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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건회, 유럽 민주화운동의 시작
민건회가 결성되는 1974년 이전까지의 유럽 동포사회의 일반적인 분위기는 1967년 발생한 이른바 ‘동백림사건’의 여파로 유럽인들의 한국 독재정권에 대한 여론이 상당히 비판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국내와 크게 다를 바 없이 경색되어 있었다. 그런데 1973년 11월 25일 독일에 사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불의와 독재에 대한 저항을 선언한 ‘재독 한국 그리스도인의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는 교포사회의 반독재운동을 자극시켰다. 유럽 최초의 조직적이고 본격적인 민주화운동 단체인 민건회는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태동되었다.
광부와 간호사 등 교포 노동자, 유학생, 종교인, 지식인 등 독일사회 각계 인사들이 참여한 민건회가 발표한 선언문에서 “민족의 모순과 국가의 위기를 철저히 인식하라!”고 호소하면서 “민족의 굴욕적인 예속이 다시 오기 전에, 국민이 영원히 한 독재자의 노예가 되기 전에 수수방관적 자세를 버리고, 일어나서 이성과 양심을 거스른 독재의 무리들을 물리치자!”고 호소했다. 이렇게 해서 유럽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의 공개적인 반독재운동이 일어났다.
주목할 것은 박정권의 폭압정치가 한창 진행 중이던 그때 이미 그들은 박정권 붕괴 후 전두환 정권의 출현을 미리 내다보는 것 같은 ‘예언’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체제의 개혁이 없는 단순한 정권이나 인물만의 교체를 원치 않는다. 그리고 구국을 빙자하여 일어날 지도 모를 제2의 군사쿠데타를 우리는 철저히 경계한다. 그것은 항상 민주사회를 배반하며 권력탈취의 악순환을 가져올 뿐이다.”
민건회가 독일에서 조직된 배경으로는, 국내는 3선 개헌으로 유신 독재체재의 장기화와 전태일 분신을 통해 노동자 탄압이 극치에 달하고 있었으며, 인력수출 산업의 일환으로 독일에 오게 된 당시 광부와 간호원 등 동포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이 고조된 것, 독일과 프랑스 정부의 강력한 항의로 되돌려져 온 동백림사건 관련자들의 경험 등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특히 68학생운동의 열기로 인해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그곳의 사회분위기도 영향을 주었다.
민건회는 해마다 삼일절이나 4.19에 맞춰 박정희정부의 독재에 항의하는 교포들의 집회와 시위를 가졌으며 한국의 안병무 교수, 미국의 임순만 교수, 선우학원 교수, 캐나다의 김재준 목사, 그리고 한국에서 활동하다 추방당한 조지 오글 목사나 제임스 시노트 신부 등을 초청해 한국에서의 반독재 투쟁 상황을 재독 한인들과 독일사회에 알리는 활동을 하였다.
민건회는 그밖에도 기관지『광장』(1974년 7월 15일 창간호 발간)과『민주한국』(『광장』을 1976년 1월부터『민주한국』으로 개편) 같은 간행물을 발행하여 유신체제 규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독일에서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주요 인사는 100여 명에 달했으며, 이들은 주로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뮌헨, 뒤셀도르프 등 13개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민건회는 독일 내 뿐 아니라 일본, 미국 등의 민주단체들과도 연대해 공동 심포지엄 및 성토대회를 제네바, 파리, 도쿄, 뉴욕, 워싱턴 등지에서 개최했다.
민건회는 애초 반독재투쟁에 국한한 듯 보이던 투쟁 목표를 결성 2년 후인 1976년 제2선언문을 통해 민주사회건설과 민족 자주권 회복으로 확대했다.
박정희 군부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사회를 건설하자는 당시의 당면과제 뿐만 아니라 남한 사회의 분석에 기초한 그 예속적 성격을 비판하면서 분단의 고착화를 종식시키고 남북통일을 이룩하자는 근본적인 민족자주권 회복을 주창한 것이다.
민건회는 옥중 시인 김지하 석방운동을 벌이는 한편 다른 동포 운동권과 함께 1978년 한반도 미군철수를 요구하는 데모에서 유신철폐를 외치며 유럽인의 이목을 한반도의 미국정책에 집중시켰다. 또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이 발생한 다음 날 프랑크푸르트에서 반유신 시위행진과 성토대회를 가졌다. 그리고 10월 30일에 노동자와 학생 그리고 민건회 회원 등 40여 명이 유신타도와 민주인사 석방 등을 요구하며 주독대한민국대사관을 기습하고 일시 점거하기도 했다.
1980년 광주항쟁이 일어나자 민건회는 광주사태의 진상을 외국에 널리 알리기도 했다. 세계의 여론을 이끌어 내는 게 중요했고, 국내의 정치압박과 인권유린을 중단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김대중 사형선고가 알려지자, 즉시 그의 구출운동에 나섰다. 사민당과 녹색당 등 독일 정치권 및 주로 독일인들로 구성된 코레아코미테(한국위원회)의 귄터 프로이덴베르크 오스나브뤼크 대학 총장 등 진보인사들과 연대를 꾀했고, 엠네스티 인터내셔널과도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으며 한국의 민주화와 민주인사를 구출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민건회는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반(反)박정희투쟁’이라는 일차적 투쟁목표를 상실한 이후 적지 않은 회원들이 귀국하게 됨으로써 회원이 줄었다. 초기에 참여했던 종교인들 역시 제한된 체류기간 동안의 소극적 활동으로 그치거나, 아니면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한 남북대화’라는 새로운 창구를 열면서 민건회라는 틀에서 벗어나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기통회) 등 자체운동을 벌였다. 또한 광부 간호사 출신 회원들은 「재독한인노동자연맹」과「재독한국여성모임(여성회)」등을 조직하면서 분화되어 가자 동력이 약화되어 갔다.
그러나 민건회는 군사 독재정권 타도와 민주사회 건설 주장, 노동자탄압에 대한 투쟁, 남북화해와 통일실현 등의 국내 정치의 쟁점들을 운동의 주요 내용으로 삼아 해외 민주화운동으로서 선구적인 포문을 열었다. 초기에는 독일에 취업해 온 광부, 간호사의 부당한 계약 조건과 외국인으로 이곳에서 당하는 불이익에 항의하고 그 해결책을 적극 모색하는 등 이곳 주류 동포사회의 문제와 밀착된 활동하였다. 그리고 유학생들과 지식인들 사이에 국내 정치와 사회, 민족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고무하고 영향을 주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또 독일사회에 한국문제를 알리고, 독일인과 연대하여 일하면서 그곳 사회에 한국과 아시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열고 유지시키는데 기여한 공헌도 간과할 수 없다.
한편 민건회는 결성과정이나 각종의 실천적 활동을 놓고 판단해 볼 때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이를 ‘친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많다. 민건회의 마지막 의장을 역임했던 이종수 KBS 전 이사장은 2003년「PD 연합회보」와의 인터뷰에서 민건회를 “재독 친북단체라고 일부 보수 언론들은 지칭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민건회는 1974년 유신독재에 항거하여 독일에서 결성되어 법원에 등록된 사단법인체이다. 민건회는 당시 유학생 및 종교인, 광부, 간호사 등 독일 사회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동참한 연합체라 할 수 있다. 1984년 독일에서 발행되는 한국어 신문인 ‘구주신문’에서 민건회를 친북단체라고 지칭하자 민건회 회원들이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하여 승소하자 구주신문이 정정보도를 냈다”고 밝힌 바 있다.
유럽 민주화운동의 여명 역할을 한 민건회도 지난 시기 해외민주화운동사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던 다른 단체들과 함께 새로운 역사의 조명을 받아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