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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자, ‘민통련’의 깃발 아래로...!
"근데 민청련이 빠지면 곤란한데... 김 의장이 한번 더 생각해봐 주면 안 되겠소?”
이부영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넓은 이마 아래의 둥근 뿔테 안경이 유난히 무거워보였다. 그런 그를 지켜보며 김근태는 특유의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나도 지금 그런 전국적인 조직이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아직은 우리 모두 각자 부문운동에 좀 더 역량을 키워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80년 이후 우리의 힘이 지속적으로 성장했고, 대중들의 자발적인 참여도나 반독재 투쟁의 정서가 급속히 넓혀지긴 했지만 여전히 저들에겐 한줌의 세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민청련은 83년 창설된 이래 지금까지 비공개 대중노선과 조직운동을 지속해 왔습니다. 만일 필요하다면 인적인 지원은 할 수 있겠지만, 전면적으로 지금 당장 참여하기는 어렵겠습니다. 이 대표께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김 의장 생각은 당면 연대운동의 목표를 민중 역량 강화에 두고 부문 운동의 독자성을 보장하는 협의체로 가자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근데... 제 생각은 좀 달라요. 지금 끓어오르는 반독재 투쟁의 열기를 모으고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단일한 지도 체제의 강력한 연합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동안 민주화운동에 앞장 서셨던 어른들, 지학순 주교라든가, 함석헌 선생이라든가 문익환 목사 같은 명망가 어른들의 참여가 필요하구요.”
“그건 국민회의 쪽 장기표 선생과도 같은 생각이군요.”
“그렇습니다.”
민민협(민중민주운동협의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던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출신의 선비적인 인상을 한 이부영은 김근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가 김근태를 만나러 온 것은 얼마 전에 있었던 민민협과 국민회의(민주통일국민회의)간의 통합 논의 때문이었다.
1983년 12월 학원자율화 조치 이후, 전두환 군사정권은 강압적인 통치에서 다소간 벗어나 일종의 유화적 제스처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80년 광주 이후 치열하게 전개된 민주화운동을 폭력적인 방법으로만 대처하기엔 여러모로 어려움이 있었고, 약간의 숨통을 틔워줘 지하화 된 운동을 밖으로 끌어내어 컨트롤 하는 데 유리하다는 판단이 들기도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위 ‘유화국면’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1983년 9월 김근태를 중심으로 출범했던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은 80년대 초반 5.18민주화운동 이후 깊은 좌절과 패배감에 젖어있던 민주화 운동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뒤이어 민청련 출범에 자극받은 각 부문운동은 자신들의 운동조직 건설에 착수했다. 84년 3월 10일, 8백만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민주사회를 건설할 것을 목적으로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가 세워졌고, 4월 14일에는 ‘민중문화운동협의회’가 창립돼 참다운 민중문화와 분단 극복의 문화를 건설할 것을 다짐했다. 뒤이어 해직 언론인들을 중심으로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결성됐고, 여익구 등 불교인들이 중심이 돼 ‘민중불교운동연합’이 건설됐다. 양심적인 문인들의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천주교의 ‘가톨릭농민회’ 등 농민단체들도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역에서도 지역 단위의 민주화운동단체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84년에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85년에 민주통일국민회의 경북지부, 충남민주운동협의회, 부산민주시민협의회가 잇달아 결성됐다.
그러자 이러한 지역 및 부분 운동들을 하나로 집결시킬 수 있는 협의체가 요구되었고 그래서 탄생한 것이 ‘민중민주운동협의회’였다. 민민협은 민청련 등이 중심이 돼 건설한 단체로 각 부문 운동단체 간 협의체적 성격이 강했다. 노동자·농민 등 기층 대중운동의 역량 강화에 중점을 두고, 조직도 개인 회원보다는 회원 단체를 중심으로 구성했다. 그러나 기층 대중운동의 정치역량이 아직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민민협과 같은 조직으로는 정치투쟁의 효율성, 집중성을 기대하기 힘들었고, 명망 있는 재야 원로들을 조직 내에 흡수할 수도 없었다. 이에 10월 16일 문익환, 장기표 등을 중심으로 해 ‘민주통일국민회의’가 따로 조직됐다. 국민회의는 대중운동단체를 포함하지는 못했으나 명망 있는 재야 원로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아직 역량이 부족했던 각 지역단체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민민협이 대중운동에 중점을 두고 대중조직에 기반했다면 국민회의는 당면 투쟁을 중시하고 명망성과 개인회원에 뿌리를 두고자 했다. 양자는 대립적이면서도 보완적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터져 나온 것이 통합 논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지금까지 선두에서 일해 온 민청련이 빠진다면...”
이부영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우리 민청련뿐만 아니라 종로 5가 기독교 쪽도 이번에는 빠지겠다고 들었습니다만.”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지금 국면에서 민민협과 국민회의를 통합해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국면에 대처해나갈 전국적인 중심이 필요하다는 데는 의장님도 동의하시지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잠시 저들도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곤 있지만 언제 돌변하여 다시 공안국면으로 끌고 갈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발톱을 감춘다 하여 없어진 것은 아니니까요. 나는 반드시 장차 큰 태풍이 올 거라고 생각해요. 두려워하는 건 아니지만 다시 70년대식이나 80년 광주의 교훈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여러 동지들이 고생하여 건설해 놓은 대중조직이 일시에 허망하게 무너져서는 안 되지요.”
“좋습니다. 그러면 일단 전국적인 공개 운동의 틀을 만들어놓으면 그때 다시 의장님을 비롯한 민청련 활동가의 참가를 의논해보도록 합시다. 아무튼 저는 계속해서 국민회의 측과 통합하는 논의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부영은 조금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근태 역시 그에게 속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못해 조금 미안한 감이 들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험준한 민주화운동의 길을 가는 동안 온갖 산전수전을 함께 겪어가는 동지였지만 때로는 함께, 때로는 따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어쩌면 숙명인지도 몰랐다.
김근태와 헤어진 이부영은 곧장 국민회의 쪽 책임자인 장기표를 만나기 위해 낡은 바바리코트 깃을 세운 채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봄은 왔다지만 아직 채 쌀쌀한 겨울기가 남아 있었다. 정보부와 경찰의 눈이 도처에서 번쩍이고 있는 느낌에 자기도 모르게 흘낏흘낏 돌아봐지곤 했다.
민청련과 종로 5가의 불참 의사에도 불구하고 통합논의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문익환 목사, 백기완 선생, 계훈제 선생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찬성을 표해주었고, 가톨릭농민회,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지역 단위 기존 민민협 회원들도 적극 참가 의사를 표명해왔다.
“됐다.”
이부영은 장차 닥쳐올 일대 회전을 생각하며 설레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드디어 85년 3월 29일, 서울 장충동 분도회관에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결성되는 날이 왔다. 아침부터 삼삼오오 두 단체의 핵심 회원들이 모여 들었다. 긴장한 표정으로 경찰들도 주변을 에워쌌다. 그러나 별 충돌 없이 회의는 진행됐고, 의장으로 문익환 목사가 선출되었다. 총 23개 단체가 가입한 민통련은 상임위원회를 통해 부문운동단체를 포괄했고, 각 지역조직을 통해 개인 회원들을 받아들였다. 민통련은 가맹단체 규모로나 활동가들의 면면으로 보나 80년대 재야민주화운동의 총 결집체라고 할 만했다. 가톨릭 신부와 운동단체들, 기독교 목사와 운동단체들, 70년대 이래의 재야운동, 노동운동, 빈민운동 그리고 각 분야 부문운동 인사들이 함께 연대했고, 전국 시도 단위의 지역운동가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사회적 영향력이 가장 컸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도 참여했다. 강희남 목사, 이두수 목사, 유운필 목사 등 개신교 원로 목사도 참여했으며 재야 원로인 계훈제와 백기완, 인권변호사의 대명사 이돈명 변호사,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원로 언론인 송건호, 평론가 김병걸, 소설가 이호철, 시인 고은 등도 참여했다. 100여 명이 넘게 들어 찬 분도회관 2층 강당은 열기와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의장으로 선출된 문익환 목사는 단상에 올라 약간 상기되어 쩌렁쩌렁 목소리로 사자후를 토하듯 창립선언문을 읽어나갔다.
“지금 한반도는 제3세계의 모든 나라와는 달리 민족의 분단, 국토의 분단, 자원의 분단, 이데올로기의 분단이라는 험난한 장벽을 안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 때문에 민주화와 통일은 양립된 개념이 아니라 표리일체의 관계에 있는 과제라는 진리가 자명해졌다. 민주적인 체제가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극소수의 지배세력이 추진하는 '통일운동'은 민족을 기만하고 배신하는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오늘 하나로 뭉쳤다. 이 통일은 기층운동과 일반운동 각 부문의 단체들에 군림하기 위한 통일이 아니다. 이것은 독자적인 활동을 강화하면서, 항구적으로 연대하여 민주화와 통일을 이루는 과업에 기여할 수 있도록 디딤돌을 마련하려는 통일이다...”
그것은 광주를 피로 물들이며 등장해 군홧발로 지배를 하던 살벌하고 엄혹했던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선전포고이자 장차 벌어질 민주화의 대장정에 대한 출정가와 다름없었다. 바야흐로 80년대 민주화의 정점인 6월민주항쟁으로 나아가는 거대한 물결이 ‘민통련’이라는 하나의 대오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곧 수개월 후 벌어질 인천5.3민주항쟁으로 대부분 구속되거나 수배를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김근태는 그 유명한 남영동에 끌려가 죽음과 같은 고문을 당할 운명이었다. 고난과 승리의 여신은 언제나 쌍둥이 몸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아무 것도 모른 채, 1985년 3월 29일. 촉촉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봄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