는 눈부시게 앞서가는 대선배의 모습이었다.
“수사 당국은 장준하 씨의 죽음을 실족사로 처리해 발표했습니다.”
폭염 속에서 뉴스 속보가 흘러나왔다. 문익환은 동생 문동환 목사와 함께 곧장 사고 현장 약사봉 계곡으로 달려갔다. 사체와 유류품을 꼼꼼히 살펴본 뒤, 문익환은 단호하게 부르짖었다.
“이게 실족사라고? 높은 벼랑에서 굴러 떨어졌다는데 어떻게 메고 있던 마호병이 멀쩡할 수 있나? 귀 뒤를 보라구. 송곳으로 찔린 듯한 상처가 있잖아. 또 있어. 양 팔꿈치엔 무엇인가로 단단히 묶은 흔적이 있지 않나?”
둔기에 맞은 듯한 오른쪽 머리의 함몰 부분을 본 문익환의 가슴속에 불길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여태 종교적 임무를 수행하느라 침묵하고 있던 내부의 어느 한 곳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현실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책임감이 뜨겁게 분출되었다.
‘성서 공동번역도 막중한 일이지만 이제부터는 송몽규와 윤동주 장준하가 못다 한 일들을 내가 해야겠다. 친구들의 짐을 내가 기꺼이 짊어져야겠어!’
그날 문익환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민족의 소명을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했다. 그 일 가운데 하나는 장준하를 역사 속에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문익환은 『사상계』에 실린 장준하의 사설들을 모아 나갔다. 하나씩 원고를 정리할 때마다 친구가 다시 살아온 느낌이 들었다. 마침내 편집 단계를 거쳐 인쇄를 하려는 찰나,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갑자기 인쇄소에 들이닥쳐 압수수색을 했다.
“원고 내놔, 이놈들아!”
문익환은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들은 인쇄소를 마구 분탕질한 뒤 지프에 올라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눈앞이 캄캄했다.
더 많은 친구들과의 거대한 연대와 행진
1975년 8월 21일 오전 10시, 명동성당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의 집전으로 장준하의 영결식이 열렸다. 김대중 김영삼 등 야당 정치인들과 재야인사를 비롯한 추모객이 성당을 가득 메운 가운데 ‘민족열사 장준하 영결식’이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이날 장례위원장을 맡은 문익환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유신독재를 거침없이 비판했다. 신학자 문익환에서 재야 운동가 문익환으로 재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삼일절 기념미사가 열렸다. 이날 단상에 오른 이우정 선생은 낭랑한 목소리로 〈민주구국선언서〉를 읽어 나갔다.
“오늘로 3.1절 쉰일곱 돌을 맞으면서 1919년 3월 1일 전 세계에 울려 퍼지던 민족의 함성, 자주독립을 부르짖던 그 아우성이 쟁쟁히 울려와서 이대로 앉아 있는 구국선열들의 피를 땅에 묻어버리는 죄가 되는 것 같아 우리의 뜻을 모아 민주구국선언을 국내외에 선포하고자 한다.”
이 선언서는 문익환이 작성한 글이었다. 사법 당국은 곧 문익환을 비롯한 서명자 전원을 연행해 갔다. 3월 10일, 서울지검 서정각 검사장은 끌려간 20명을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는 발표를 했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신 반대를 외치는 학생운동이 부활했다. 위축되었던 재야의 민주회복운동도 다시 점화되었다. 문익환은 이후 한국 민주화운동의 최전선에서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재야, 학생, 시민들과 더불어 호흡해 나갔다.
유신의 심장 박정희는 자신이 수족처럼 부릴 수 있었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그뒤 전두환을 필두로 하는 신군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다. 5공화국은 광주 학살과 민주 압살의 잔인한 수레바퀴로 굴러갔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가의 시위가 1980년대의 일상이 되었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하다 사망했다. 전두환 정권은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입을 빌어 진실을 은폐하려 했지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박종철 군이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이 사실이 공개되자 전국의 대학생들이 “종철이를 살려내라!”는 절규를 쏟아내며 거리로 나섰다. 분노한 시민들은 “독재 타도! 민주 쟁취!” 구호를 외치며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 그 와중에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연세대생 이한열이 쓰러져 사경을 헤매다 끝내 사망했다. 1987년 7월 9일 오전 7시, 연세대 교정에서 이한열의 민주국민장이 열렸다. 연단에 오른 문익환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민주열사들의 이름을 불렀다.
“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장준하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민주 영령들의 이름이 하나씩 호명될 때마다 사람들은 저마다 눈시울을 붉혔다. 문익환의 사자후는 교정에 가득 찬 수백 개의 깃발들과 만장들마저 흐느끼게 했다. 영결식 이후 노제가 진행되는 동안 문익환은 학생들,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과 함께 했다. 문익환의 가슴속에는 수많은 송몽규와 윤동주가 넘실거렸다. 수많은 장준하와 전태일이 그와 어깨를 나란히 걸었으며, 숱한 박종철과 이한열이 깃발을 힘차게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들은 광화문과 시청, 을지로와 청계천을 함께 걸으며 “독재 타도! 호헌 철폐!”를 외쳤다. 무수히 많은 친구들과의 거대한 연대와 행진은 결국 1987년의 거리를 뜨겁게 달구었고, 마침내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