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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진인(眞人)으로 우뚝 선 계훈제
흰 고무신 신고 시위 현장을 누빈 투사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민주화 투쟁의 기나긴 연대에서 어김없이 흰 고무신을 신고 시위 현장에 나타나는 재야인사가 있었다. 어느 날 스크럼을 짜고 목청껏 구호를 외치던 시민 A씨가 옆 자리의 B씨에게 말했다.
“연단에 서 계신 백발의 노신사가 바로 문익환 목사님이야!”
“그걸 누가 모를까봐? 그 옆에 계신 분은 백기완 선생님 아닌가? 그런데 백 선생 옆에 계신 저 분은 누구시더라?”
B씨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A씨에게 되물었다.
“누구?”
“저기 저, 키 크고 몸피가 마른 저 분 말이야! 특이하게도 흰 고무신을 신었네 그랴.”
“아! 저 분은 재야운동가인 계훈제 선생님이시라네.”
“그래? 그런 분도 계셨나?”
A씨의 설명대로 문익환, 백기완 등은 대학생은 물론, 일반 시민들에게도 잘 알려진 재야인사였다. 계훈제 또한 그들과 함께 항상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서 있었지만, 그의 조용한 성품 탓인지 일반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편이었다.
일제하 독립운동에서 터득한 ‘실천’, 평생의 화두 삼다
계훈제는 1921년 평안북도 선천군 동림성 안의 산골짜기에서 아버지 계봉집과 어머니 이형저 사이의 오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44년 1월 중순,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 전신) 법문학부 2학년이던 계훈제는 일본 육군 제1훈련소에 학도병으로 끌려가 평양 근교 승호리의 시멘트 공장에 배속되어 강제 노역을 당했다. 지옥 같은 중노동에 시달리던 그는 부상을 입고 의무실에서 치료를 받던 중 학병 거부자인 장성규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둘만 남게 되자 장성규는 뜻밖의 고백을 했다.
“나는 조선민족해방협동당의 당원이오. 승호리의 책임세포이기도 하오. 계 동지도 나와 뜻을 함께 하겠소?”
그 말을 들은 계훈제는 흔쾌히 승낙했다.
“나에게 진실을 말해주니 고맙구려. 좋소. 나도 장 동지와 함께 협동당의 식구가 되어 조국 독립을 위해 투쟁하겠소.”
협동당의 일원이 된 계훈제가 장성규 등 동지들과 함께 할 첫 번째 거사는 패색이 짙어 가는 일본군에 충격을 주기 위해 승호리에서 봉기를 하는 것이었다. 중앙의 지령이 떨어지면 마을 주민들을 규합하여 온갖 농기구를 들고 주재소와 읍사무소를 습격하기로 약속이 이루어졌다. 습격 이후, 일본인 주요 간부들을 없앤 다음 계훈제와 장성규가 주동이 되어 압록강 수력전기회사의 고로(高爐)를 폭파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장성규는 이 일을 완수하기 위해 다이너마이트까지 구해 숨겨 놓았다. 하지만 이듬해인 1945년 2월 장성규가 일경에 체포됨으로써 작전 수행이 불가능해졌다. 비록 거사는 물거품이 되었지만 이 일은 계훈제에게 ‘실천’을 평생의 가장 중요한 행동 지침으로 세워놓은 계기가 되었다.
학생운동의 기수에서 민주화운동의 수호자로
해방 이후 노동운동에 뛰어든 계훈제는 당시 얻은 폐결핵과 늑막염으로 병마에 시달리다가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생사를 넘나드는 5년 동안의 사투 끝에 그는 결국 폐 한쪽을 떼어내고 늑골 여섯 대를 잘라내는 대수술 끝에 간신히 회복되었다. 1959년 가을, 서울역에 도착한 계훈제는 이후 장준하와 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계훈제는 이후 펼쳐지는 이승만 독재와의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맞섰다. 계훈제는 스스로 쓴 글에서 자신의 일생을 관통하는 ‘저항’의 의지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삶, 곧 생명의 본질은 자생이다. 자유를 누리려면 이를 막는 힘이나 세력에 맞서는 저항의 자세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사람은 생명이요, 인격이기 때문에 사람은 저항하는 것이다.”
계훈제는 장준하가 운영하는 《사상계》의 식구로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3.15부정선거로 청년 학생들이 데모에 나섰을 때는 학생운동의 최고참 선배로서 대학생들과 더불어 가두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난 뒤에는 교원노조운동에 몸 담아 온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5.16 군사쿠데타가 터지는 바람에 이제 막 태동하려던 교원노조운동은 결실을 거두기도 전에 짓밟히고 말았다. 이 일로 수배령이 떨어진 계훈제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다. 이 기간에 그는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한 재원인 김진주와 결혼했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이 사실을 전혀 알리지 않았다. 민주화운동의 동지인 함석헌조차 까맣게 모를 정도였다. 일경을 피해 암암리에 행동하던 독립군들의 삶과 그 원칙을 어렸을 때부터 익히 알던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일을 마치 독립군들의 생활 수칙에 준할 정도로 철저히 함구한 것이다.
그가 가까운 동지에게까지 결혼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은, 간악한 일제와 버금갈 만큼 비정하고 포악한 박정희 정권의 등장 때문일 것이다. 계훈제는 이 사악한 정권과의 일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심신을 재무장하여 ‘사사로운 것을 떨쳐내고’ 단단히 한판 붙어야 한다는 각오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만주의 일본 군관학교에 입학하고자 혈서를 썼고, 만주군 소위로서 일제에 충성했다. 그는 1965년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맺으면서 대일본 청구권을 무산시켰고 10월유신을 통해 장기집권의 초석을 깔았다. 이에 계훈제는 분연히 일어나 장준하와 더불어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에 동참했다.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를 발동해 장준하와 백기완, 계훈제 등 민주인사를 구속시켰다.
1975년 8월 17일,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장준하가 사망하는 돌연한 일을 맞이한 계훈제는 “형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았습니다. 우리들도 형을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할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조사(弔辭)를 낭독하며 통곡을 금치 못했다.
박 정권이 《사상계》를 폐간 조치한 이후, 계훈제는 함석헌이 편집인 겸 편집주간이 되어 창간한 《씨ᄋᆞᆯ의 소리》에 편집위원으로 참가했다. 살아생전에 장준하가 편집인 좌장으로서 법정, 김동길, 천관우 등 필진들과 더불어 계훈제, 최석채, 안병무, 이병린 등 편집위원들을 진두지휘했지만 이제 계훈제가 그 역할을 감내해야 했다.
계훈제는 이 잡지에 많은 글을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어느 저항인의 하루〉에 나오는 글의 제목인 ‘항자(抗者)’, 즉 ‘저항하는 자’는 글쓴이의 자아를 암시하는 상징어로서 도드라진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총에 유신의 심장이 끝장난 뒤 짧은 서울의 봄이 찾아와 민주와 자유의 물결이 찾아오는가 싶더니 12.12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일당 등 신군부의 세상이 되었다. 이듬해 신군부는 ‘계엄령 해제’와 ‘민주화 회복’을 요구한 학생을 비롯해 수천의 시민을 짓밟은 1980년 5월 광주학살을 자행했다. 계훈제는 동지들과 함께 민주화운동의 최전선에 나서서 목청껏 ‘독재타도’의 함성을 질렀다. 이후, 5공정권과의 지난한 싸움 끝에 마침내 1987년 6월민주항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 되었지만, 노년기에 접어들어서도 계훈제는 결코 민주화의 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발걸음을 최후로 멈추게 한 것은, 젊은 시절부터 그의 몸을 갉아먹은 온갖 질병들이었다. 1999년 봄, 그는 지상의 발걸음을 한순간에 정지하고 영면에 들었다. 그가 세상을 뜨기 2년 전 일기에 “나는 조국을 택하느냐 가족을 택하느냐 옆눈질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조국을 택했다.”라고 썼듯이, 그는 이제 자신이 택한 조국의 심장에 박혀, 영원히 진주처럼 조국의 밤하늘을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