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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노동운동의 대모 - 조화순 목사

“따르르릉, 따르르릉~~”

1972년 5월 10일,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이하 인천산선)의 사무실에 전화벨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네, 조화순입니다.”

“목사님! 이겼어요. 우리가 이겼어요. 주길자 언니가 위원장에 당선됐어요.”

“됐다, 이제 됐어!! 그래, 우리가 이긴다고 그랬잖아.”

전화 건너편의 목소리는 감격에 겨워 울먹였고, 주변에서 환호성 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흘러들었다. 당시 인천산선의 총무였던 조화순 목사는 드디어 오랫동안 계획했던 일이 성사되었다는 안도감과 이제 시작이라는 비장함에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이날은 동일방직 노동조합 역사상 최초로 여성지부장이 탄생된 날이면서 동시에 한국 노동조합사상 최초로 위원장에 여자가 당선된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이 역사적인 순간이 오기까지는 조화순 목사의 역할이 컸다. 

조화순 목사가 산업선교회 일을 시작한 해는 1966년이었다.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두 번째 파송지인 시흥 달월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조지 오글 목사와 조승혁 목사가 찾아와 산업선교회 일을 제안했다. 산업선교라는 말조차 낯설어 선뜻 받아들이지 못 하고 있는데, 여성노동자가 많은 그곳에 여성 목회자도 없고, 게다가 노동자와 똑같이 노동을 해야 하는 까닭에 지원자가 없다는 말을 듣자 그는 바로 수락을 하고 짐을 쌌다.

그렇게 인천으로 와서 6개월 동안 현장 노동체험을 해야 하는 규정에 따라 들어간 공장이 동일방직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면서도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여성노동자의 현실을 뼈아프게 체험하고, 어쭙잖게 노동자를 가르치려 드는 목회자가 아니라 스스로 노동자가 되고자 애썼다. 그곳에서 가난한 사람들, 낮은 사람들, 천한 사람들, 그들 속에서 활동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6개월의 현장 훈련기간이 끝나자 조화순 목사는 본격적으로 동일방직을 비롯한 주변 공장의 여성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성경 공부, 뜨개질, 꽃꽂이 등의 소모임을 진행하였다. 그렇게 30여 개의 모임을 만들어 여성노동자들의 의식을 고양시키며 응집력을 키워나갔다. 그 결과 동일방직뿐만 아니라 반도상사 등 타 회사에서도 여성지부장이 당선되었고 노동조합을 새롭게 결성하는 등 인천지역 노동운동의 판을 새롭게 짜나가기 시작했다. 

조화순 목사는 여성이라고 우습게보고 회사 편에 서서 폭력을 휘두르는 남성노동자들에 분노가 일었다. 어릴 적부터 워낙 여성으로서의 자각과 독립심이 강해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대우를 받는 걸 거부했던 그였다. 1972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인천산선의 총무가 되었을 때 자신의 월급이 남성 동료들의 반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적잖이 당혹스러워 했다. 희생과 봉사를 결단하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진보적이라 자처하는 그의 동료들조차 차별을 당연히 여기고, 돈에 대한 문제 제기 자체를 경원시 하는 데는 참을 수 없었다. 결국 미미한 정도의 월급인상으로 마무리된 그 일은 조목사로 하여금 여성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천대를 받는 여성노동자들의 처지와 자신도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되는 사건이 되었다. 

1978년 2월 21일, 아직 새벽녘의 여명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의 차가운 공기를 뚫고 전화벨소리가 날카롭게 울려댔다. 잠결이었지만 눈이 번쩍 떠진 조목사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날은 동일방직 노조가 회사 측과 반대파 조직들의 협박 속에 3대 지부장 선거를 치르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목사님, 큰일 났어요. 남자들이 똥을 퍼 와서 우리한테 뿌리고 있어요. 어떡해요!”

전화를 건 여성조합원은 그 말만을 남기고 통곡하며 울부짖었다. 전화기 너머 수많은 여성조합원들의 울음소리가 낭자했다. 

“무슨 일이야?” 

조목사는 그 상황이 이해가 안됐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똥을 뿌릴 수 있다는 말인가. 

“반대파 남자들이 떼로 몰려와서 투표함도 다 부숴버리고 투표를 하려고 모인 조합원들한테 똥을 뿌리고 쫒아 다니며 똥을 먹이고 난리가 났어요.”

지옥의 모습이 이럴까? 그건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일어날 수도,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조화순은 전화를 끊고 사방으로 연락을 했다. 

“큰일 났습니다. 빨리 와주세요. 회사 놈들이 조합원들에게 똥을 먹이고 있어요. 똥을 요. 하나님, 어쩌면 좋아요.”

조목사의 눈에 어느새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서둘러 택시를 타고 동일방직 앞으로 갔지만 정문에서 막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중에야 만나게 된 여성조합원들은 조목사를 보자 다시 통곡에 통곡을 거듭했다. 천인공노할 이 사건은 노동운동사에 길이 남았지만 결국 동일방직의 여성조합원 124명은 길거리로 내쫒기고 말았다. 이후 부산에서 동일방직 사태의 실상을 알리는 강연을 했다는 이유로 조화순 목사는 감옥에 갇혀 1년여 만에 풀려나왔다. 스스로가 노동자가 되어 온갖 차별을 받아가며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동안, 그도 마흔 살을 훌쩍 넘겨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1934년 인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중학생이던 어느 날 심훈의 ‘상록수’를 읽고 농촌 계몽운동을 결심했던 것이 그가 걸어온 남다른 삶의 시작이었다.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가 된 이후로 가지지 못한 자의 입장에서, 여성의 입장에서 성서를 읽으며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다. ‘상록수’의 여주인공에 감화를 받아 자신도 결혼하지 않을 거라 결심한대로 혼자 사는 삶을 선택했다. 사실 누구를 만나 연애감정을 키울 여유도 없이 투쟁 속에 살아온 세월이었다. 오빠와 남동생의 학비를 대느라 결혼 시기도 놓친 채 살아가는 여성노동자들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사실 그 시절엔 조화순 목사뿐만 아니라 여성 활동가들 중에는 노동운동과 결혼을 했다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투쟁의 현장에서 청춘을 보낸 사람들이 있었다.

목사인 그에게 노동운동은 선교활동이었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선동죄를 추궁당할 때도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죄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죄목과 다르지 않아 스스로 ‘선동죄’를 저질렀음을 시인했다. 그리고 목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였노라며 당당히 맞섰다. 조목사의 당당함에는 수사관도 감화되어 사과를 할 정도였다. 

그는 스스로 여성운동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성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투쟁뿐만 아니라 기독교대한감리회 전국여교역자회장을 역임하기도 하면서 결혼한 여자는 목회를 할 수 없고, 목사 안수도 받을 수 없도록 한 규정을 바꿔놓았다. 그리고 1990년부터 2년간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를 맡아 “여성성이란 함께 안아주고 끌어주는 따뜻한 마음과 불의에 당당하게 맞서는 것”임을 강조하며 여성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글  박민나(자유기고가) 
'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여성노동운동가 8명의 이야기' 출간(2004년 )과 한국여성노동자회 계간지 '일하는여성'에 '박민나의 삶이야기'를 연재하면서 많은 여성노동자들을 만나 글로 옮기는 일을 하였다. '여성의 삶과 문화' 공저, 한겨레신문 '길을 찾아서 이총각 편' 연재, 뮤지컬 메노포즈 번안 등 다양한 글쓰기를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