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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자식들의 아버지 - 허병섭 목사

그날도 행상에 나섰던 허병섭은 멀리서 들리는 호루라기 소리에 후다닥 물건들을 정리하고 정신없이 뛰었다. 앞서 뛰던 한 남자가 좁은 골목으로 확 꺾어 들어가자, 그 역시 뒤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남자는 온데 간데 없고 리어카만 놓여있었다. 

"어이, 얼른 이리 와!" 

지푸라기를 뒤집어 쓴 사내가 짚더미 속에서 얼굴만 삐죽이 내밀었다. 

"리어카는 어떻게 하고요?"

"이런, 멍충아! 리어카는 두고 물건만 들고 얼른 이리 오라고!"

"아, 네."

호루라기 소리가 가까워지자 급해진 허병섭은 서둘러 그가 있는 짚더미 속으로 들어갔다. 

"아니, 이리 굼떠서 어떻게 먹고 살아? 조금만 있으면 저놈들도 사라질 테니 냄새나더라도 좀 참으슈."

"네, 고맙습니다."

"이 양반 샌님이 따로 없네. 나는 이철용이라고 하우."

"네? 이철용 씨요?"

어두워서 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허병섭은 이미 이철용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시난고난한 삶을 이어오다 청계천 판자촌까지 흘러들었던 이철용은 그 바닥에서 구두닦이들의 대부가 되었고 은성학원이라는 조직까지 만들어 어렵게 살아가는 구두닦이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 

훗날 ‘어둠의 자식들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얻은 허병섭 목사는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청계천 꼬방동네로 불리는 판자촌으로 들어갔다. 1974년 5월31일 당시 동대문구 신설동 노벨극장 뒤에 진을 치고 있던 판자촌은 온갖 밑바닥 인생들이 모여들어 하루살이 같은 삶은 이어가는 전쟁터 같은 곳이었다. 그곳은 여느 판자촌하고는 달리 창녀, 기둥서방, 넝마주이, 깡패 등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한신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안수까지 받은 그가 입대한 뒤 휴가를 나올 때마다 친구인 이규상 전도사를 만나러 가던 곳이기도 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이 처한 현실과 사회 부조리에 눈을 뜨게 되었다. 제대 후 그도 역시 이 전도사와 함께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에 들어가 빈민 선교를 시작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어린 시절의 기도를 실천하기에 이른 것이다. 

냄새나고 좁아터진 골목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판이 벌어졌고 고성과 비명소리가 난무했다. 그 역시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밑바닥 생활은 처음이었기에 그의 선택이 흔들리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허 목사는 그렇게 그들의 삶에 뛰어들었다. 처음에 잡았던 하수도 공사일은 옆집 사는 임씨에게 부탁하여 의욕 넘치게 시작했지만 다음날 당장 몸살로 드러눕고 말았다. 그는 차라리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행상에 나서자고 결심했다. 다행히 그 일은 동네사람들과 가까워지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길거리 무허가 행상은 불법인지라 단속반이 뜨면 냅다 뛰어야했다. 

이철용과의 만남은 허병섭의 꼬방동네 활동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똑똑하고 리더십이 뛰어났던 이철용 역시 허병섭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이철용은 허병섭이 목사라는 말을 듣고 대번 '우리 같은 양아치들한테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사기 치러 왔냐'고 비아냥거렸지만 머지않아 허병섭의 진심에 매료되어 그와 함께 꼬방동네 사람들을 위한 일을 시작하게 된다.

허병섭이 처음 벌인 일은 꼬방동네 사람들의 건강을 챙기는 일이었다. 제대로 못 먹고 못 입으며 죽을 둥 살 둥 살아가는 그들 중에는 결핵에 관절염, 신경통 등을 달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먼저 주민들의 요구를 수렴하여 의사가 필요하다는 탄원서를 쓰게 하였는데, 이는 주민건강위원회가 조직되는 단초가 되었다. 그리고 군의관 출신인 전상배를 수소문하여 무료 진료를 시작하였다.

그 무렵 꼬방동네는 정부가 도시개선을 명목으로 시작한 무허가 건물 철거사업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꼬방동네 사람들은 셋방이나 무허가 주택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철거 이후에 보상은커녕 그냥 길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허병섭은 공동주택조합을 만들어 연립주택을 짓는다는 계획서를 작성하여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망치와 곡괭이를 든 철거반원을 피할 수는 없었다. 무너져가는 판잣집에 깔려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는 판자촌 사람들의 통곡에도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허병섭은 철거반원이 허물려고 하는 세탁소 건물 벽에 대자로 붙어 서서 외쳤다.

“이놈들아. 나를 쓰러뜨리기 전에는 절대 이집을 허물지 못해.” 

“이 자식 이거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먼.”

그들은 망치를 휘둘렀고 허병섭은 무너져 내리는 서까래에 깔려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다. 

그때 누군가 외쳤다.

“목사님, 목사님! 목사님이 다쳤다.”

그가 목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철거반장은 반원들을 철수 시켰다. 허목사가 피를 흘리고 쓰러지면서 저항했지만 200가구에 이르렀던 청계천 판자촌은 모두 헐려버리고 말았다. 허병섭이 구속자를 위한 기도모임인 목요기도회 일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날 어린 아이 하나가 무너지는 벽에 깔려 죽었고, 집을 잃은 어떤 아버지는 목을 맸다. 

그에게도 아버지가 있었다. 1941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허병섭은 일본놈들에게 만석의 땅을 빼앗기고 만주로 향하던 부모님의 등에 업혀 동토의 땅을 헤매야 했다. 해방 후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어린 시절 우연히 들어간 교회에서의 따뜻한 체험이 그를 줄곧 교회 주변에서 성장하게 했다. 성장하여 신학대학에도 들어갔지만 아버지는 끝내 장남이 예수쟁이로 살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에게 몽둥이질을 해대며 욕설을 퍼붓던 어머니도 반대하긴 마찬가지였다. 

“조상 팔아먹다가 뒈질 놈!”

“예수 믿다 빌어처먹을 놈!”

그는 그럴수록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찬송가를 부르며 매달렸다. 하지만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가족들이 서울로 올라온 뒤 아버지가 노동력을 상실하자, 그는 신학교를 나와 피혁공장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시작했다. 이후로도 온갖 행상을 해가며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했다. 간절한 기도 덕분이었는지 그는 한신대 식당에 일자리를 얻었고 후원자의 도움으로 다시 신학생이 되었다. 뛰어난 성적으로 대학원 공부까지 마쳤다. 결혼을 하고 안정된 목사 가정을 이루는 것만 남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청계천 판자촌이 헐린 후 허병섭은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에서 논의된 대로 중랑천 판자촌 지역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 역시 철거가 진행되면서 이미 4명의 희생자가 나온 상태였다. 그는 이철용과 함께 빈민 스스로가 만든 최초의 민중 교회인 사랑방교회를 세워 철거민들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사랑방교회마저 철거가 되던 날, 화려하게 빛나지는 않았지만 멀리서 바라만 봐도 힘이 되었던 십자가는 철거반원들에 의해 똥통에 처박히고 말았다. 당시 위급한 상황에 함께 했던 문익환 목사는 똥 묻은 십자가를 치켜들고 통곡했다.

이듬해에는 3‧1민주구국사건으로 많은 민주인사들이 구속되었다. 허병섭 역시 연행되어 조사받고 고문당하기를 반복해야 했다. 그리고 이어진 6개월의 수배생활 끝에 그는 하월곡동에 자리를 잡고 교인들이 교회의 주인이 되는 민주 교회를 지향하는 동월교회를 세웠다. 그는 우리의 음악으로 찬송가를 부르고 판소리로 설교를 했다. 우리의 민족문화가 함께 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소망의 길은 허목사가 목사직을 그만두는 1988년까지 이어졌다. “민중을 사랑한다는 것은 민중의 삶을 사랑하는 것이고, 나는 민중의 눈물과 피와 땀을 내 것으로 삼지 않고서는 민중을 올바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선언한 그는 다시 평신도가 되어 빈민운동에 헌신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빈민들과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며 열정을 쏟았던 허병섭은 1996년 전북 무주로 내려가 생태공동체운동에 매진하다가 2012년 3월 27일 패혈증으로 쓰러져 시민사회단체와 종교계 인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하늘나라로 갔다.

글  박민나(자유기고가) 
'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여성노동운동가 8명의 이야기' 출간(2004년 )과 한국여성노동자회 계간지 '일하는여성'에 '박민나의 삶이야기'를 연재하면서 많은 여성노동자들을 만나 글로 옮기는 일을 하였다. '여성의 삶과 문화' 공저, 한겨레신문 '길을 찾아서 이총각 편' 연재, 뮤지컬 메노포즈 번안 등 다양한 글쓰기를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