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글자 크기 조절

희망의 노래, 꽃다지 이야기

1. 평등한 세상, 아름다운 노래

한밤중의 수사과는 시끌벅적했다. 한꺼번에 잡혀온 노동자들이 책상마다 형사들과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이것 봐요, 도대체 노동운동하고 민주화운동이 무슨 상관이란 말요? 월급 더 달라고 파업하는 게 노동자 이기주의지 무슨 민주화운동이요? 에이취!”

젊은 형사는 말하다 말고 한바탕 재채기를 해댔다. 가두시위 현장에서 잡혀온 이들의 옷에서 나는 최루탄 냄새 때문이었다. 마주 앉은 작업복의 청년은 면역이 된 듯 당당했다.

“평등 없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가능합니까? 돈과 권력을 가진 소수 특권층이 선거를 자기들 마음대로 주무르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되서는 안됩니다. 노동자가 잘 사는 게 진짜 민주주의고, 그래서 노동운동은 민주화운동인 겁니다.”

형사는 콧물을 풀어내고는 노래 가사가 적힌 종이를 흔들어 보였다. 백무산 작사, 김호철 작곡의 <단결투쟁가>였다. 가사 곳곳에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오늘 당신이 부른 노래 가사를 좀 봐요. 너희는 조금씩 갉아 먹지만 우리는 한꺼번에 되찾으리라? 마침내 가리라 자유와 평등 해방의 깃발들고 우리는 간다.  아아~ 우리의 길은 힘찬 단결투쟁 뿐이다? 이게 무슨 노래요, 선동하자는 거지!”

청년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지금 사상검열이라도 하는 겁니까? 군사독재 시절로 돌아가자는 겁니까? 그 가사가 어때서요? 평등 세상을 위해 내 몸을 바치겠다는 거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게 바로 인류의 역사가 아닙니까? 그보다 더 인간다운 선언이 어디 있습니까?”

형사는 몸을 뒤로 젖히고 고개를 내저으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아, 정말 말이 안 통하는군. 자칭 가수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걸 노래라고 부르지? 공장 작업복에 작업화 차림으로 무대에 오르고 말이야. 노래만 하면 말도 안 해. 마이크 받침대를 무기 삼아서 전경들과 싸워? 당신 가수 맞아?”

“광대처럼 반짝이는 옷 입고 춤이나 추면서 연애 노래나 해야 가수란 말입니까? 

그때, 어두운 창밖에서 함성 소리에 이어 합창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경찰서 담장 밖 골목을 메운 노동자들의 노래, 김호철이 만든 <파업가>였다.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하나 되어 우리 나간다. 승리의 그날까지. 지키련다, 동지의 약속…”

“창문 닫어!”

수사과장의 고함에 형사들이 일어나 창문을 닫느라 자리를 비울 때였다. 청년이 갑자기 큰소리로 노래를 선창하기 시작했다. 조사를 받던 다른 노동자들도 하나둘씩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김호철 작사 작곡의 <노동조합가>였다. 

“가자! 노동조합의 깃발을 힘차게 휘날리자. 얼마나 긴 세월을 억눌려 살아왔나…”

형사들이 중단하라고 고함쳐댔으나 노랫소리는 점점 커졌다. 

“얼마나 긴 세월을 억눌려 살아왔나 짓밟힌 우리 어깨걸고 단결투쟁 전진이다”

1990년, 오월의 밤은 그렇게 깊어 갔다.

2. 노동자 노래패 꽃다지

꽃다지요? 1992년에 만들어 졌으니까 스무 살이 훌쩍 넘었습니다. 노동자만으로 구성되었던 노래패 ‘노동자노래단’과 ‘삶의 노래 예울림’을 합쳐 만들었습니다. <바위처럼> <민들레처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같은 곡들은 노래방에서도 애창되던 우리의 대표곡이었지요. 

하지만 우리 꽃다지의 본령은 민주화투쟁의 현장, 특히 노동현장에 맞는 노동가요라고 하는 게 좋겠지요. 사랑받은 곡이 너무 많아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운데요, 이 부분에서 작곡가 김호철 선배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다른 민중가요 작곡가도 많습니다만... 김호철 선배는 대단한 선배예요.

김호철 하면 민중가요 자판기라고나 할까요? 무슨 큰 사안이 생기거나, 투쟁현장에 필요하다 생각하면 밤을 새워서라도 악보를 만들어 왔으니까요. 작곡이 다 되면 선배가 악보하고 조그만 키보드 하나랑 기타를 달랑 들고 와요. 우리는 그러면 선배를 따라 밤새 연습해서 다음날 대형 무대에 올리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무노동 무임금이 쟁점이 되면 <무노동 무임금을 자본가에게>를, 노동분야 뿐이 아니라 1992년 대선 때는 독자적인 민중후보로 백기완 선생을 출마시키면서 <민중권력쟁취가>를 만들어 부른 기억도 납니다. 김호철 선배의 곡이 500개도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노래를 보급하는 일은 주로 우리 꽃다지나 노래공장 같은 노래패들이 했지요. 대학교 방송실 장비를 빌려서 녹음하고 구식 테이프에 복제해서 2,500원씩인가에 파는 겁니다. 20종이 넘는 테이프를 만들어 수십만 개는 판 것 같습니다. 대단했지요. 요즘은 씨디 2,000장 찍으면 몇 년 걸려도 팔릴까 말까 하거든요.

돈을 벌었냐고요? 하하하…  2014년에 김호철 선배가 받은 저작권료가 0원이라고 들었습니다. 네! 0원이요! 단 한 푼도 없었단 말입니다! 500곡의 노래 중 상당수가 지금도 수많은 노동자들 입에서 불리는데 말입니다. 노동문화의 재생산을 위해 음반 좀 사주면 좋겠습니다. 불법 다운로드 같은 것 좀 하지 말고요.

꽃다지의 가수들이요? 마찬가지죠. 옛날에 음반 잘 팔릴 때는 그 돈으로 투쟁현장에 무료공연도 잘 다녔지만 요즘은 음반도 안 팔리고 어쩌다가 공연을 가봤자 오가는 비용도 안 나오니 다들 부업으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일찌감치 독립가수로 떨어져 나가거나. 노찾사보다는 적은 편이지만, 지금까지 24년 간 꽃다지를 거쳐 간 가수가 수십 명도 넘는 이유지요.

행복하냐고요? 그런데 왜 노래패를 떠나지 못하냐고요?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바퀴 축에 치는 기름이라고나 할까요?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인간의 길고도 힘든 행로에 작은 보탬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무엇보다도 노래하는 게 좋고요.

앞으로 바라는 거요? 우리 꽃다지의 노래가 노동가요의 진정성으로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만날 수 있는 노래, 삶의 진정성을 담은 노래로 보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를 바랍니다. 모든 가수들의 바람이기도 하겠지요? 

3. 또 다른 꽃다지들

청계천 평화시장과 공구상가를 연결하는 전태일다리는 늘 번잡하다. 짧고도 좁은 다리 위에는 택배 오토바이들이며 손수레가 쉴 새 없이 오가고, 갈 길 바쁜 행인들은 다리 중간에 세워진 전태일 흉상 한 번 올려다보지도 않고 무심히 흘러간다.

햇살 뜨거운 여름날 오후, 기타를 둘러맨 두 남자가 어김없이 음향장비 박스를 끌고 나타났다. 한 사람은 바싹 마른 큰 키에 홀쭉한 얼굴을 가졌고 다른 사람은 살찐 체구에 통통한 얼굴이다. 동상 앞에 음향을 설치한 두 사람은 노래에 앞서 인사를 한다.

“안녕하십니까? 처절한 기타맨 김일안, 가수 이씬 인사드립니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노동자를 위해 몸 바친 전태일 열사의 고귀한 뜻을 알리고자 금요일마다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날이 무덥습니다. 오늘도 건강하고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보통 사람들은 들어본 적이 없을 노래들이 시작된다. 어쩌다가 발길을 멈추고 쳐다보는 이도 있지만 대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지나쳐 간다. 그래도 두 귀로는 노래를 들을 것이다. 그것이 두 사람의 희망이다. 

박수를 치지 않아도 좋다, 머물러 서서 봐주지 않아도 좋다. 열린 귀를 통해 사람들 마음속까지 흘러들어갈 수만 있다면, 십 년이라도 이십 년이라도 이 자리에서 노래하겠다는 게 두 사람의 약속이다. 노찾사, 꽃다지 같은 노래패에서 혼신을 다해 노래하던 다른 수많은 가수들이 그랬듯이.

글 안재성

1989년 장편소설 <파업>으로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이후 대표작으로 <사랑의 조건>, <황금이삭>, <경성트로이카>, <연안행>,등의 장편소설과 <이현상 평전>, <박헌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