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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지킨 푸른 눈의 양심들, 월요모임

"1970년대는 독재자 박정희가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만 바꿀 수 없는 시대였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함세웅 신부의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절대 법이었던 참으로 살벌한 암흑의 시기였다. 그러한 때 자신에게 가해지는 온갖 불이익과 모욕을 감수하면서 한국의 민주화와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헌신한 외국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월요모임(Monday Night Group)의 회원들이었다.

월요모임은 원래 1968년 2월 박정희 대통령 취임 축하 차 방한한 험프리 미 부통령을 만나서 한국에서 벌어지는 인권탄압을 비롯한 일들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장로교 선교사 허버트 화이트 (Herbert White)가 주도해 만든 그룹인 50인위원회(또는 50인모임)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한국의 독재 상황이 점차 심각해지면서 이들의 모임도 잦아지고 정례화 되었다. 매주 월요일 밤마다 개신교와 가톨릭 선교사들의 집에서 번갈아가며 모임을 가졌는데 보통 8명에서 10명 정도가, 어떨 땐 20명까지 모였다. 가톨릭 교도와 다양한 교파에 소속되어 있던 개신교인들인 그들은 미국, 캐나다, 호주, 독일 출신이었다. 

한국의 극악한 인권상황을 앞에 두고 교파와 상관없이 모인 그들은 당시 국내언론에는 거의 나오지 않던 한국의 정치와 인권문제를 논의하고,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외국의 언론기사를 해외로부터 받아서 한국 내에 배포했다. 한편, 정치범과 고문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각종 민주화 관련 선언문이나 편지 등의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비밀리에 한국 밖으로 내보냈다. 인터넷으로 전 세계가 실시간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오늘날엔 불필요한 일이 되었지만, 당시 이들은 한국 정보 당국의 검열을 피해 위험을 무릅쓰고 일일이 자료를 몸소 들고 도쿄나 미국 등으로 운반하기도했다.

이들의 활동을 통해 월요모임의 국제적 네트워크가 형성되면서, ‘한국지원네트워크’와 ‘한국인권을 위한 북미연합’과 같은 일본과 미국 내의 연대조직이 만들어졌다.  

외국의 언론은 이들로부터 취득한 한국의 인권 상황을 대서특필했고, 해외 여론을 가장 두려워하던 한국의 독재정권은 이를 두고 전전긍긍했다. 그들이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월요모임 회원 중 선교사이자 언론인이었던 짐 스탠츨(Jim Stentzel)은 박정희 정권은 오직 중앙정보부와 한 줌도 되지 않는 한국인들만 알 것이라 여겼던 민주인사들에 대한 체포와 고문사실을 일본과 미국의 언론이 어떻게 그렇게 신속하게 보도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짐 스탠츨은 1973년 김대중납치사건이 일어났을 때, 도쿄의 한 호텔에서 김대중과 인터뷰를 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의 인권 상황을 알게 된 이후 그의 삶은 전환점을 맞아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한국 정부의 손님으로서 국내 정치에 개입하는 일을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몇 외국 선교사들은 선악의 구분이 갈수록 분명해짐을 깨달았다. 광야에서 소수의 돌들이 소리치고 있는 것과도 같은 상황에서 더 이상 가만히 있거나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당시 민주화투쟁에 나섰던 기독교인들은 한국 기독교 내에서 소수파였으며, 종교로서의 기독교조차 한국 사회에서는 소수에 속였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의 행동은 모든 위험을 무릅쓴 일이었다. 미국인 선교사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 대신 독재정권을 지지하고 있는 자신들의 모국인 미국에 대해서도 항의했다. 

루이즈 모리스(Louise Morris)를 비롯한 월요모임 회원들은 인혁당 관련자들의 죽음에 항의하기 위해 국제법상 미국 영역인 미대사관 앞에서 ‘조용한 외교’라는 이름으로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는 미국에 대해 항의하는 시위를 했다. “이것이 당신들의 조용한 외교인가?”라는 피켓을 들고서 인혁당사건으로 전격 교수형을 당한 8인을 상징하는 검은 두건과 올가미를 자기 목에 두른 채 침묵시위를 벌였다. 그날의 시위 사진은 <타임>

인혁당사건이란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대표적인 국가폭력사건이었다. 유신정권은 “인혁당재건위가 공산주의 국가건설을 목적으로 학생들을 선동해 정부를 전복시키려 했다”고 발표하고 관련자 8명을 1975년 4월 9일 전격 처형했다. 

문정현, 함세웅, 이해동 등 몇몇의 신부와 목사, 그리고 이소선 여사 등 극소수 한국인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들의 신원(伸寃)을 감히 입에 담지도 못할 때, 월요모임은 용감하게도 그 유가족들과 함께 했다. 월요모임 회원들은 오직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그들의 곁을 지켰다.

1975년 4월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에 대해 진 매튜스(Gene Matthews)를 비롯한 월요모임 회원들에게는 인혁당 사형선고 다음날 바로 집행을 하고 시신 5구를 강제로 탈취하여 화장한 일련의 사건이 발생했던 그 한 주는 생애에서 가장 끔찍한 날들이 되었다. 어느 누구도 정부가 그렇게 처형할 정도로 뻔뻔스러울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근엄한 판사들이 여덟 사람에게 사형선고를, 다른 6명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는 데는 불과 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피고인들도 그 변호인들도 법정에 출두하지 않은 채였다. 불의가 가슴을 태워 구멍을 내버렸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우는 것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기막힌 상황에서 월요모임 회원들은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오히려 더욱 열심히 활동했다. 메리언 킴(Marion Kim)은 월요모임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는데, 그녀는 김관석 목사의 지시로 한국 인권상황에 관한 비밀보고서를 작성하여 필름에 담아 미국으로 몰래 유출했다. 그것은 후일 ‘한국인권에 대한 미의회 청문회’의 공식보고서의 일부로 미 연방의회 의사록에 채택되었고, 1979년 6월 지미 카터 대통령이 한국을 순방하는 동안 박정희 대통령에게 언급한 한국인권보고서의 토대가 되었다.

월요모임의 회장이자 여성 목회자인 린다 존스(Linda Jones)가 정리하여 극비리에 일본으로 보냈던 한국의 인권 자료들은 일본의 진보적 월간지 <세카이>(世界)에 '한국으로부터의 편지 - T.K생' 이란 제목으로 매달 연재되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린다 존스는 미국으로 입양되어 가는 아기들의 기저귀를 기내에서 갈아주는 수고를 대가로 싼 값에 비행기를 탔는데, 마침 경유지 일본에 비행기가 잠시 머무는 틈을 타서 한국 기독교 인권 지도자들이 작성한 각종 문서와 성명서 편지들을 환승 라운지에서 공항 방문객을 위장한 김용복 박사에게 전달하는 극적인 장면도 연출해야 했다. 촌각을 다투는 짧은 시간에 얼굴도 모르는 이를 ‘접선’하여 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그녀에게 그 시간들은 영원처럼 길었다. 하지만 그녀는 기적처럼 그 일을 해냈다.

그녀는 또 긴급조치 아래 쫓기고 있던 한국기독학생총연맹 소속 학생들이 숨어 지낼 수 있도록 기꺼이 자신의 방을 내주기도 했다. 당시의 억압적인 한국 정치 상황에서 그녀의 행동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많은 월요모임 회원들처럼 린다 존스는 고국에 돌아간 이후에도 시카고에서 아시아교회인권위원회를 만들어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지속적으로 지원활동을 했다. 월요모임 회원들의 해외에서의 활동은 5.18광주항쟁 이후 숨죽이던 상황에서도 계속되었다. 

린다 존스는 2003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개최한 '해외민주인사 초청사업'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였고, 다음 해에 그녀가 수집하고 정리한 한국 활동 관련 자료를 사업회에 기증하였다.

글  어수갑
독일 유학 시절 동포운동단체인 재유럽민족민주운동협의회 총무부장과 한/독판 월간 <민주조국>/ 편집인 거쳐 귀국 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석연구원 등 역임. 저서로는 <베를린에서 18년 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휴머니스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