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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_ 씨ᄋᆞᆯ의 소리 함석헌
1976년 봄.
서슬 푸른 박정희 유신 정권이 그악스럽게 칼을 휘두르던 무렵. 산천도 입을 다물고, 사람들도 입과 귀와 눈을 막힌 채 침묵하던 시절.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우리나라 최고의 원로들이 죄수복을 입은 채 나타났다. 노환으로 못 나온 윤보선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 문익환, 김대중, 함세웅, 정일형, 문정현, 김승훈, 이태영 등 기독교 신구교와 재야 지도자들이 나란히 법정 피고석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얼마 전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민주구국선언문’을 작성하고 서명하고 지지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유난히 눈에 띄는 한 분이 있었다. 하얀 수염에 흰 두루마기를 입은 훤칠한 이마의 노인. 바로 함석헌 선생이었다.
“피고들은 3·1절 기념미사가 거행된 명동성당에서 민주회복이라는 명목 아래, 소위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여 청중을 선동하여 시위를 촉발시킴으로써 민중 봉기를 확산하고, 나아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이를 이용하여 현 정부를 전복, 정권을 탈취할 것을 획책하였다.”
판에 박힌 검사의 논고와 또한 판에 박힌 판사의 결심.
팔순을 바라보는 사상가이자 ‘겨레의 할아버지’ 함석헌은 다른 사람과 함께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의 처분을 받았다. 그에 대한 조금의 존경심도 없었던 박정희 군사정권의 단말마적 중형이었다. 그러나 젊은 시절부터 이미 수많은 고난을 받아왔던 그의 표정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노년의 그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훈장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민족 사상가이자 평생 민주화운동의 어른이었던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이른바 조선시대 내내 ‘서북지방 출신’으로 천대를 받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런 점 때문에 오히려 평안도는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신사상의 유입이 가장 빨랐고, 러시아·청나라·일본의 각축장 속에서 일찍이 민족의식이 싹트고 발달하였다. 조만식, 안창호, 이승훈 같은 민족 지도자들이 탄생한 곳도, 홍범도 장군 같은 애국지사들이 나온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함석헌은 평양고보 시절 만세운동에 연루되어 중퇴를 하고, 다시 평양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에 들어갔는데, 바로 그 오산학교에서 좋은 스승들을 직접 만나 배움의 눈을 뜨게 되었다. 오산학교는 함석헌뿐만 아니라,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배출했는데 화가 이중섭, 시인 김소월 등이 이 학교 출신이고, 소설가 이광수, 염상섭 등이 교사를 지내기도 했다.
오산학교를 나온 함석헌은 당시 일본의 명문대학이었던 도쿄고등사범학교 문과로 유학을 떠났다. 그때 친구 김교신의 소개로 일본의 무교회주의자인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를 만나 사상적인 큰 영향을 받았다.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사로 있었는데, 태평양전쟁으로 더욱 광분하던 일제는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일본어 수업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아냈고, 경찰서에 잡아넣기도 했다.
함석헌이 본격적으로 감옥살이를 하기 시작한 것은 1942년 무렵 이른바 《성서조선》 사건이었다. 친구인 김두혁과 함께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성서조선》을 통해 민족운동을 벌이면서 조선총독부 정책에 항거하자, 일제 경찰은 이들을 감옥에 가두고 《성서조선》을 폐간시켰던 사건이었다. 함석헌은 그때 일 년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나왔다.
해방이 되자 함석헌은 어머니와 형제를 두고 단신으로 월남했다. 아버지가 한의사이자 지주라는 이유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쪽 역시 이승만 독재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고, 일제 강점기에서 그대로 내려온 관리들이 온갖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고 있었다.
민족 사상가로서, 또 민주주의를 바라는 열렬한 행동가로서 함석헌은 이때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958년 당시 장준하가 발행하던 《사상계》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을 처음 실었다. 이승만 독재를 비판하고 항거하는 내용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구류 20일의 처분을 받았다. 해방 조국에서 맞은 첫 번째 고난이었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박정희가 등장하자 그의 붓끝은 더욱 날카로워졌고, 조선일보에 통렬한 직설적 기고문을 실었다.
“박정희님. 내가 당신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라고도, 육군대장이라고도 부르지 않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 여러분은 여러 가지 잘못을 범했습니다. 첫째로 군사 쿠데타를 한 것이 잘못입니다. ...... 또 여러분은 아무 혁명이론이 없었습니다. 단지 손에 든 칼만을 믿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민중은 무력만으로는 얻지 못합니다. ...... 박정희님, 당신이 정말 나라를 사랑한다면 이제 남은 오직 하나의 길은 혁명공약을 깨끗이 지킬 태세를 민중 앞에 보여주는 일입니다.”
불같은 소리였고, 사자후 같은 일필이었다.
그 후 1963년 굴욕적인 한일회담이 진행되고 대학가에서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나자, 함석헌 역시 단식으로 동참하였다. 이때부터 민족운동, 민주화운동의 선봉이자 상징으로서 그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런 자기의 사상을 널리 펴고, 숨통이 막혀 제대로 말을 못하고 있던 뜻있는 학자들과 올바른 소리에 목말라 있던 독자들을 위해 잡지 《씨ᄋᆞᆯ의 소리》를 창간했다.
1970년에 창간된 《씨ᄋᆞᆯ의 소리》는 그야말로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함석헌 사상운동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그 ‘씨ᄋᆞᆯ’이라는 말속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된 그의 기독교 사상과 노자·장자의 동양 철학, 불교적 사유가 함축된 함석헌의 상징어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씨ᄋᆞᆯ’은 매우 깊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사용되었다.
그는 말했다.
“씨ᄋᆞᆯ이 뭐냐? 민중이 뭐냐? 곧 나다. 나대로 있는 사람이다. 모든 것을 벗은 사람. 곧 알 사람이다.”
그리고 또 말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듯이 씨ᄋᆞᆯ은 저를 깨고 나오는 날이 올 것입니다. 깨기 전은 씨ᄋᆞᆯ입니다. 깨면 전체입니다.”
그리고 또 말했다.
“글은 씨ᄋᆞᆯ의 것이다. 씨ᄋᆞᆯ에서 나오고 씨ᄋᆞᆯ로 돌아간다. 따라서 글은 씨ᄋᆞᆯ이 하는 소리요, 씨ᄋᆞᆯ이 들어라고 하는 소리다.”
그러니까 ‘씨ᄋᆞᆯ’이라는 말은, 어떤 때는 이 땅의 민초를 뜻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생명, 진리, 참나, 혹은 근원적 존재를 뜻하기도 했다.
그의 민중 중심주의나 민주주의 정신은 곧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깊은 사유에 바탕을 둔 것이기에 결코 흔들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실천적인 사상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지배, 피지배 속에 인간은 있을 수가 없다. ...... 사람은 저항하는 존재다. 저항하는 것이 곧 인간이다.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저항은 곧 나라는 존재가 스스로 나이기를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격적 자주성, 노예와 같은 인간에서 자유로운 인간으로의 도약을 위해서다.”
함석헌은 그 저항 정신을 박정희 군사정권 하에서 도도한 물결처럼 몸소 보여주었다. 박정희 독재를 연장하고자 획책했던 삼선개헌 반대투쟁부터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민주회복국민회의 등에 윤보선, 김대중, 김수환 추기경 등과 함께 기꺼이 참여했고, 징역과 구류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가 주간했던 《씨ᄋᆞᆯ의 소리》도 수없이 정간과 폐간, 복간을 거듭했다.
독재와의 투쟁에 언제나 앞자리에 서 있었지만 내면의 평화를 결코 잃지 않았던 그를 사람들은 때로 인도의 간디에 비유한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가 가장 독특했던 것은 언제나 단아했던 조선인다운 그의 외모에 못지않게 민족 사상의 뿌리를 이어온 그의 깊은 사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명동거리를 걷다 보면 하얀 한복 차림에 흰 수염을 날리며 걸어가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그의 말씀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