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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시작되어 광장으로 이어지다 - 한국여성단체연합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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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꼭 30년 전인 1987년, 거리에서 늘 마주치던 여성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한국여성단체연합 개편총회’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당시 '여성의전화' 강당에 모인 여성들은 바야흐로 여성운동의 구심체를 출범시키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름이 좀 특이했다. 행사의 이름이 창립총회가 아니라 개편총회였는데 그렇게 된 이유가 있었다.

톰보이를 입지 맙시다

1985년 4월 6일, 여성의류 톰보이를 만드는 성도섬유 회사 식당에서 여성 노동자 3명이 폭행을 당했다. 이들은 노동절 행사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회사 측에게 감시와 미행을 당했고, 급기야 해고되었는데, 이날 ‘부당해고 반대, 기본급 10만원 보장, 정식적인 노조활동’을 주장하다 폭행을 당한 것이다. 3명의 해고 노동자들은 이들의 복직운동을 지원하던 영등포산업선교회 유구영씨와 함께 여성평우회를 찾아갔다.  

여성평우회는 곧 10개 여성단체와 17개 여학생 대학연합과 함께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추진위원회를 결성했고, 톰보이 불매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던 이 브랜드의 매장 앞에는 톰보이를 입지도 사지도 말자는 피켓을 든 여성운동가와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이 시위로 여성운동가 박영숙, 이미경, 안상님과 해고노동자 박남희, 그리고 여대생 19명이 연행되었고, 이는 노동자와 여성운동가, 대학생의 연대를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이 연대투쟁을 바탕으로, 1986년 3월 여성대회에서 ‘여성단체연합 생존권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과거 여성운동이 민중여성들의 폭발적인 싸움을 통일적으로 수렴해내지 못했음을 자각하면서 전체 여성의 생존권 투쟁을 대변할 수 있는 조직적, 지속적 활동을 전개하고자”함을 알렸다.

여자 나이 25세면, 결혼하고 퇴직하는 나이

같은 해, 교통사고를 당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모 회사 무역부 직원 이경숙은 사고 보상액을 산정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정년은 25세이므로 그것을 기준으로 보상한다.’는 법원 판결을 받았다. 여성은 25세면 결혼을 하고, 결혼하면 퇴직하는 것이 당연하므로 20대 초반인 이경숙이 잃은 노동력의 가치는 근무기간 2~3년 정도에 해당하는 액수라는 것이다. 이경숙은 사고가 아니었다면 얼마든지 계속해서 일할 계획이었으므로 이 판결은 그에게 너무나 억울한 것이었다. 그는 여성단체를 찾아갔다.  여성의전화, 또하나의문화, 여성평우회 등 6개 단체가 이 부당한 판결에 맞서 ‘25세 여성조기정년제 철폐를 위한 여성단체연합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토론회 개최, 성명서 발표, 시위 등으로 조기정년제의 부당함을 널리 알리는 한편, 가사노동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여론을 만들어갔다.

수금원의 공갈협박 주저말고 신고하자

역시 1985년. 당시 KBS는 공영방송이었지만 광고방송을 했다. 그러니까 시청자는 시청료를 내면서 동시에 프로그램 중간에 나오는 광고도 봐야했다. 수금원이 강제로 시청료를 받아가는 과정에서 종종 시비가 붙곤 했다. 정권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홍보할 뿐 언론으로서의 제 역할을 하지 않는 KBS에 대한 불만이 집집마다 터질 것처럼 쌓여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6년 4월, 21개 여성 단체가 연대하여 대대적인 시청료 거부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KBS시청료폐지운동 여성단체연합'을 구심체로 하여 언론 민주화를 향한 시민들의 열망을 모아 전 국민적 언론운동으로 확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에 대한 성적고문을 규탄한다

1986년 6월 26일, 그날도 여성단체의 생존권대책위원회는 농성 중이었다.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여성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해고의 부당함을 알리는 농성을 3일째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데 5.3인천항쟁 구속자 가족에게서 이상한 소문을 전해 들었다. 부천경찰서에서 성고문이 있었다는 것이다. 인천교도소에 수감 중인 대학생이 위장취업 혐의로 잡혀와 조사 받던 중, 5.3사태 관련하여 심문을 받으며 끔찍한 성적 고문을 당했다는 것이다. 6월 30일, 생대위 대표가 인천 교도소를 방문하여 사건의 내용을 확인하였고, 재소자들이 이 사건 때문에 단식 중이며, 사건 당사자인 권인숙씨 역시 변호사 선임 등 인권단체와 여성단체의 도움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7월 9일, 여성단체들은 박영숙을 위원장으로 하여 ‘성고문대책위원회’를 만들고,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가톨릭 여성농민회,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 여성분과, 기독여민회, 또 하나의 문화, 민족미술협의회 여성분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여성위원회,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여성부, 민중불교운동연합 여성부, 여성의 전화, 여성평우회,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 여성분과, 주부아카데미협의회, 한국가톨릭농민회 여성부,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여성위원회,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여성위원회,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 여성부,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한국여신학자협의회 등 그동안 함께 활동하던 모든 진보적 여성운동 단체가 성고문대책위에 들어왔다.

여성단체연합을 시작하다

그러니까 그 일은 거리에서 시작된 것이다. 여성들은 톰보이 불매운동을 하는 매장 앞에서, 여성의 조기 퇴직을 규탄하는 거리에서, 시청료 거부 스티커를 붙이던 대문 앞에서 항상 만났다. 성고문에 항의하는 격렬한 시위 현장에서도 함께 최루탄을 맞았다. 

결국 생존권대책위원회, 25세 여성조기정년제 철폐를 위한 연합, KBS 시청료폐지운동, 성고문대책위원회 등 위원회들이 거리에서 광장에서 만날 때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조금씩 조금씩 만들어져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1987년 2월 18일, 21개 여성단체가 ‘한국여성단체연합’을 만들 때 그것은 새삼 ‘창립’ 이기 보다는, 그동안의 연대를 좀 더 조직적으로 ‘개편’했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이었다. 이날의 총회가 창립총회가 아니라 개편총회인 것은 그래서였다.

광장의 여자들

거리에서 시작된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조직된 직후 다시 거리로 나가 내내 그곳에서 살았다. 머리에 베수건을 쓰고 시대의 아들이 된 박종철의 죽음에 항거하는 시위에 나섰고,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국민의 손으로!” 라는 유인물을 들고 4.13 호헌철폐를 외치며 스크럼을 짰다. 살상무기가 된 최루탄을 추방하기 위해 시위 진압 경찰의 총구 하나하나에 꽃을 꽂는 퍼포먼스도 했다. 6월 항쟁 내내 그들은 시민과 여성과 사회적 약자와 함께 거리에 있었다. 

30년이 지난 2017년, 그들은 여전히 거리에 있다. 거리에서 연대의 손을 잡았던 선배들처럼, 그들도 광장에서 연대의 손을 잡고 “성평등은 민주주의의 완성”을 외치며 촛불을 들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거리의 연합이고 광장의 연합이며 투쟁의 연합이고 연대의 연합이었다.

글  정영훈 
자유기고가. 방송작가. 인터뷰 작가. (사)한국여성연구소 부소장. 여러 매체를 통해 인간과 세상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고 있다.「새길에서 만난 사람」「여성, 나를 말하다」「얼지마, 죽지마, 페미니즘」「한국여성운동구술기록사업」「우리 젊은 날- 구로공단이야기」등 다양한 글과 영상물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