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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념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전사 시인 김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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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안에서 터져 나온 빛나는 시편들

1980년 5월 광주의 소식이 외신을 타고 온 세계로 전해질 무렵, 남민전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에 갇혀 있던 김남주도 이 소식을 들었다. 끔찍한 소식 앞에서 절망과 분노로 몸을 떨며 울던 그는 밥 먹는 것도 잊을 만큼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시를 쓰고 또 썼다.

“학살의 원흉이 지금/옥좌에 앉아 있다 /학살에 치를 떨며 들고 일어선 사람들은 지금 /죽어 잿더미로 쌓여 있거나/감옥에서 철창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그리고 바다 건너 저편 아메리카에서는 /학살의 원격조종자들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김남주 시 〈학살3〉 중에서)

어느 날, 김남주 시인의 동생 덕종은 교도소 측에서 마련한 ‘가족 초청 좌담회’에 갔다. 그는 형을 면회할 때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김남주는 음식을 먹으면서 자꾸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교도관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그는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재빨리 먹던 밥 속에 쑤셔 넣고는 낮고 빠른 목소리로 속삭였다.

“펜과 종이가 없어서 은박지에 칫솔이나 못으로 시를 썼다. 네가 잘 간직해라.”

덕종은 밥 속에 박힌 것을 얼른 집어서 주머니 속에 넣었다. 집에 돌아와 확인해 보니, 못과 칫솔을 날카롭게 갈아 담뱃갑이나 우유곽 은박지 또는 화장지에 꾹꾹 눌러 쓴 시들이 보였다. 칼날처럼 날카롭고 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시들을 보면서 종작없이 쿵쾅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덕종은 면회 갈 때마다 형으로부터 수많은 시를 건네받았다. 때로는 형이 외우고 있던 시를 급히 불러주는 대로 종이에 휘갈겨 써서 가져오기도 했다. 김남주의 시편들은 대학가의 ‘불온 유인물’이 되거나 시위대의 노랫말로 불리며 널리 퍼져 나갔고, 훗날 두 번째 시집 《나의 칼 나의 피》(인동, 1987)로 출간되었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선봉에 서서

김남주는 1946년 10월 16일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 535번지에서 태어났다. 해남중학교에 입학한 김남주는 세계사를 가르치던 하대성 선생님의 수업 내용에 감동해, 시대정신에 주목하면서 올곧은 이상주의를 실천하는 삶을 동경하게 되었다.

1964년 광주제일고등학교에 합격한 그는 입시 위주의 교육에 반대하여 이듬해 자퇴를 결행하며 자신의 소신을 행동으로 옮겼다. 1969년 대입 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학교 문리대 영문과에 입학한 그는 1970년 11월 13일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피복공장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라고 외치며 온몸에 휘발유를 붓고 분신한 사건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이 사건은 노동자를 착취하여 소수의 부유층을 살찌게 했던 박정희 정권의 추악함에 맞선 거대한 항거의 씨앗이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지식인과 노동자가 연대하여 투쟁해야 한다는 자각을 하게 된 김남주는 한일회담 반대와 교련반대운동, 3선개헌저지투쟁, 노동삼권 보장운동 등에 앞장섰다.

1972년에 김남주는 친구 이강과 더불어 유신헌법에 맞서 전국 최초의 지하신문 《함성》지를 제작하여 반독재 민주화의 선봉에 섰다. 경찰의 감시를 피해 서울에 온 김남주는 지하신문 이름을 《고발》로 바꾸어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다 이듬해 체포되었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혐의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은 그는 이 경험을 토대로

“총구가 나의 머리숲을 헤치는 순간/나의 양심은 혀가 되었다 /허공에서 헐떡거렸다 똥개가 되라면 /기꺼이 똥개가 되어 당신의 /똥구멍이라도 싹싹 핥아 주겠노라 /혓바닥을 내밀었다.” 〈진혼가 1〉

“공포야말로 인간의 본성을 캐내는 데 가장 좋은 무기이다”〈진혼가 3〉와 같은 절창을 뽑아냈다.

1973년 12월 28일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이강과 함께 석방된 김남주는 대학에서 제적된 뒤 낙향했다. 농사를 지으며 습작에 전념하던 그는 1974년 《창작과비평》지에 〈잿더미〉외 7편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등단했다.

이듬해에 김남주는 부모님을 설득해 광주에서 서점 ‘카프카’를 열었다. 후배들의 교육을 위해 만든 이 장소는 민청에서 풀려나온 징역장이들이 모여들던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했다.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한 김남주의 후배들과 박몽구, 이영진 등 장차 ‘5월시’ 동인의 모태가 되는 문인 그룹이 매일 드나들면서 먹고 자며 뒹굴던 이 서점은 한때 광주 문청들의 황금기를 이루었지만 얼마 안 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이즈음 모질지 못한 그의 성품을 눈여겨본 선배 박석무는 그의 아호를 ‘물봉’이라 지어 불렀으나, 김남주는 ‘그냥 물봉이 아니라 새벽 별인 물봉(昒蜂)’이라며 그럴듯한 해석을 내놓았다.

서점을 정리한 뒤 고향에 내려간 김남주는 농민운동가 정광훈, 윤기현과 더불어 훗날 한국기독교농민회의 모체가 되는 해남농민회를 결성했다. 광주에 올라와 소설가 황석영, 최권행, 김상윤 등과 더불어 민중문화연구소를 개설해 사회운동을 전개해 나가던 김남주는 또다시 수배되어 1978년 경찰의 검거망을 따돌리고 상경했다.

서울에 온 김남주는 ‘민주회복구속자협의회’를 통해 알게 된 박석률의 권유로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준비위원회’에 가입했다. 유신정권 하에서의 변혁운동은 철저히 비밀 지하조직이어야 한다는 신념 때문에 남민전 가입을 할 때 망설이지 않았다.

김남주는 이 조직에서 기관지 《민중의 소리》를 만들고 배포하는 일을 주로 했는데, 숙명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교직에 있던 박광숙도 이 일을 거들고 있었다. 남민전에서는 자금 조달의 일환으로 악덕 재벌의 재산을 탈취하기로 결정하여 전위 조직인 ‘혜성대’를 창설했다. 김남주는 혜성대의 대원으로서 유명 건설회사 회장의 집을 터는 이른바 ‘땅벌1호작전’ 공격조가 되었으나 수위들의 저항으로 실패한 뒤 검거되었다. 재판 결과 사형 선고를 받은 조직의 대표자 이재문은 감옥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죽었고, 조직원 신향식은 처형되었다. 안재구 등 5명은 무기징역, 김남주는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감옥 안에서 첫 시집 《진혼가》(청사, 1984), 제2시집 《나의 칼 나의 피》, 제3시집 《조국은 하나다》, 하이네, 브레히트, 네루다 번역 시선집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를 연달아 펴낸 김남주는 1988년 12월 21일 형집행정지로 투옥생활 9년 3개월 만에 출감했다. 그는 이듬해 1월 광주 문빈정사에서 박광숙과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토일’을 두었다.

이후, 김남주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 민족문학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옥중서한집 《산이라면 넘어주고 강이라면 건너주고》(삼천리, 1989), 시선집 《사랑의 무기》(창작과비평사, 1989), 제4시집 《솔직히 말하자》(풀빛, 1989), 제5시집 《사상의 거처》(창작과비평사, 1991), 제6시집 《이 좋은 세상에》(한길사, 1991) 등을 쉬지 않고 펴냈으며, 왕성한 창작열을 바탕으로 제9회 신동엽창작기금(1991), 제6회 단재상 문학부문(1992), 제3회 윤상원상(1993)을 두루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고문 후유증과 옥독(獄毒)을 견디던 김남주는 1994년 2월 13일 췌장암으로 투병하다 쓰러져 광주 망월동 5월 묘역에 안장되었다. 김남주는 오래 전 스스로 새벽 별임을 자처한 바와 같이,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리얼리스트이자 혁명가이며 전사 시인으로 높이 서서 우리 문학사를 찬란히 빛내고 있다.

글 박선욱(시인, 평전작가)
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시 〈누이야〉외 3편이 실천문학 제1회 신인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그때 이후》《다시 불러보는 벗들》《세상의 출구》《회색빛 베어지다》 등의 시집과 《채광석 평전》《김대중 평전》《황병기 평전》《윤이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