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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의 메카_ 추억의 세실레스토랑
“뭔 놈의 기자회견만 하면 세실레스토랑이라니?”
“글쎄 말이야. 암튼 세실이 조용하면 세상이 조용하고, 세실이 시끄러우면 세상이 시끄럽다는 말도 있으니까 말이야.”
“암튼 요즘은 세실이 조용한 걸 보니 세상이 좀 좋아지긴 했나 봐.”
그랬다. 군사정권이 한창 위세를 떨치던 시대, 이곳은 기자회견의 메카로서, 기자회견의 등불을 가장 먼저 켜는 곳이었다.
“아무개 단체의 누구누구가 오늘 아침 서울 정동 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갖고...”로 시작되는 문장은 라디오 방송이나 신문 사회면의 대표적인 상투어 중의 하나였다.
추억의 그곳. 세실레스토랑
경식은 아내랑 광화문에서 차를 내려 정동 뒷길을 걸어 세실레스토랑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며칠 전, 신문에서 그 추억의 경양식집이 곧 경영난으로 문을 닫을 거란 이야기를 듣고, 마지막으로 한번 찾아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눈이라도 오려나?”
경식은 끄무레한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았다.
오래간만에 아내와 같이 걸어보는 덕수궁 돌담길. 이곳에 오면 마치 시간 여행을 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화여고 지나 정동교회, 구세군회관, 아기자기한 건물들 곳곳에 추억의 그림자가 스며있었다.
“언젠가 가을, 노란 은행잎이 지천으로 깔려있던 날, 당신이랑 이 길을 걸어본 게 벌써 아득하구려.”
아내는 경식의 팔짱을 끼고 함께 돌담 위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푸른 눈빛의 청춘도 눈 깜박할 새 지나가 버리고 둘 다 세월의 흔적처럼 눈가에 주름살이 잡히고 머리도 희끗희끗 반백이 된 지 오래다.
“그나저나 이제 곧 문을 닫을 거라고 하니 아쉽네요. 우리가 친구 소개로 첫 미팅을 한 곳인데... 거기서 만나면 뭐든 이루어진다고 했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당신이랑 내가 이렇게 평생 한 짝이 되어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 사실 그때 제법 괜찮은 경양식집이라곤 서울 중심에서는 거기뿐이었으니까.”
덕수궁 옆 성공회성당 맞은편에 달팽이처럼 빙글 돌아가는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면 깔끔하고 아담한 공간이 나타난다. 붉은 벽돌로 된 벽도 그렇고 크고 산뜻한 샹들리에도 경식 같은 촌스러운 사람에게는 뭔지 모르게 이국적인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곳은 머지않아 내로라하는 문인들과 민주인사들의 사랑방이 되어버렸다. 광화문 부근에 술집 빼고는 어디 갈만한 데도 없었거니와 무엇보다도 조용하고, 거기에다 오랜만에 떡갈비 스테이크 같은 경양식을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통이 편리한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은 점도 좋았고, 여차하면 형사들을 피해 영국대사관 방향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뒷문까지 있었으니 그만한 명당은 없을 터였다. 그러니 자연히 서슬 퍼런 시대 그곳은 민주인사들의 피난처이자 명동성당과 같은 소도가 되었다.
“여보, 세실이란 이름이 참 예쁜데... 무슨 뜻인지 알아요?”
아내가 새삼스럽게 묻는다.
“세실? 응. 일제 강점기 때 성공회 주교로 계셨던 분 중에 세실이란 분이 계셨대요. 세실 쿠퍼라고. 그분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해요.”
“아. 세실 쿠퍼. 분명 그분도 아름다운 분이었을 것 같네요.”
아내는 소녀처럼 웃으며 경식의 팔짱을 꼭 끼었다. 마치 20년 전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생각나요? 추억의 떡갈비 스테이크?”
“맞어. 지금 생각하면 촌스럽기도 했는데, 그땐 그게 얼마나 맛있었던지. 헛헛헛.”
“하하하.”
두 사람은 유쾌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젊었을 때 출판사 직원이었던 경식이 편집장의 지시로 처음 신영복 선생이나 리영희 선생을 만난 곳도 이곳 세실레스토랑이었다. 글씨를 받으러 갔는지 원고를 받으러 갔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외유내강한 선비형의 신영복 선생은 누구에게나 조용하고 겸손하게 작은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그에 비하면 리영희 선생은 칼칼한 목소리에 무언지 모르게 마른 대나무 같은 빈틈없는 느낌을 주었다.
그래도 그곳에 그런 분들을 만나러 가던 날은 얼마나 가슴이 설레곤 했던가. 이제 그분들도 다 떠나고 그 세실까지 문을 닫는다니 오늘 아내와 가는 길은 이제 그때 그 길이 아닐 것이었다.
마침 안에는 낯익은 주인이 있어 반갑게 맞아주었다. 벽면에 붙어 있던 지나간 많은 인사들의 사인을 하나하나 정성껏 뜯어내는 중이었다.
“이런 공간이 사라진다니 여간 아쉽지 않네요.”
아내랑 나란히 떡갈비 스테이크를 시켜놓고, 경식이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쩔 수 없죠. 시간이 흘러가듯 시대도 변하는 것을... 파괴가 있어야 창조도 있는 법이니까요.”
주인은 애써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지. 누가 완강한 세월의 변화를 거스를 수가 있을 것인가.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역사도 흘러가는 법이겠지. 민주화가 이루어질수록 역으로 세실은 조용해져 가고,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져 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사람들은 보다 다양하고 세련된 장소를 찾아서 갔다. 무대 위에서 역할을 다 한 배우가 떠나듯이 세실도 이제 역사의 무대 위에서 사라질 시간이 된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도 그와 같을지 모른다.
식사를 마친 경식은 다시 한번 실내를 돌아보고는 밖으로 나왔다.
“여보, 세실과 함께 우리의 뜨거웠던 추억도 이젠 앨범 속에 고이 간직해야겠구려.”
“그러게요. 그래도 세실이 있어 행복했어요.”
어느새 하늘에서 흰 눈이 푸슬푸슬 떨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어깨 위로도 눈이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