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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노동자들의 희망공동체 - 한국여성노동자회

2001년 12월, 4명의 여직원이 계약만료를 이유로 해고되었다. 이 회사는 여직원이 결혼하면 사직서를 제출하게 한 뒤 다시 입사시키는 부당한 방식의 성차별적 조치를 아무렇지 않게 취하고 있었다. 당시 정규직으로 입사해서 결혼 후 계약직으로 전환된 사람이 7명이었고, 이들 중 반은 계약 해지 방식으로 결국 해고되고 말았다. 뒤이어 해고 위협을 느낀 여직원들은 한국여성노동자회의 상담을 거쳐 전국여성노동조합에 가입한 뒤, 단체 행동과 교섭을 통해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벌써 15년도 전의 일이지만 여성노동자회의 평등의 전화 상담실에는 지금도 여전히 부당해고와 성차별적 관행 등에 관한 상담글들이 꾸준히 올라오고 있다. 

대기업 하청으로 차량정비서비스 관련업체에 근무하는 한 여성은 2013년 경력직으로 입사했다. 그런데 근무 3개월 차에 임신을 하게 되어 바로 윗선임인 팀장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임신 후 근무상황에 대해 논의를 하였고 여직원이 제시한 출산 휴가 3개월 보장이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출산을 앞둔 즈음에 회사는 새로 여직원을 뽑겠다며 나가라고 통보했다. 스스로 일하겠다고 한 상태에서 임신을 한 것이니 본인 책임이며 해고는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그게 싫으면 출산 직전까지 일하고 낳자마자 출근해서 회사 일에 지장을 주지마라는 거였다. 

이 여성은 한참 성수기 때 일을 시켜놓고는 비수기가 되니까 애초에 했던 약속까지 모두 부정하며 퇴사를 종용하니 너무도 억울하다는 글을 평등의 전화 상담소 홈페이지에 올렸다. 여성노동자회 상담자는 답변 글을 달았다. 

“......분명하게 출산 후 계속 근무에 대한 의지를 밝히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한 출산휴가 90일은 강행규정으로 임의로 축소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업무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셔서 실책이 없도록 하시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임신으로 인한 해고'를 할 수는 없으니 업무불성실 등등의 꼬리표를 붙이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만약에라도 해고하겠다고 하면 '해고통보서'를 '서면'으로 달라고 하세요......”

1987년 3월 21일 오랜 준비기간을 거쳐 창립한 한국여성노동자회(이후 여노회)는 부당하게 해고를 당하고, 동일한 노동에도 불구하고 남자노동자 임금의 반 밖에 못 받는 차별을 당해도 갈 곳이 없었던 여성노동자들에게 큰 희망으로 다가왔다. 그런 여노회 창립의 배경에는 전체 노동자 중에 여성노동자가 90% 이상이어도 노동조합의 간부들은 모두 남성노동자의 차지였던 시절이 있었고,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도 정당한 권리를 찾으려고 부단히 애써온 선배 여성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었다. 무엇보다 1979년 8월 11일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던 YH무역의 여성노동자 김경숙의 죽음은 여성노동자들이 더 이상 권력과 자본의 탐욕에 희생될 수 없다는 결의의 도화선이 되었다.

김경숙 열사가 죽은 지 7년 뒤인 1986년 9월에 열린 추모집회는 노동운동 사상 최초로 여성노동자들의 대중 집회라는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 전해에 있었던 구로연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운동이 위축되고 합법, 반합법의 노동단체가 증가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노동자가 처해 있는 성차별적 현실을 바로 인식할 필요성이 제기 되었고, 민주노조출신의 여성활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준비모임을 가지고 집회를 계획했다. 그러나 경찰의 봉쇄로 추모집회는 무산이 되었고, 참여하기 위해 모인 400여 명의 노동자들은 가두투쟁을 벌였다. 

노동운동 내에서 여성문제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자 했던 준비위원들은 정권의 탄압보다 노동운동 내부의 갈등에 더 힘겨웠다. 


“노동운동 내에도 해결해야 할 당면과제들이 많으니 여성문제는 지식인 여성에게 맡겨두자.”

“지금이 어느 땐 데 한가하게 여성문제나 얘기하고 있는가?”

“여성문제는 노동문제가 해결되면 자연히 해결된다.”


여성운동은 부르조아 여성들이나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1986년 당시 여성노동자문제를 바라보는 노동운동의 내의 관점이 이러했다. 준비모임은 수차례의 세미나를 거치며 독자적인 여성노동자운동 조직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을 굳히고 창립준비를 해나갔다. 그 중심에는 1970년대 민주노조의 주축이었던 콘트롤데이타, YH무역, 세진전자, 반도상사, 서통, 청계피복, 고미반도체 등 노동조합 출신의 활동가들과 한국여성평우회 출신의 여성 활동가들이 있었다.

드디어 1987년 3월 21일, 여성노동자회 준비모임은 창립대회를 열고 ‘한국여성노동자회’(이하 여노회)라는 이름으로 역사적인 깃발을 치켜들었다. 여노회는 규약을 통해 ‘여성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 여성으로서 받는 억압과 가난의 본질을 인식함으로써 올바른 여성노동자로서의 의식을 갖고 인간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한다’는 목적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창립선언문을 통해 ‘미·기혼여성노동자와 노동자 부인을 노동운동의 주체, 여성운동의 주체로 세우기 위해’ 노력하며, 민주적인 노동조합의 외곽지원체이자 공개적인 교육선전 활동을 하는 여성노동자 운동단체로서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여노회의 초창기 활동은 공개 노동운동단체로서의 역할과 노동운동 내 여성부분을 구축하는 선도체로서의 역할을 표방하며 노동자들의 투쟁에 적극 지원하고 동참하였다. 그리고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은 여노회로 하여금 신규노조 결성과 민주노조 사수 투쟁 지원에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 

“단 두 명이 모여도 노조결성을 시작합시다.”

이는 여노회가 노조결성의 필요성에 대한 교육선전을 벌이며 노동조합 결성 지원사업을 진행할 때 내건 구호였다. 특히 맥스테크의 한 여성노동자가 여노회를 찾아와 상담한 것으로 시작된 신규노조결성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맥스테크는 당시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 위치하여 미국의 의학서적, 재판기록, 통계자료 등을 컴퓨터에 입력하는 작업과 교정하는 작업을 하는 키펀치 전문회사로 노동조건이 너무도 열악했다. 여노회는 맥스테크의 여성노동자들과 함께 치밀한 준비작업을 거쳐 조합원이 거의 100% 참여하는 노동조합결성 보고대회를 마쳤다. 이후 회사 측의 갖은 탄압과 위장폐업 철폐 투쟁까지 함께 하며 끝내 노동조합을 사수한 것으로 여성노동자운동사에 기록을 남겼다. 이들의 투쟁에 지지를 보내는 의미에서 한국여성단체연합은 1988년 3월 8일 제2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올해의 여성운동상’으로 맥스테크사 노동조합을 선정하여 시상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여노회의 조직대상을 공단 중심의 제조업 노동자층으로만 설정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IMF 상황에서 여성 우선 해고, 비정규직의 확산 등 급격히 악화되고 있는 여성노동 현실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이 필요했다. 장기간의 토론과 연구를 거듭한 끝에 1999년 8월 29일 여성의 노동권과 단결권 확대를 목적으로 전국여성노동조합이 출범한 것은 가히 획기적인 성과였다. 또한 ‘노동시장에서 배제되고 있는 실직 빈곤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서는 그들의 노동을 전문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 결과 2004년 11월 전국단일조직인 ‘전국가정관리사협회’를 결성하는 등 여성노동자들의 현실 개선을 목표로 여성노동자 운동의 지평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한국여성노동자회는 2014년부터 노동자의 단결을 외쳤던 YH 노조의 김경숙을 기억하고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김경숙의 뜻을 기리기 위해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와 함께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 - 김경숙상을 제정하여 시상을 하고 있다. 여노회는 여성노동자의 눈물이 있는 곳에 항상 함께 하고 있다.

글  박민나(자유기고가) 
'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여성노동운동가 8명의 이야기' 출간(2004년 )과 한국여성노동자회 계간지 '일하는여성'에 '박민나의 삶이야기'를 연재하면서 많은 여성노동자들을 만나 글로 옮기는 일을 하였다. '여성의 삶과 문화' 공저, 한겨레신문 '길을 찾아서 이총각 편' 연재, 뮤지컬 메노포즈 번안 등 다양한 글쓰기를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