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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시청료거부운동-신군부에 도전한 국민 저항운동

1. 전북 완주에서 처음 시작된 KBS시청료거부운동

“KBS 시청료는 여당인 민정당과 정부만 내라!”

1984년 4월 28일, 전북 완주에서 KBS시청료거부운동의 구호가 터져 나왔다. 한국가톨릭농민회 전주교구연합회 완주협의회와 천주교 전주교구 고산 천주교회가 공동으로 연대하여 시청료거부운동의 물꼬를 텄다. 이는 광주학살 이후 공포정치로 일관해온 신군부에 대한 최초의 국민저항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에 불을 댕기는 불쏘시개가 되었다.

언로(言路)가 막히면 모든 것이 암흑으로 뒤덮인다. 1980년대가 그랬다. 1980년 5월 광주를 피로 물들인 신군부는 그해 11월 언론기관 통폐합을 단행했다. 이때 한꺼번에 해직된 기자가 무려 1천3백여 명에 달했다. 이것이 바로 ‘1980년 언론 대학살’이다. 신군부는 12월에는 언론기본법을 제정하여 언론 통제의 수단을 확보했다. 모든 언론에 ‘보도지침’을 내려 재갈을 물리는 것이 그 수단이었다.

5공 군사독재정권은 언론 통제에 이어 대중가요 통제를 실시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오월의 노래〉 같은 운동권 노래는 당연히 금지곡이었다. 부르다가 잡히면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아침이슬〉 〈고래사냥〉 같은 대중가요조차 묶어놓았다. 국민들은 심장 없는 허수아비가 되어 갔다. 방송에서는 매일같이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아아 우리 대한민국……아아 영원토록 사랑하리라”라는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참으로 암울한 시절이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모든 뉴스의 첫머리를 전두환의 얼굴로 장식했다. 저녁 9시를 알리는 시보가 ‘땡’ 하고 울리면 앵커가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로 시작하는 뉴스를 내보냈다. 사람들은 이 지긋지긋한 뉴스를 ‘땡전뉴스’라 부르며 조롱했다. 그는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처럼 잔인하고 사악한 존재였다. 시민들은 학살의 충격과 반민주적인 일상의 우울함을 찢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겨울공화국의 칼바람은 더욱더 날을 세운 채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공영방송인 KBS는 전두환의 비위를 맞추는 충견 역할을 앞장서서 해냈다. 모든 뉴스는 보도지침에 의해 통제되었다. 관제 왜곡보도였다. 5공 군사정부는 정통성 없는 체제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3S(스포츠, 스크린, 섹스) 우민화 정책을 시도했다. 1981년부터 컬러텔레비전 방송이 실시되었다. 이때 500원이던 시청료가 2,500원으로 책정되어 무려 5배나 뛰어올랐다. 이뿐만 아니라, 그해 3월부터는 KBS에서 광고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건전한 시사교양프로그램은 실종되었고, 방송에서는 여성을 공공연히 상품화하는 등 퇴폐적이고 저급한 내용들이 범람했다. 공영방송이 이처럼 전두환의 주구 노릇만 일삼자 국민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이 무렵 터져 나온 것이 전북 완주에서 일어난 KBS시청료거부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견고한 성에 도전한 일대 사건이었다.

2. 봇물처럼 터진 KBS 시청료 거부운동

1986년 2월 중순, 전국의 가정에서는 시청자들이 한전 직원들을 상대로 실랑이를 벌이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집에는 TV가 없으니 시청료를 없애 주세요.”

“실례지만, 댁에 TV가 없습니까?”

“없습니다. 어용 방송 보기 싫어서 TV를 부셨습니다.”

“이사를 새로 오셨습니까?”

“아니오.”

“TV는 언제부터 없었습니까?

“지난 달부터 없애버렸습니다. 그러니, 이번 달부터는 시청료를 납부할 수 없습니다.”

이 같은 북새통은 그해 1월 20일 ‘KBS-TV시청료거부기독교 범국민운동본부’(본부장 김지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장)가 발족된 이후부터 전국의 가정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상사가 되었다.

2월 14일, 운동본부는 KBS시청료거부운동을 효과적으로 벌이기 위해 스티커 5만 장을 제작해 배포했다. 스터커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었다.

“KBS-TV를 보지 않습니다.”

운동본부는 스티커 외에도 홍보 유인물 1만 부를 따로 제작해 시민들에게 나눠주었다. 홍보 유인물에는 전두환 정권의 우민화 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KBS-TV가 1985년의 2·12 국회의원 선거 보도의 경우에서처럼 여당인 민정당의 홍보 · 선전매체로 전락하여 대중의 정치의식 잠재우기로 일관하고 있다.”

시청료 거부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호응은 폭발적이었다. 운동본부의 자원봉사자들은 거리에서 시민들에게 스티커와 홍보 유인물을 배포했고, 시민들은 저마다 집에 돌아가 대문 앞에 스티커를 붙였다. 집집마다 스티커가 붙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당시 시청료가 체납된 경우에는 세무서장에 의뢰해 강제 징수 조치를 할 수 있었다. 또, 문공부장관 승인을 받은 경우에는 KBS 직원이 직접 징수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TV 시청료를 강제 징수하기 위한 방안으로 재산까지 압류할 수 있도록 규정해 놓고 있었다. 하지만 ‘시청료를 거부합니다’란 스티커가 집집마다 붙게 되면서부터 공권력이 힘을 못 쓰게 되었다.

기독교가 중심이 된 KBS시청료거부운동에 야당이 동참하면서 이 운동은 각계각층의 폭넓은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3월 25일, 민추협의 공동의장인 김대중과 김영삼이 공동 명의로 〈회직자(會職者)에게 드리는 서신〉이라는 제목의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정권의 여론 조작에 이용당하여 언론의 본질을 망각한 채 왜곡, 편파 보도를 일삼는 KBS, MBC TV를 규탄하며, TV 시청료납부거부운동이 범국민운동으로 확산되도록 하기 위하여 서신과 전화를 통한 캠페인의 전개를 당부합니다.”

공개서한의 효력은 곧바로 나타났다. 그로부터 보름쯤 지난 4월 8일, 신민당 정무회의에서는 ‘KBS 뉴스 안 보기’를 당론으로 채택했다. 신민당은 당론 채택을 뒷받침하는 행동강령에 따라 즉각 시청료 납부 거부운동 및 뉴스 안보기 운동을 국민운동으로 확산시킬 것을 결의했다.

KBS시청료거부운동이 전국에 들불처럼 번져 나가자 전두환 정부는 “시청료 거부운동은 정권 안보를 해치는 반체제적 공세다.”라면서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5공 정권은 서둘러 ‘KBS 운영 개선 방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개선책이 아니라 시늉에 지나지 않았다. 신군부가 어떻게 언론 대학살을 감행했는지 잘 아는 시민들은 전두환이 제시한 미봉책에 속지 않고 꿋꿋하게 KBS시청료거부운동을 지속해 나갔다.

“언론은 권력의 응원단일 수 없다.”

1986년 4월 5일자 《동아일보》 김중배 칼럼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 문장은 독자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 웅장한 선언이었다. 또한, KBS시청료거부운동을 심정적으로 지원하는 천군만마의 함성이었다. 이틀 후인 4월 7일자 《동아일보》에는 〈교회 ․ 성당 등 중심 시청료 거부 확산〉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KBS TV 시청료 거부운동이 교회와 성당 등을 중심으로 크게 확산되고 있다. 일요일인 6일 서울 시내 일부 교회에서 목사 등 교직자들은 설교나 강론을 통해 시청료거부운동의 당위성과 구체적인 방법 등에 관해 설명, 적극 참여를 권장했으며 시청료 거부 사례를 소개하는 교회도 있었다.

또 이날 일부 성당에서도 신부들이 강론 등을 통해 시청료 거부 운동의 정당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이날 많은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온 신도들은 줄 지어 서서 시청료 거부 스티커를 받아가기도 했다.”

이 기사 바로 위에는 ‘스티커 5만 장 추가 배부 또 20여 만 장을 만들기로’라는 중간 제목이 시민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5월 15일, 기독교방송과의 대담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시청료 거부운동에 대한 공개 지지 발언을 했다. 

“언론의 자유를 떼어놓고는 신앙의 자유를 비롯해 모든 다른 자유도 완전할 수 없습니다. 현 정부는 공영방송인 KBS와 MBC의 보도 태도 때문에 신뢰를 잃고 있습니다.”

대중들로부터 존경받는 종교계 지도자의 가세로 이 운동은 더욱 뜨겁게 달구어졌다. KBS시청료거부운동은 이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힘으로 더욱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7월 11일에는 운동본부 임원단을 중심으로 한 가두 홍보 캠페인이 전개되었다. 9월 29일에는 이 운동의 결실로서 ‘시청료 거부 및 언론자유 공동대책위원회’ 결성이 결의되었다.

공동대책위원회 결성으로 이 운동은 한국의 각 민주화운동 단체와 종교계, 야당 정치권, 재야 운동권 등이 연대한 광범위한 결집체가 되었다. 즉, 기독교범국민운동본부와 민통련,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신민당과 민추협까지 참여하게 된 것이다.

공동대책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KBS는 공영방송임을 자처하며, 국민의 시청료와 방대한 독점적 광고료 수입으로 운영하면서도 계속하여 현 정권의 하수인으로 왜곡, 편향 보도를 일삼는 등 공정한 보도와 건강한 공영방송으로서의 회귀를 포기하고 있다. 시청료는 공정 보도를 하고 그 대가로 받는다는 국민과의 계약이며 의무로, KBS가 이를 지키지 아니할 때 시청료 납부를 거부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정당한 국민적 권리이다.”

공동대책위원회는 성명서 발표와 더불어 ‘시민들의 정당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시민불복종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국민들의 광범한 지지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이후 전개될 6월항쟁의 기초를 다지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1984년에 일어난 KBS시청료거부운동에서 가장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이 운동의 주체이다. 공포의 휘장을 맨 먼저 찢고 나온 존재는 학생이나 시민단체가 아니었다. 언론학계나 법학자, 야당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들은 힘없는 농민이었다.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벌어진 점도 이 운동의 특이한 면 가운데 하나였다.

KBS 시청료 거부운동은 엄혹한 시기에 자발적으로 벌어진 시민 주권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1986년 1월 20일 ‘KBS-TV 시청료 거부 기독교 범국민운동본부’가 발족되는 마중물 역할을 했다. 가톨릭의 시청료 거부운동은 곧 개신교로 옮겨져 기독교범국민운동이 되었다. 여기에 여성단체와 청년단체들까지 합류해 온 국민이 함께 하는 범국민운동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범국민운동본부가 발족한 이후에는 전국의 주요 도시마다 지역 조직이 결성되어 대동맥과 실핏줄의 역할을 체계적으로 이행해나갔다. 시청료 거부운동은 매우 극적인 효과를 나타냈다. 1984년 1,256억원까지 늘어났던 KBS 시청료 수입은 1985년 1,196억원으로 감소했다. 1987년에는 1,012억 원으로 감소했고, 1989년에는 790억 원으로 급감했다. 신군부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공영방송에 대한 국민들의 심판이 그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저항운동의 경험, 대동단결의 의지는 결국 6월민주화운동의 동인(動因)이자 견인차로 작용했으며, 전 국민이 주체가 된 민주화운동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글 박선욱(시인, 평전작가)

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시 〈누이야〉외 3편이 실천문학 제1회 신인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그때 이후》《다시 불러보는 벗들》《세상의 출구》《회색빛 베어지다》 등의 시집과 《채광석 평전》《김대중 평전》《황병기 평전》《윤이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