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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방직사건 - “똥을 먹고 살 순 없다”

1. 공장의 불빛

섭씨 40도. 현장은 숨통을 틀어막는 습기와 열기로 가득했다. 대형 방적기들이 늘어선 작업장에는 뽀얀 솜먼지가 가득한 가운데, 콧등까지 솜먼지를 뒤집어 쓴 여성노동자들은 제각기 맡은 기계에 매달려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 땀에 젖은 노동자들의 눈꺼풀은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대개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의 나이였다. 한창 생기가 넘쳐야 할 얼굴들은 부족한 잠으로 인한 피로와 햇볕 부족으로 노랗게 시들어 있었다. 탈수증으로 기절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갖다 놓은 소금을 먹어봐도 졸음은 가시지 않았다.

졸음보다 더 한 고통은 발가락의 무좀이었다. 한증막 같은 곳에서 운동화를 신고 하루 열댓 시간씩 일해야 하는 모두의 직업병과도 같았다. 도저히 가려움을 참을 수 없으면 운동화를 벗고 맨발을 시멘트바닥에 북북 문질러댔다. 쾌감과 함께 또 다른 통증이 바늘로 찌르듯 다리를 타고 올라오기 마련이었다. 발가락 피부가 벗겨져 피가 벌겋게 시멘트 바닥에 묻어났다. 가려움은 발만이 아니었다. 땀띠가 등과 목덜미를 넘어 얼굴까지 타고 올라간 사람이 흔했다.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려고 고향을 떠나 올 때만해도 사회가 이런 곳인 줄은 몰랐을 것이었다. 몇 년째 주말도 휴일도 없이 하루 열댓 시간씩 일한 결과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폐병에 걸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솜먼지에 폐가 망가져 병원을 드나들다가 아무 보상도 없이 그만 둔 친구들이 숫했다.

“야! 정신 차려!”

선채로 머리를 떨군 채 졸던 여성노동자 하나가 퍼뜩 놀라 정신을 차렸다. 팔뚝이 아렸다. 옆 기계의 친구가 다가와 꼬집은 탓이었다. 야간작업 시간이면 서로 서로 조는 친구를 꼬집어주는 게 의리였다.

“니들 뭐하는 거야? 빨리 밥 먹고 와!”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조장의 고함이 들려 왔다. 정해진 식사 시간은 30분, 그러나 20분만에 돌아오지 않으면 욕지거리가 쏟아졌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현장을 나왔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는 황색 가로등 불빛들이 밤안개 사이로 둥그런 원들을 그리고 있었다. 밥을 먹으러 가는 이 짧은 시간이 11시간의 야간작업 중 유일하게 밖에 나오는 시간이었다. 공단의 매캐한 공기조차도, 섭씨 40도 열기에 지쳤던 그녀에게는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아주 잠깐의 행복이었다. 여기저기 현장에서 튀어 나온 이들이 식당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그녀도 무거운 다리에 힘을 주어 달리기 시작했다.

2. 눈물의 알몸시위 

인천 바닷가 만석동에 자리 잡은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삶은 그들의 땀을 윤활유 삼아 돌아가는 기계만도 못했다. 방직공장으로는 국내 5위의 규모를 자랑하던 이 회사는 1971년 수출 5백만 달러를 달성하고 수 년 간 국내 최대 매출 이익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어느 회사보다도 가혹한 노동착취가 있었다. 특히 1,300여 노동자 중 1천 명이 넘는 여성노동자의 처지는 노예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노동자는 기계도 노예도 아니었다. 1972년 5월,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회사의 대리인 노릇을 해온 어용 집행부를 물리치고 민주적 집행부를 세우는 데 성공한다. 초대지부장은 주길자로, 전국섬유노조 최초의 여성 지부장이 되었다.

새 집행부는 식사 시간 확보, 남녀 임금차별의 철폐, 환풍기 설치, 생리휴가 등을 쟁취하면서 조합원들의 지지를 다져나갔다. 이에 영향을 받은 원풍모방, 반도상사, 콘트롤데이타, YH무역 등에서도 잇달아 민주노조가 세워져 독재정권의 눈엣가시가 되었다.

벼르고 벼르던 회사는 민주노조 4년차인 1976년, 남자직원들을 사주해 공포분위기 속에서 선거를 실시해 대의원으로 대거 진출시킨 다음 여성들로 이뤄진 집행부를 몰아내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이 공작은 중앙정보부 노사문제 담당자들의 지휘 아래 진행되었다.

그들은 먼저 민주노조 측에서 개최한 대의원대회에 집단으로 불참해 4차례나 무산시킨 다음, 7월 23일에는 자파 대의원 24명만으로 기숙사 강당 문을 걸어 잠그고 대의원대회를 개최했다. 경찰은 미리 노조지부장과 총무를 연행해 버렸고 회사는 기숙사 출입문에 대못을 박아 노동자들의 항의를 봉쇄한 상태였다.

분개한 노동자들은 기숙사 유리창을 깨고 이층에서 뛰어내리거나 출입문을 부수고 달려 나와 파업농성에 돌입했다. 회사는 정문을 봉쇄해 음식물의 공급을 막고 화장실까지 못을 박아 버렸으나 8백여 명의 농성대열은 흩어지지 않았다.

농성 사흘째인 1976년 7월 25일 오후, 마침내 경찰의 강제해산이 시작되었다. 방석복과 곤봉으로 무장한 전투경찰대가 시퍼런 경찰버스를 앞세워 회사 안으로 진입해 들어왔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겁에 질린 일부 여성들은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이때 누군가 다급히 외쳤다.

“벗고 있는 여자 몸엔 경찰 아니라 그 누구도 손 못 댄대!”

여성들은 앞 다투어 팬티와 브라자만 남긴 채 옷을 벗기 시작했다. 감당할 수 없는 공포 앞에서 최후의 저항 수단으로 수치심도 두려움도 떨쳐버린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며칠째 갈아입지 못한 속옷들은 꼬질꼬질 더러웠지만 부끄러움이 앞서기에는 공포와 분노가 너무 컸다.

수백 명의 여성들이 반나체로 팔짱을 끼고 똘똘 뭉치자 당황한 경찰은 대의원 이상의 주동자만 내놓으면 다른 사람은 귀가시키겠다고 설득했다.

“주동자가 따로 없어요. 우리 모두가 주동자예요!”

“무릎을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를 원한다!”

경찰은 회사 간부들의 손가락질에 따라 노조간부들을 무자비하게 끌어내기 시작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매달리는 이들에게는 닥치는 대로 곤봉을 휘두르고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고 갔다. 결국 72명이 버스에 태워져 연행되었다. 끝까지 남은 2백여 노동자들은 경찰차 앞에 몸을 던져 연행을 저지하기도 하고, 달리는 버스를 뒤쫓아 동부경찰서까지 몰려가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함성도 울부짖음도 사라진 노조사무실 앞에는 찢어진 푸른 작업복들과 운동화, 작업모, 음료수병, 머리핀들만이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다.

3. 중앙정보부가 지휘한 똥물 세례

젊은 여성노동자들의 처절한 알몸시위는 어느 언론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인물을 통해 민주화세력에게 널리 퍼져나가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도 현장 조합원들의 단결은 이 사건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민주파는 이후 거듭되는 회사와 어용세력에 맞서 치열하게 싸운 끝에 이듬해인 1977년 3월 새 집행부를 탄생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번에도 지부장은 여성인 이총각이 당선되었다.

군사정부와 회사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들은 민주파 지도부가 인천도시산업선교회, 가톨릭노동청년회 등의 종교계 노동단체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이유로 빨갱이로 몰아갔다. 이들 종교단체들이 노동운동에 상당한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공산주의와는 전혀 상반되는 보수적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정부는 대대적인 언론보도를 통해 이들을 공산주의자들로 매도하여 조합원을 분열시키려 들었다. 그래도 조합원들이 흔들리지 않자 그들은 최후의 방법을 선택했다.

1978년 2월 21일 새벽 6시 경, 노조사무실에는 대다수의 집행부와 대의원들이 모여 있었다. 대의원선거를 치르기 위해 밤을 새어 투표함과 용지를 준비하고 곧 퇴근할 야간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빨갱이 년들아!”

갑자기 5,6명의 남자들이 방화수통을 들고 고함을 치며 사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차가운 겨울바람과 함께 지독한 똥냄새가 숨을 틀어막았다. 방화수통에는 방금 화장실에서 퍼온 똥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남자들은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똥을 퍼서 닥치는 대로 여성들의 얼굴과 몸에 뿌리고 바르기 시작했다.

“아악!”

여성들의 비명 속에 그들은 똥을 젖가슴에 집어넣고 입에까지 밀어 넣었다. 같은 여성이지만 회사의 사주를 받아 반대파를 이끌어온 자들은 신이 나서 뛰어다니며 ‘저 년에게 먹여라’고 고함을 지르며 부추겼다.

노조사무실은 바닥이며 집기 할 것 없이 온통 똥에 범벅이 되었다. 광분한 남자들은 투표하기 위해 모였던 여성들에게도 닥치는 대로 똥을 먹이고 뒤집어씌우다 못해 탈의실과 기숙사까지 쫓아가 똥을 뿌려댔다. 

광란의 현장에는 정사복 경찰도 여러 명 와 있었지만 재미있다는 듯 구경만 했다. 다급한 여성들이 달려가 구해달라고 호소하자 경찰 하나가 쏘아붙였다.

“야! 이 썅년아! 가만 있어! 이따가 말릴 거야!”

상상 못 할 혐오스런 사건으로 기선을 잡은 회사 측은 무력으로 노조사무실을 점거하고 124명의 노동자를 해고시킴으로서 노동조합을 완전히 어용화 시키는데 성공한다. 노동부는 나아가 이들 해고자들을 블랙리스트로 만들어 어느 사업장에도 취직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기나긴 복직투쟁이 시작되었다. 끔찍한 가난과 냉대 속에서도 이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헤아릴 수 없는 농성과 시위가 계속되었고, 마침내 법원은 2004년 해고자 전원에 대한 복직판결을 내린다. 사건 후 26년만이었다. 

똥물 사건을 포함한 모든 노조탄압이 중앙정보부의 기획이었다는 사실은 20여년이 지난 2001년 중앙정보부 경기도지부 노사문제 담당관의 양심선언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라 법원은 동일방직 노조탄압이 국가기관에 의해 지휘되었음을 인정해 해고자들에 대해 국가로 하여금 일인당 2천만 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한다. 2011년의 일이었다.


글 안재성

1989년 장편소설 <파업>으로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이후 대표작으로 <사랑의 조건>, <황금이삭>, <경성트로이카>, <연안행>, 등의 장편소설과 <이현상 평전>, <박헌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