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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종대_농민운동사의 험로를 개척한 작은 거인
용기와 배짱을 갖춘 청년 농촌자원지도자
지도소가 주관하는 4H 구락부 수련회가 열리고 있었다. 행사가 막 시작되려 할 즈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맑던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아이고! 금세 비가 올 것 같은데, 어쩌나?”
“그러게. 사방이 모래밭이라 마땅히 비를 피할 곳도 없으니 큰일이군.”
수백여 명의 참석자들이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행사를 진행해야 할 농촌지도소 소장은 좌불안석이었다. 그때, 군중 속에서 한 청년이 나타나 외쳤다.
“여기서 20분 거리에 우리 동네가 있으니 그리로 가십시다. 종갓집과 우리 집, 마을 회원들의 집으로 들어가면 비를 피할 수도 있고 숙식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빨리 이동하세요!”
그가 단호한 어조로 말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마치 자석에라도 이끌리듯이 그를 따라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따라가면서 몇몇이 수군거렸다.
“자그마한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우렁찬 목소리가 나오지? 대체 저 사람이 누구야?”
“나도 잘 몰라. 그런데, 어쩐지 믿음이 가네. 어서 따라가자고.”
그러자, 뒤에 있던 한 사람이 툭 던지듯이 말했다.
“아, 저 청년은 우리 마을의 농촌자원지도자이자 야학 선생님입니다. 책도 많이 읽고 아는 게 많지만, 난 체하지 않고 늘 솔선수범하는 사람이지요.”
그 사이 빗줄기가 더욱 거세졌고 대진 앞바다로 흘러가던 남천강은 황토물로 넘실거려서 위태로웠다. 관어대로 가려면 강을 반드시 건너야 하므로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
“회원님들! 저랑 함께 구명 로프를 가지고 강을 건넙시다.”
이번에도 아까의 청년이 나섰다. 어깨에는 이미 로프를 짊어진 상태였다. 청년은 몇몇 회원들과 더불어 도도한 물살을 건넌 뒤 강가의 나무에 로프를 단단히 묶은 다음, 여성 회원들부터 차례로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청년이 보여준 용기와 과감한 결단으로 인해 290여 명에 달하는 회원 모두가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또한, 비가 내리 닷새 동안 퍼붓는 날씨 속에서도 참석자들 모두 관어대의 종갓집과 마을 회원들의 집에 분산해 숙식을 해결하면서 무사히 수련회 일정을 소화했다. 이 일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바로, 훗날 전국농민회총연맹 초대 상임의장에 취임해 한국 농민운동사의 험로를 개척하면서 농민운동의 지도자로 존경받았던 권종대이다.
농민운동가에서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지도자로
권종대는 1936년 5월 16일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읍 괴시리에서 태어났다. 안동중학교를 거쳐 안동고등학교에 입학한 권종대는 독서와 문학을 좋아했고 성적도 상위권이었다. 남달리 정의감에 불탔던 그는 3학년 졸업반일 때, 월사금을 못 낸 학우를 퇴학시킨 학교 당국에 항의하며 자퇴서를 냈다. 이 일로 그의 최종 학력은 고등학교 중퇴, 중졸이 되고 말았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더 큰 세상을 직접 보고 싶어 서울로 떠났던 권종대는 1960년 3.15부정선거로 촉발되어 일어난 4.19혁명의 대열에 참여했다. 민주화의 바람을 맞게 된 권종대는 이때부터 《사상계》와 《민족일보》를 구독하면서 세상의 흐름을 읽으려 노력했다.
“이 모든 자유의 적을 쳐부수고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또다시 역사를 말살하고 조상을 모욕하는 어리석은 후예가 되지 않기 위하여 자기의 무능과 태만과 비겁함으로 말미암아 자손만대에 누를 끼치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역사적 사명을 깊이 통찰하고 지성일관 그 완수에 용약매진해야 할 줄로 안다.”
1953년 4월에 창간된 《사상계》에 실린 장준하의 창간사이다. 권종대는 이 글을 읽고 공감한 나머지 모조리 암기했으며, 함석헌의 저서 《뜻으로 본 한국사》에 심취해 책이 닳아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권종대는 고향 관어대로 돌아가 마을 재건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4H 구락부 활동을 통해 농촌자원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야학 학생은 물론이고 마을 청년들에게도 장준하의 창간사를 달달 외우게 했다. 모내기철에 모를 심거나 가을걷이를 할 때면 장준하의 기백 넘치는 글을 노동요처럼 함께 외우며 들일을 하는 청년들의 씩씩한 모습이 보였다. 마을 사람들은 이 기이한 광경이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나중에는 좋은 뜻이라며 기특해했다.
권종대는 1961년 겨울 함석헌의 시 구절에서 따온 ‘한밝회’라는 이름의 야학을 열었다. 그는 종갓집 상방을 야학 교실로 쓰면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다. 폭넓은 독서를 하며 인상 깊은 구절을 써놓는 기록벽이 있던 그는 안재홍의 수필 〈독서에 대하여〉, 유달영의 〈백두산 등정기〉, 함석헌의 시 〈내 사랑아〉, 정지용의 시 〈향수〉, 김진섭의 수필 〈송춘(頌春)〉을 비롯해 각종 농사기술 자료, 비료 가격표, 우리나라 신문의 발달사 등 실로 다양한 글들을 교재로 사용하면서 야학 학생들의 교양 수준을 높여 주었다.
권종대는 1966년 봄 형해고등공민학교의 국어교사로 부임해 국어와 농업, 역사를 가르쳤고 그해 8월, 가나안농군학교에 입교해 새로운 농업기술과 지식을 배웠다. 농촌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해 나가야겠다는 사명의식이 싹튼 기간이었다. 1971년에는 영덕여자중학교 교사로 부임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1976년 12월 14일, 권종대는 전국농업기술자대회에 참석하여 시야가 확 트이는 경험을 했다. 한국가톨릭농민회(가농) 교육부장 정연석이 ‘쌀 생산비 조사 보고’를 발표를 했는데 “과학적인 조사를 토대로 쌀 생산비를 보장하라는 대정부투쟁을 했다”는 사례들이 생생히 귀에 꽂혔다. 강연을 들을수록 그동안 일본에 건너가 양계기술을 배우는 등 선진농법 배우기에 매달렸던 여태까지의 노력이 헛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1977년 1월 11일 대구가톨릭근로자회관에서 가농 경북지구연합회가 창립됨과 동시에 이사진이 구성되었다. 권종대는 이날 가농에 가입하자마자 이사로 선출되었다. 전국농업기술자대회에 참석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마흔두 살의 늦깎이로 사회운동권에 뛰어들게 된 그는 이때부터 농촌계몽가에서 농민운동가로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1978년 4월 24일, 권종대는 광주 북동 천주교회에서 함평고구마사건의 주역인 7백여 농민들과 더불어 집회에 참석해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긴급조치 9호가 발령된 엄혹한 시절이었지만 가열찬 투쟁 끝에 이 사건은 농민들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4개월 뒤 권종대는 안동교구협의회 회장직을 맡아 첫 임무인 ‘전국 쌀 생산자 대회 및 추수감사제 영남대회’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으며 그해 12월 27일 한국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창립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86년, 권종대는 안동지역 소값피해보상 소몰이투쟁을 주도함으로써 농민운동의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1990년 전국농민총연맹(전농) 초대 상임의장에 취임한 권종대는 전국 7백만 농민을 대표하는 단일조직의 수장으로서 우루과이라운드협상저지투쟁, 농어촌발전종합대책분쇄투쟁, 쌀전량수매쟁취투쟁을 벌여나갔다.
권종대는 1991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초대 상임의장, ‘민주대개혁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회의’ 공동의장에 취임하여 반독재투쟁 전선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공안 당국의 수배를 받는 동안 건강이 나빠지고 집안은 더욱 빈한해졌으나 그의 투쟁은 변함없이 이어졌다. 1994년 ‘5.18진상규명과 광주항쟁정신계승 국민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여 5.18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 활동을 벌이던 권종대는 그해 겨울 국회의원 선거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받고 고향에 내려간 뒤 간암 수술을 받았다.
2004년 지병이 악화되어 중환자실에 누워 있던 권종대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스스로 산소 호흡기를 떼어낸 뒤 존엄하게 자신의 삶을 마무리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숱한 문학서적을 독파하며 시를 썼고, 훗날 전농 의장이 되어 정보 당국에 쫓길 때에도 일기와 수필 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숨은 문학인이기도 했다. 그가 남긴 시와 에세이는 평생을 이 땅의 농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바쳤던 그의 삶과 어우러져, 순정함으로 빚은 글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과 함께 영원히 꺼지지 않고 누리를 비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