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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한 일도 큰 일인가요? - 김광자 이야기

그 후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요

김광자는 자신의 이야기도 ‘이야기 꺼리’가 되는지를 먼저 물었다. 전국에서 최초로 여성 노조 지부장을 선출한 집행부, 그것도 그 유명한 동일방직 노조의 집행부였던 사람이 말이다. 그런데 그의 질문은 겸양의 말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질문이었다. 

그녀의 생각은 이랬다. 동일방직 노조운동이 노동운동사에서 가지는 의미를 안다, 노동자의 90%가 여자지만 노동자를 대표하는 사람은 그래도 남자여야 한다는 통념을 우리 집행부가 처음으로 깼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우리 집행부는 그 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무력하게 물러나와 전부 평범한 아줌마가 되었다, 우리 뒤를 이은 이총각 집행부가 똥물을 뒤집어쓰고 고난의 길을 갈 때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우리 이야기도 의미 있는 ‘이야기 꺼리’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제가 쪼그만 염색 공장 다니다가 동일방직에 ‘빽’써서 들어왔잖아요. 당시만 해도 들어가기 힘들었어요. 큰 회사니까. 근데 난, 아유, 더웠던 생각밖에 안 나요. 공장 안이 얼마나 더운지 겨울에도 반팔 차림으로 일했어요. 실 끊어질까봐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다니고. 걸핏하면 욕먹고. 월급은 쪼끔 주고 잔업은 잔뜩 시켰어도 불평 한 번 안했어요.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는 거지, 감히 따져 볼 생각을 했나요? 노동조합이야 있긴 했지만 사실 뭐하는 덴 줄 몰랐어요.”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

김광자는 인천에서 자랐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스스로 중학 진학을 포기했다. 어머니 혼자서 이런 저런 장사를 하며 5남매를 키우는 형편이니, 오빠들 학비만으로도 빠듯했다. 딸까지 가르칠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 시대 대부분의 딸들과 비슷한 선택을 한 것이다. 동네의 작은 공장을 찾아갔고 어찌어찌해서 나중에는 큰 방직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일은 힘들었지만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해내서 조장도 맡았고 회사의 신임도 얻었다. 

“어느 날, 회사 옆 반 애가 인천산업선교회라는 곳에 가자고 하더라고요. 공부도 가르쳐주고, 교양 강좌도 듣고, 다른 회사 사람들 만나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고. 저는 초등학교 밖에 안 나와서 그런지 무얼 배운다는 걸 그렇게 좋아했어요. 가니까 진짜 여러 가지 많이 가르치더라고요. 마요네즈 만드는 법도 배우고, 꽃꽂이도 배우고. 좋았어요. 태어나서 제일 재미있는 일이 산선 가서 노는 거였다니까요.” 

조화순이라는 여자 목사

틈만 나면 산선에 가서 '놀던' 김광자는 거기서 조화순 목사를 만나 새로운 삶에 눈을 떴다. 자신을 못 배우고 가난한 공순이가 아니라 떳떳하고 장한 노동자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회사 잔디밭 옆 사무실에 걸려있던 노동조합 간판을 유심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노동자 절대 다수가 여자이니 노조 대표도 여자가 해야 여자 사정을 잘 알아 제대로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생각이 같은 친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함께 산선에 다니며 공부했다. 근로기준법도 배우고 노동조합법도 배웠다. 우리들이 대의원이 되어야 노조 지부장을 ‘우리 사람’으로 뽑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대의원 당선을 목표로 많은 ‘연습’을 했다. 

“말하는 연습부터 했어요. 회의 시간에 손들고 자기 의견 발표하는 연습, 다른 사람이 반대하면 그 반대에 대해서 다시 반박하는 연습. 그전에는 회사에서 정한 사람들이 대개 대의원이 됐어요. 원래 그렇게 하는 건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우리 힘으로 대의원에 출마하고 정견 발표도 하고 선거운동도 하려니 하나부터 열까지 다 배워야 하고, 연습해야 하고. 

목사님 아니었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거예요. 우리들 데리고 다니면서 회의하는 연습부터 다 시키셨지요. 그렇게 해서 우리 모두 무사히 대의원이 됐지요. 

당시만 해도 회사에서 큰 방해는 안 했어요. 우리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던 거 같아요. 그 다음 선거부터는 결사적으로 막았지만.”

여자도 대표가 될 수 있다니 

여자가 노조 대표(지부장)가 된 것은 우리나라 노조 역사상 그 때가 처음이었다. 김광자와 동료 대의원들은 자신들이 한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 그 때는 몰랐다. ‘노동자는 대부분이 여자인데 왜 꼭 대표는 남자가 하느냐?’ 라는 지극히 당연한 의문을 품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여자가 지부장이 되니까 정말 좋더라, 이런 말이 나오게 하려고 무지 노력했어요. 진짜 딴 생각 하나도 안 하고 노동자들 이익만 생각했어요. 우리 여자들이 순수하잖아요? 월급이 오르고, 여자라고 무시당하고 욕먹고 하는 일이 없어져야 우리가 그 난리 치면서 노조 들어간 보람이 있을 거 아니에요?” 

이 후 회사는 노골적으로 노조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노조를 회사가 ‘접수’해야겠다고 결심한 듯 보였다. 경찰을 동원해서 농성 중인 조합원들을 강제 해산했다. 그 와중에 이른바 나체 시위가 벌어졌다. 가장 먼저 치마를 벗어 던지고 대열에 뛰어든 것이 그녀였다. 

“나체는 아니었어요. 우리 여자들의 맨 살을 남자 경찰들이 만지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 겉옷을 벗은 거지. 뭐, 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막 만지고 던집디다. 우리가 순진했던 거지.” 

국내외 노동단체들은 물론 외신들도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진 일. 그 덕인지 모두들 며칠 후 방면되어 나왔다. 그 사이 그들은 생각지도 않은 ‘영웅’이 되어 있었다. 

동일방직 민주노조운동사의 첫 페이지를 썼던 ‘초기’집행부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김광자와 그의 동료들은 나체시위 사건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 둘씩 퇴사하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 중 아무도 ‘유명한’ 노동운동가가 되지 않았다. 감옥에 가거나 투사가 되지도 않았다. 후배 이총각 집행부가 똥물을 뒤집어쓰고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도 이렇다 할 어떤 일도 하지 못했다. 다시 힘없고 ‘깨지 못한’ 일개 서민으로 돌아갔다. 

그 운동의 의미

김광자와 그의 친구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 때때로 만나 그 일을 이야기 했다. 

“우리가 젊었을 때 무언가 희생적인 일을 했다, 세상을 위해서 헌신했다, 그런 생각은 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자랑스럽고. 그 때 집행부 25명 중 11명이 아직도 매달 만나요. 40년이 지났는데. 형제보다 가까워요. 

그렇지만 그 뒤로 우리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잖아요.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고요. 결혼하고 아이 낳으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더라고요. 결혼한 여자는 투사가 되고 싶어도 못 돼요. 운동하려면 결혼하지 말아야지.”  

김광자는 자신이 젊었을 때 한 일에 대해 언제나 혼란스러웠다고 했다. 분명 자랑스럽고 뿌듯한 기억이지만, 한편으로는 부끄러웠다고 했다. 노동운동을 계속하지 못했기에 자신들이 했던 일의 의미 역시 한없이 희미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그랬기에 전국최초의 여자지부장 선출의 역사, 동일방직 민주노조 초기의 역사, 나체시위의 진실을 이야기해 달라는 나의 요청에 혼란을 느꼈던 것이다. 

그녀가 내게 했던 질문은, 그녀가 평생 자기 자신에게 했던 질문이고, 그녀의 동료들이 모여 함께 이야기 했던 질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구술을 통해 1972년의 동일방직 노동조합을 이야기하면서 그녀는 자신에게 스스로 대답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했던 일의 의미를.  

“구술 할 기회를 줘서 진짜 고마워요. 이제야 우리가 했던 일의 의미를 알게 된 거 같아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내게 그렇게 말했다.

글  정영훈 
자유기고가. 방송작가. 인터뷰 작가. (사)한국여성연구소 부소장. 여러 매체를 통해 인간과 세상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고 있다.「새길에서 만난 사람」「여성, 나를 말하다」「얼지마, 죽지마, 페미니즘」「한국여성운동구술기록사업」「우리 젊은 날- 구로공단이야기」등 다양한 글과 영상물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