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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분서갱유 - 한국민중사사건
역사의 서술은 당대의 주인을 누구로 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국가권력과 위정자, 사회의 시스템이 절대 다수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극소수층을 위한 것이냐가 언제나 문제이다. 1987년에 일어났던 <한국민중사사건>도 따지고 보면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고 하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부인하고픈 독재자와 그에 빌붙은 집단의 용렬한 만용에서 발단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입장과 다른 생각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여론을 통제하며, 이에 반발하는 이들을 가두고 언로에 재갈을 물리는 게 독재 권력의 특성이다. 자신들이 하는 일에 국민적 정당성이 약하다보니 국민의 입과 눈과 귀를 두려워한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특성이 비판의 자유로운 소통 구조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나 히틀러의 입이 되었던 괴벨스가 주도한 반독일적 서적의 분서, 또는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처럼 인류 사상의 자유로운 알갱이들을 불태움으로써 소통으로부터 불통과 단절을 시도한다. 에리히 케스트너의 <날으는 교실>과 프로이드의 <꿈의 분석>, 그리고 마르크스의 <자본론>, 공자의 <논어>가 독재의 광란에 화형을 당했다. 그런데 책을 태우는 행위보다 더한 게 출판을 금지하고 서점에 깔린 책을 회수하는 일로도 모자라 출판 관계자나 저자를 구속하는 일이다. 대한민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1987년 2월 12일 <한국민중사> 1, 2를 발간한 도서출판 <풀빛>의 대표 나병식 사장이 연행되었다. 풀빛출판사 사무실에 서울지검 수사관들이 들이닥쳐 수색영장도 없이 사무실을 수색하여 250여 권에 달하는 책을 압수하고 보안유지라는 미명하에 전화선을 절단했다. 심지어 이 사건과는 무관한 방문객이었던 박인배까지 연행하고, 출판사의 거래처인 삼광인쇄소 대표마저 연행했다. 연행된 8명은 모두 이미 출간된 <한국민중사>에 대해 집중적인 조사를 받았다. 2월 14일 나병식 사장은 국가보안법 이적표현물 제작혐의로 구속되었다.
검찰은 <한국민중사>의 내용 중 '역사의 원동력은 인간의 생산 활동이었고, 그것의 담당자는 생산대중이었다'는 부분과 '현재 한국사회에서 민중이란 신식민지하에서 민족해방의 주체로서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하여 농민, 도시빈민, 진보적 지식인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는 부분을 문제 삼았다. 검찰은 "저자들은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사관에 입각해 있다. 이것은 북한의 근로인민 대중을 역사의 주체로 삼는 관점과 일치한다. 따라서 반국가 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북한에 동조하는 내용의 책을 출판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기막힌 비약과 견강부회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또한 <한국민중사>는 해방 이후의 외세의 등장과 분단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고, 5.16쿠데타 이후 등장한 군부독재와 예속자본주의의 팽창의 경과를 밝히며, 10월유신에서 5.18광주항쟁까지를 일맥상통한 흐름으로 파악하고 있다. 역사는 지배권력의 필요에 따라 왜곡되고 은폐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동시대 사람들과 더불어 공유하고 겸허한 자세로 정면 응시하여 기술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 올바른 사관 정립이 중요하고 말한다.
<한국민중사> 책머리에 "우리는 '과거를 다루는' 역사가 부단히 지금의 현실과 만나고 있는 것을 보아왔다. ... ... 1980년대의 현실이 긴장되고 엄숙한 것일수록 정확히 과거로 눈을 돌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역설 아닌 역설도 가능하다." 며 이어 서설에서 "역사는 단순히 과거 사실을 독립적으로 다루는 것은 아니다. 어제와 내일이 없는 오늘이 있을 수 없듯이 현재나 미래와 무관한 과거의 역사란 있을 수 없다. 현실은 지금까지 축적된 과거의 결과물이며, 역사는 바로 현실 속에 생동하는 과거의 집적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재판이 진행되던 과정에 6월민주항쟁, 6.29선언 등이 발생하였다. 늘상 힘 있는 쪽의 눈치나 보던 재판부의 태도가 바뀔 수밖에 없었다. 나병식은 같은 해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