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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의 토끼 사냥 - 2.28민주운동
“아니 일요일에 갑자기 토끼 사냥이 뭐꼬?”
산비탈을 오르느라 땀을 뻘뻘 흘리며 박인철이 말했다.
“글쎄 말이다. 옛날 속담에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는 말이 안 있나? 지금 우리가 그 꼴이지뭐꼬.”
모자를 삐뚜름하게 쓴 김문호가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그라고 느닷없이 토끼란 놈이 어데 있다고 이 난리란 말이가?”
“뻔하지 뭐. 오늘 수성 못에서 야당인 민주당 부통령 후보 유세하는 날 아이가. 우리보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지금 이 난리 아이가.”
박인철과 김문호는 대구고등학교 2학년 동급생이었다. 그들은 학교의 지시에 의해 앞산에 토끼 사냥을 나왔던 것이다.
그날 1960년 2월 28일은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구 일원의 초, 중고등학교엔 일제히 등교 지시가 내려져 있었다. 이렇게 그날 시내 학교에 갑자기 일요일 등교 지시를 내린 이유는 오후 2시 대구 외곽에 있는 수성천변에서 야당인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유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 박사는 심장병 치료차 미국 육군병원에 입원하였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여당 후보인 이승만이 단독후보로 자동으로 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이 문제였다. 이기붕은 늙은 대통령 이승만이 재임 중 유고라도 생기면 자리를 이어갈 유일한 후계자였다. 그런데 정상적으로 하면 이기붕이 야당 후보인 민주당의 장면을 이길 수가 없었다. 이미 민심은 자유당의 오랜 독재에 신물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갖 관권을 동원해 무리해서라도 야당의 유세를 방해하고, 훼방을 놓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장면 박사의 유세에 대구 시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 거라는 정보가 이미 올라와 있었다. 내무부장관과 문교부장관, 경찰국장 등 관계 장관들이 급히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번 대구 유세는 어떻게든 막아야 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우리 경찰이 철통 같이 막아서 못 가게 하겠습니다.”
“학생들이 문제예요. 학생들.....”
“그날이 일요일인데 별 문제 있을까요?”
“아, 일요일이니까 문제죠. 학교에 가지 않으니까 유세장으로 몰려갈게 아닙니까?”
“그럼. 학교에 나오게 하면 되지요. 각급 학교에 그렇게 지시를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요. 학생들 뿐만 아니라 학부모도 나오게 하고....”
그렇게 하여 일요일 등교가 급히 정해진 것이었다. 행사 내용은 각 학교마다 학교장 재량에 맡기도록 했다. 전날인 27일에는 여당인 자유당 후보의 유세가 있었는데 그때는 오히려 유세장에 많은 사람들이 참가할 수 있도록 수업을 단축하고, 직장에서도 조기 퇴근을 시키는가 하면, 집집마다 강제적으로 한명씩 동원을 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등교 지시를 받은 학교에서는 부랴부랴 없던 행사를 마련하느라 분주하였다.
경북고는 보건, 음악, 미술, 등 실기 시험을, 대구여고는 무용발표회, 경상중학교는 졸업식 연습, 대구상고는 졸업생 송별회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급조해 만들어진 행사 중에서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대구고등학교의 ‘토끼 사냥’이었다.
박인철과 김문호가 아침에 다른 급우들과 산으로 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일요일의 난리법석은 비단 학생들에게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섬유공장이 많은 대구 일원의 모든 공장의 직공들은 이날 정상 출근을 하게 하였고, 공무원과 군인들은 체육대회를 열거나 심지어 극장을 빌려 생뚱맞게 노래자랑대회를 열게 하였다.
“아니, 이게 우리 학생들을 바보로 아는 기지 뭐꼬?”
문호가 말했다.
“그래. 우리 학생 뿐만이 아니야. 이승만 정권은 지금 우리 국민 전체를 우습게 알고 있어.”
인철이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노예처럼 살면 우리의 미래, 아니, 우리나라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최소한의 저항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쉿. 그렇지 않아도 어제 학생 대표들이 경북고등학교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이대우 학생의 집에 모여 구수회의를 가졌다 카더라. 유세장에도 가지 않고 대신 일요 등교에 항의하는 집회를 가지기로 하고, 결의문까지 작성해 두었다 카더라.”
“정말?”
인철의 말에 문호는 눈을 반짝 떴다.
그랬다.
그들이 학교장의 지시로 토끼 사냥에 나섰던 그날 2월 28일. 낮 12시 50분.
일요일 강제 등교에 항의하며 먼저 교문을 박차고 나온 대구 경북고등학교 학생 800여명이 단숨에 시내 중심가를 가로질러 도청 광장 앞으로 모였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이 그와 때를 같이 하여 대구고등학교, 경북여고, 경북대사대부고 학생들도 속속들이 도청 앞으로 모여들었다.
경북고등학교 운영회 부위원장 이대우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준비해온 유인물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인류 역사 이래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가.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느 역사책 속에 끼어 있었던가!”
“옳소!”
“우리는 배움에 불타는 신성한 각오와 장차 동아를 짊어지고 나갈 꿋꿋한 역군이요, 사회악에 물들지 않은 백합같이 순결한 청춘이요, 학도들이다. 우리 백만 학도는 지금 이 시간에도 타고르의 시를 잊지 않고 있다. ‘그 촛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잘 한다!”
결의문을 읽어나가는 동안 어느새 연도에 꽉 들어찬 시민들은 박수로 환호하였다.
시위 소식은 곧 시내 다른 학교로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때까지 학교에서 엉뚱한 행사를 하고 있던 학생들도 교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교문을 박차고 나오거나, 심지어는 담을 타넘고 모여들었다. 도청 앞에는 삽시간에 학생들의 물결로 넘실거렸다.
“일요 등교를 해명하라!“
“학생들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
“횃불을 밝혀라!”
학생들이 시내에서 시위를 하는 동안 수성천변 민주당 유세장에도 20여만의 시민들이 운집하였다. 당황한 경찰과 집권당인 자유당은 대책회의를 여느라 바빴다.
도청에 모인 학생들은 질서 정연하게 자유당 도당 당사 앞을 거쳐, 도지사 관사 앞으로 행진하였다.
“장하다! 학생들...!”
“드디어 너희들이 일어섰구나!”
그렇지 않아도 이승만 정권의 폭압에 지금까지 꿀먹은 벙어리처럼 바보 노릇을 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시민들은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열렬히 환호하였다.
인철과 문호도 나란히 어깨를 걸고 시위대의 맨 앞에서 목이 터져라 외쳤다.
“일요일 토끼 사냥이 뭐냐! 학원의 자유 보장하라!”
인철의 구호소리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노래도 울려나왔다. 당시 대구 사대부고 2년생 오석수, 이영길, 유효길 군이 ‘유정천리’ 라는 유행가 곡조에 맞춰 지은 개사곡였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선생 뒤를 따라, 장면박사 홀로 두고, 조박사는 떠나갔네. 가도가도 끝이 없는, 당선 일은 몇 구비뇨?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오네. (1절)
세상을 원망하랴, 자유당을 원망하랴, 춘삼월 15일에, 조기선거 웬말이냐? 천리만리 타국 땅 병사 죽음 웬 말이냐? 설움 어린 신문들과 백성들이 울고 있네. (2절)“
가사는 소박했지만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갑자기 원인 모를 병으로 죽어버린 해공 신익희 선생과 미 육군병원에서 급사한 조병옥 박사에 대한 애도와 설움이 담겨져 있는 노래였다. 이 개사곡을 만든 학생들은 그 후 무기정학을 당했다. 그러나 이날 처음 불렸던 이 노래는 삽시간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전국적으로 대유행을 하였다. 술집에서도 우물가에서도 누구나 이 노래를 불렀다. 어른들도 부르고 아이들도 불렀다. 민주화운동이 전무하였던 시절, 사람들은 자신의 뜻을 표현할 길이 없었고 방법조차 몰랐던 것이다.
이날 시위는 밤늦게까지 이어지다가 7시 40분 경 경찰의 투입으로 일단 진정이 되었다. 경찰은 시위에 참가한 학생 250명을 연행하였다. 인철과 문호도 그 속에 끼어 있었다. 그러나 선거를 앞두고 민심을 자극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판단한 정부의 판단에 따라 그날 밤 안으로 모두 석방조치되었다. 그러나 그 후 주모자들에 대해서는 계속 미행을 붙이고, 교사들에게는 매일 가정방문을 하여 동태를 살피게 하는 등 감시를 그치지 않았다.
이날 벌어진 2월 28일 대구 학생 의거는 비록 작은 폭발에 불과했지만 역사적인 의의가 큰 사건이었다. 이제까지와 같이 동원되는 강제적인 시위가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조직한 자발적인 시위였고 가슴 속에 숨겨두었던 정의감의 발로였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두려움을 벗어던지는 순간, 혁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대구 2. 28 학생의거는 폭압적 권력에 맞서 두려움을 떨치고, 국민들의 가슴에 잠자던 자유혼을 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유당과 이승만 정권의 탄압은 더욱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무소불의의 권력에도 마침내 조종이 울릴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고 징조가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처음엔 일요등교 거부나 학원의 자유로부터 시작된 구호도 전국적으로 시위가 파급되면서 점차 공명선거를 요구하는 국민주권운동으로 발전해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있을 4.19 혁명의 시작이었다. 토끼 사냥이 장차 늙은 호랑이 사냥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걸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지금 생각해도 독재정권이란 참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곤 해요. 일요일날 학생들을 동원해 토끼사냥이라니? 발상이 얼마나 순진합니까? 결국 국민들을 멍텅구리로 알았다는 거 아니겠어요?”
당시 열일곱 볼 붉은 소년이었던 박인철 할아버지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