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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민주구국선언-유신반대운동의 불꽃
1. 긴급조치 9호를 깬 민권운동의 탄생 배경
1976년 2월 12일, 문익환 목사는 사상가이자 민권운동가인 함석헌과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함석헌 선생님, 제가 유신 반대에 관한 ‘민주구국선언문’을 작성했습니다. 오는 3월 1일을 기해 이 선언서를 발표할 생각입니다. 선생님도 제 생각과 같으신지요?”
“그럼요. 문 목사님 뜻에 기꺼이 동참하겠소.”
함석헌의 뜻을 확인한 문익환은 동생인 문동환 목사와 이문영, 윤보선, 서남동 등을 차례로 만났다. 그들 모두가 선언문 발표에 대해 동의하며 서명을 약속했다. 윤보선은 선언문에서 유신헌법 철폐와 긴급조치 해제, 현 정권 퇴진에 관한 내용을 뚜렷하게 명시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문영 교수는 선언문의 초안을 수정해주었다.
문익환은 그 무렵 독자적인 선언문을 준비하고 있던 김대중도 만났다. 문익환의 선언문을 본 김대중은 자신의 선언문을 선뜻 포기하며 서명에 동참했다. 문익환은 2월 27일 신현봉 신부에게 선언문을 전달했고, 28일에는 함세웅 신부를 만났다.
“신부님, 삼일절 기념미사에서 이 선언문을 발표할 수 있겠습니까?”
명동성당에서 발표가 가능한지 의사 타진을 하는 문익환의 얼굴은 무척 진지했다. 함 신부는 선언문 발표를 쾌히 응낙했다.
유신체제는 박정희 대통령 한 사람을 위한 만인의 불행이었다. 1975년 5월에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뒤부터 감시와 미행이 일상화되었다. 순서지에는 선언문 발표라는 말조차 넣을 수가 없어 ‘개신교 목사님 기도’라고 표기했다.
문익환은 북간도 명동촌에서 벗 윤동주와 함께 성장했던 것을 일생의 자랑으로 여겼다. 그는 또한 독립군으로 활약한 벗 장준하와 한 하늘을 이고 있는 것을 무한한 자부심으로 삼고 있었다. 그는 그 무렵 공동성서 번역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는 이 대업을 이루기 위해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
하지만 19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된 뒤부터는 신학자로서 성서 번역에만 몰두하기가 몹시 괴로웠다. 1974년 긴급조치가 발령된 뒤, 종신 총통으로 군림해가는 박정희의 1인 독재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용납이 되지 않았다. 1975년 선포된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논의를 금지했다. 집회와 시위, 정치 참여 또한 불가능했다. 조국은 겨울공화국이 되고 말았다.
1975년 8월 17일, 절친한 벗 장준하가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장준하는 박정희 정권과 온 몸으로 맞서 싸운 민주 투사였다. 박정희의 미움을 받았던 그의 죽음은 문익환 목사를 분노로 전율케 했다. 그는 오랜 묵상과 기도 끝에 박 정권과 맞서는 것이 의로운 싸움, 거룩한 항쟁임을 확신했다.
1976년 1월 23일, 가톨릭 원주교구에서 ‘원주선언’이 발표될 때 문익환 목사는 함세웅 신부 등과 더불어 서명자로 참여했다. 미국 프린스턴신학대를 졸업한 문익환 목사는 히브리어에 능통한 신학자였다. 그는 특별히 구약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로서 교계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그의 이름 앞에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대부이자 통일의 일꾼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될 터였다.
원주 교구는 가톨릭교회의 전통에 따라 1월 18일부터 25일까지 8일 동안 일치 기도주간으로 보내면서 신 ․ 구교 합동기도회를 개최했다. 신현봉 신부는 이날 일치기도회에서 〈누가 우리의 주님입니까〉라는 주제로 강론을 했다. 그는 강론에서 “교회가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는 것은 인간의 존엄을 위한 교회의 사명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천명한 뒤 ‘원주선언’을 발표했다.
‘원주선언’은 언론의 자유, 신앙 ․ 사상 ․ 양심의 자유, 공명선거 보장 등 총 9개항의 기본권을 보장할 것을 촉구하고 있었다. 원주교구는 이 선언을 통해 가톨릭과 개신교가 함께 연대해 ‘전 민중과의 일치’를 달성해 나갈 것을 호소했다.
‘원주선언’은 이 같은 교회 일치 운동을 바탕으로 인권과 민주화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응답으로 채택된 테제였다. 원주선언은 교회 일치 운동의 연대감 속에서 신 ․ 구교 신자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으며, ‘3․1민주구국선언’을 탄생하게 만든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2. 유신 반대운동을 확산시킨 ‘3·1민주구국선언’
1976년 3월 1일 오후 6시, 명동성당에서는 삼일절 57주년 기념미사가 거행되고 있었다. 가톨릭 신자 700여 명과 개신교 신자 수십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 ․ 구교 합동 기도회 형식으로 치러지는 미사였다. 20여 명의 사제가 공동으로 집전한 이 미사는 장덕필 신부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지금 신문들은 논조가 거의 똑같습니다. 천편일률적인 보도가 문제입니다. 현 정권은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어요. 유신헌법의 억압이 너무 큽니다. 숨이 막힐 지경이에요. 오 하느님! 사회 기강이 문란합니다. 경제 문제가 매우 심각합니다. 우리 한국 사회의 모든 어두운 면들을 없애 주소서, 아멘.”
1부 순서에서 강론을 맡은 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면서 기도로 끝마쳤다. 2부 순서에서는 개신교의 문동환 목사가 출애굽을 주제로 한 설교를 통해 박정희의 하야를 권고했다.
뒤이어 문정현 신부가 나와 2월 16일 김지하 시인 석방을 위한 전주 기도회에 대한 경과보고를 했다. 문 신부는 김지하의 구명을 호소하는 어머니 정금성의 편지를 낭독했다. 김지하는 1974년 민청학련 주모자로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 형 집행정지로 풀려난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폭로했다. 그는 또다시 체포돼 반공법 제4조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사회자인 장덕필 신부가 “이어서 개신교 목사님의 기도 순서가 있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이우정 전 서울여대 교수가 단상에 올랐다. 이우정 교수는 함세웅 신부로부터 미사 직전에 선언문 낭독을 부탁받았던 것이다. 모든 것이 극비리에 진행된 한 편의 드라마였다. 이우정 교수는 차분한 목소리로 〈민주구국선언서〉를 낭독했다.
“이 민족은 또다시 독재정권의 쇠사슬에 매이게 되었다. 삼권분립은 허울만 남고 말았다. 국가안보라는 구실 아래 신앙과 양심의 자유는 날로 위축되어 가고 언론의 자유, 학원의 자주성은 압살당하고 말았다.(……)
우리의 비원인 민족통일을 향해서 국내외로 민주세력을 키우고 규합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히 전진해야 할 이 마당에 이 나라는 일인 독재 아래 인권은 유린되고 자유는 박탈당하고 있다. 이리하여 이 민족은 목적의식과 방향감각,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잃고 총 파국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다. 우리는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여 · 야의 정치적 전략이나 이해를 넘어 이 나라의 먼 앞날을 내다보면서 〈민주구국선언〉을 선포하는 바이다.”
이 선언문에 서명한 사람은 함석헌, 윤보선, 정일형, 김대중, 윤반웅,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문동환, 이우정 등 10명이었다. 이들은 선언문의 초안자인 문익환 목사의 이름을 서명자 명단에서 빼기로 합의했다. 공동성서 번역에 차질이 생길까봐 배려한 것이다.
이날의 미사는 1974년 이래로 종교계에서 흔히 열리던 여느 기도회와 다를 바 없었다. 당시 인권문제 보고 후에 늘 이어지던 성명서 낭독의 관례처럼 선언문을 낭독한 것도 비슷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기도회 순서가 모두 끝난 오후 9시 30분경 성당 문을 나섰다.
하지만, 그날 자정부터 일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사법 당국은 맨 먼저 이우정 교수를 자택에서 연행해갔다. 3월 2일에는 문동환 목사와 윤반웅 목사가 연행됐고 3월 3일에는 이문영 · 안병무 박사와 문익환 목사, 서남동 목사, 은명기 목사, 이해동 목사, 이해동 목사의 부인 이종옥, 문익환 목사의 장남 문호근, 이문영 박사의 부인 김석중 등 11명이 연행됐다. 3월 5일 이태영 박사가 연행됐고, 3월 6일 함세웅 신부와 김승훈 신부가 연행됐으며, 8일에는 김대중과 이희호, 신민당 정일형 의원이 연행되었고 9일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이 면담조사를 받았다.
이들은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은 뒤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가족들조차 행방을 몰라 애를 태웠다. 이들의 행방이 알려진 것은 3월 10일이었다. 이날 오후 5시 30분, 서울지검 서정각 검사장은 깜짝 놀랄 만한 발표를 했다.
“지난 3월 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렸던 3·1절 기념미사 행사를 이용한 일부 재야인사들의 정부전복 선동 사건 관련자 20명을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서 검사장의 발표가 있자 비로소 이 사건이 세인들에게 알려졌다. 유신체제를 비판만 해도 감옥에 보낸다는 긴급조치 9호 상황 속에서 터져 나온 민주화운동이었기 때문에 세인들의 관심은 더욱 특별했다.
그해 12월까지 이어진 재판은 갖가지 진기록을 낳았다. 재판정의 피고석에는 전직 대통령, 대통령 후보, 재야 원로, 교수, 성직자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명망가들로 가득 했다. 이들은 정연한 논리와 달변으로 유신체제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재판정이 민주주의 강연장으로 변모하자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민주학교’라 불렀다.
가만 내버려두면 단순한 기도회로 끝났을 이 사건에 사법 당국이 호들갑을 떤 것은 서명자 속에 들어 있는 김대중 때문이었다. 박정희는 자신의 정적 제1호인 김대중이 ‘3·1민주구국선언’(3․1선언)의 서명자로 가담하자, 이를 철저히 억압해서 민주화운동 세력에 위해를 가하는 본보기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박 정권의 계산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신 · 구교를 포함한 종교계에서는 ‘3·1선언’이 정당하다는 성명을 연달아 발표했다. NCC 인권위원회에서는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인해 구속된 인사들을 위한 기도회를 개최했다. 중앙정보부는 이 기도회를 개최한 조남기 목사를 비롯해 5명을 연행하는 등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사건 이후 서울대, 이화여대, 한양대, 중앙대 등 대학가에서는 ‘3·1민주구국선언문’을 복사해 일제히 뿌리는 등 기민하게 대응했다. 학생운동권은 이 일을 통해 긴급조치 9호의 억압적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대학가의 유신반대 투쟁은 1976년 가을부터 점차 활발해졌고, 1977년 하반기에는 대규모 시위로 발전했다.
재야에서는 3․1선언을 계기로 교파를 초월한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1977년 3월 22일은 3·1민주구국선언 사건의 대법원 판결이 열리는 날이었다. 이날 윤보선 전 대통령과 함석헌,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등이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했다. 중앙정보부는 이 사건 관련자들을 구속하는 등 또다시 공안정국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 일련의 공안사건은 학생운동권과 재야 민주세력을 더욱 공고하게 결속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3․1선언은 유신체제로 인해 얼어붙은 산하를 깨우는 새벽 종소리가 되었다. 이 종소리를 듣고 재야인사와 학생운동권, 종교계 인사들이 모여들어 거대한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이들은 반독재민주화투쟁의 대오 속에 하나로 뭉쳐, 부마항쟁에 이르기까지 유신정권과 맞서 싸우는 거센 항쟁의 주체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