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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부정선거 - 마산에서 시작된 혁명의 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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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15일, 화요일, 오전 7시.

남해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마산. 

“위원장님! 머하십니꺼! 큰일 났심더! 빨리 와보이소!” 

경남 도의회 민주당 원내총무인 정규남은 연락을 받고 황급히 투표소를 향해 달려갔다. 투표가 아직 시작되기 전이었지만, 이미 이승만 정권의 자유당이 사전에 짜둔 각본대로 소위 ‘4할 사전투표’를 위해 투표함 속에 미리 표를 넣어두고 있다는 소식에 긴가민가하며 달려간 것이다. 같은 소식을 듣고 다른 마산시당 간부들도 허급지급 달려왔다. 

투표소 입구에는 경찰과 자유당 완장을 찬 사내들이 출입을 막고 서 있었다.

“어떻게 된 거요? 사전 투표라니? 확인을 해야겠으니 들어가게 해주시오!”

정규남이 소리쳤다.

하지만 경찰과 완장 찬 사내들은 그들이 들어가는 것을 완강하게 막았다. 그 사이 투표하러 온 사람들이 투표소 앞을 가득 메웠다. 옥신각신하다가 틈을 타서 정규남과 몇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투표함을 뜯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순간, 와르르 쏟아져 나오는 투표용지 뭉치들! 

모두 경악을 했다. 설마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었다. 

곧이어 밀어닥친 경찰에 쫓기다시피 하여 오동동 당사로 돌아온 정규남은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할지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이승만 정권이 경찰과 깡패를 동원해 불법과 탈법으로 얼룩진 폭력 집단으로 변해갔다 해도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사이, 투표 통지표를 받지 못한 수백 명의 유권자들이 민주당사 앞으로 몰려와 “내 표를 찾아 달라!”며 아우성을 쳤다. 간부들과 대책회의 끝에 정규남은 마침내 오전 10시 30분 마산시당 이름으로 3. 15정부통령 선거가 무효임을 선언하였다. 곧 이어 오후 1시 30분 경남도당이 선거무효를 선언했고, 오후 4시 30분에는 중앙당에서도 무효선언을 하고 이 사실을 전국 지구당에 급전으로 날렸다.

봄이 봄 같지 않은 3월이었다. 

당시 정부통령 선거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 다름없었다.

사사오입 개헌으로 종신 대통령의 길을 열어놓은 83세의 이승만은 유일한 야당후보인 민주당 조병옥이 신병차 입원하였던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단독후보로 이미 대통령이 확정되어 있었다. 문제는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이었다. 인기가 없는 사람이었지만 고령인 이승만이 갑작스럽게 서거라도 하게 된다면 그 뒤를 이어갈 충복이 필요했다. 하지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야당인 민주당 후보 장면을 이길 수가 없었다. 이미 민심은 자유당을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방법은 단 하나, ‘할 수 있는 한 모든 폭력과 불법을 거침없이 동원하라!’ 였다.

그 최전선에 42세의 당돌하고 충성스런 최인규가 내무부 장관으로 배치되었다. 그는 취임사에서, “모든 공무원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며, 차기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기필코 자유당 후보가 당선되도록 해야 한다.” 고 공언을 한 인물이었다. 그리고는 곧 전국 시. 읍. 면. 동 단위로 ‘공무원 친목회’를 조직케 하고, 관할 경찰서 사찰계 형사와 읍장, 면장의 감독 아래 매주 1회 씩 득표공작을 점검하도록 지시하였다. 지시를 받은 이들은 주민들을 대상으로 회유하고 협박하고 포섭하는 일을 맡아 사전 부정선거를 위한 거미줄 같은 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부정선거 행동지침을 하달하였다.

1. 4할 사전투표: 선거당일 자연 기권표와 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만든 전체 유권자 4할 정도의 표를 미리 자유당 지지표로 만들어 투표함에 넣어둔다.

2. 3인조 5인조 공개투표: 미리 짜둔 3인조, 5인조 별로 조장의 확인 아래 투표하여 자유당 선거위원에게 보여준 다음 투표함에 넣는다.

3. 완장부대 활용: 자유당 완장을 찬 사람들을 여럿 투표소 주변에 배치시켜 심리적으로 압박하여 자유당에게 투표하도록 유도한다.

4. 야당 참관인 축출: 민주당 측 참관인을 매수해 참관을 포기시키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 구실을 붙여 투표장에서 축출한다. 

이와 함께 투표함 교체, 개표 시 표 바꿔치기 등으로 모든 투표구에서 자유당 후보 득표율이 85프로 이상이 되게 할 것을 지시했다. 

이것이 바로 1960년 3월 15일, 반민주적 부정선거의 대략적인 분위기였다. 바로 그런 분위기에서 맨 먼저 한반도 남녘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마산에서 마침내 울분의 첫함성이 터져나왔던 것이다.

선거무효를 선언한 정규남 도의원은 오후 3시 반경, 강경출, 황칠규 등 시의원과 다른 민주당 간부들과 함께 거리 행진에 나섰고, 당사 주변에 몰려와 있던 1천여 시민들이 이들을 뒤따랐다. 그렇지 않아도 자유당의 횡포에 분노하던 시민들은 시간이 갈수록 불어나 저녁 7시 반경에는 시청 앞에 1만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부정선거(다) 다시 하라!”

“민주주의 만세!”

“연행된 사람을 석방하라!”

도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구호를 외치며 대열을 지어 행진을 했다. 그 무렵 남성동파출소 앞에서는 시위대를 저지하기 위해 호스로 물을 뿌리며 소방차 한 대가 군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사람들은 이에 맞서 돌팔매질로 대응하였다. 날아오는 돌멩이에 놀란 소방차 운전수는 황급히 차를 버리고 뛰어내려 도망을 쳤다. 그 바람에 혼자 달려오던 소방차가 무학초등학교 앞 전신주를 들이받았다. 그 순간 ‘펑’ 하는 굉음과 함께 정전이 되면서 시내 전체가 암흑천지로 변했다.

어둠 속. 

헤드라이트로 불을 밝힌 경찰과 시위대에게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콩 볶는 듯한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경찰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억, 악, 비명소리와 함께 주변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이것이 190여 명의 꽃다운 생명을 앗아가고, 6천4백여 명의 중경상자를 낸 ‘4. 19 피의 제전’의 시작이었다. 최초의 희생자는 마산중학교 3학년 김영길이었다. 돌을 매단 채 바다에 수장되었다가 얼마 후 떠오른 4. 19 혁명의 상징, 김주열이 최루탄에 맞아 열일곱 짧은 생을 마감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놀람도 잠시 시민들의 분노는 활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앞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시민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돌팔매로 대항했다. 여학생은 스커트에 돌을 주워와 날랐다. 그러면서 학생들도 시민들도 눈물을 흘렸다. 왜 우는지 몰랐다. 그저 서러워서 울고, 분해서 울고, 격해서 울었다.

밤 9시 30분. 북마산 파출소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날아온 돌에 석유램프가 넘어지면서 불이 난 것이었다. 

“불이다! 불!”

어둠 속에 타오르는 불. 어둠을 살라먹고 타오르는 불길……

그것은 사람들의 가슴 깊은 곳에 숨겨왔던 원한의 불길이었고, 자유당 권력 앞에 숨죽이고 살아와야했던 억울한 세월에 대한 통곡의 불길이었다.

어둠 속에서 벌겋게 타오르는 불길을 보자 시위대는 더욱 흥분하였다. 그동안 쌓이고 쌓인 원한을 터뜨리기라도 하는 양 먼저 야당으로 당선되었다 변절한 마산출신 민의원 허윤수의 집으로 쳐들어가 가구를 끌어내고 기둥만 남긴 채 모두 부수어버리고, 이어서 변영두 마산 시장 집으로 몰려가서 박살을 내어놓았다. 그리고 자유당 당사, 서울신문 마산총국, 국민회 마산지부, 오동동파출소, 남성동파출소를 습격했다. 거리를 온통 흥분한 사람들의 물결로 넘실거렸다. 

기고만장하던 자유당 참관인과 유세자들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완장을 차고 거들먹거리던 깡패들도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흥분한 시위대는 분노의 출구를 찾아 캄캄한 밤거리를 몰려다녔다.

전열을 정비한 경찰은 누군가의 지시로 다시 지프차와 소방차를 총동원하여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총을 난사하기 시작하였다. 무차별 총격 앞에 시위대는 삽시간에 기세가 약해졌다. 밤 10시경, 2백여 명이 마산상고 뒤 용마산에 집결하였다가 포위망이 좁혀져오자 근처에 있은 성호동 교회에 불을 지르고 가까스로 탈출을 하였다. 경찰은 손전등을 비추며 골목골목을 샅샅이 뒤져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을 가차없이 연행하였다. 경찰서로 끌려간 시민들은 뒤이어 미처 날뛰는 경찰에게 무자비한 고문과 폭행을 당하였다. 

밤 11시 30분. 이로서 3. 15 부정 선거에 항거하는 마산의 궐기는 일차 진압되었다. 9명이 죽고 80여 명이 중상을 당한 피의 화요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부터 시작될 피의 제전의 서막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튿날, 국무회의는 마산시위 관련자들을 형법과 국가보안법으로 엄벌을 하겠다고 발표를 하였다. 대통령 이승만은 보고를 받고, “철없는 어린 것들이 공산분자의 조종을 받아 개탄할 난동을 부렸으니 엄단에 처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같은 날 이에 맞장구 쳐 내무장관 최인규는, “마산사건은 폭동, 방화, 소요사건이며, 공산당이 개입되었다면 내란에 속한다.”고 한술 더 떴고, 치안국장 이강학은, “마산소요 사건은 공산당 수법에 의해 이루어진 증거가 있어 배후에 공산당 개재여부를 조사 중.” 이라고 발표하였다. 

반공논리를 내세운 협박과 공포분위기 조성. 그 후 수십년 동안 대한민국 국민들의 민주적 열망을 짓밟고, 검은 유령처럼 떠돌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날 시위에 참가했던 부상자들은 물론 가족들도 이런 공포 분위기 속에 무서워서 병원에조차 갈 수도 없었다. 

부정선거의 당사자였던 부통령 후보이자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이기붕은 그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총은 쏘라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이 아니다.”

누가 누구에게 준 총이며, 또 누구를 향해 쏘라는 말인가?

하지만 시위를 떠난 화살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대한변호사협회에서는 급히 ‘마산사건 진상조사단’을 파견했고, 용감한 기자들과 양심적인 일부 검사들도 3월 15일 마산에서 벌어진 일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3월 23일 이승만의 충견인 내무장관 최인규가 물러나고, 이어 이강학이 해임되었다. 그리고 시위관련 구속자 중 정남규를 제외한 전원을 석방하고, 박종규 경위 등 경찰 5명을 발포혐의로 구속하였다. ‘토사구팽’, 토끼를 잡았으니 사냥개 몇 마리만 구워먹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이승만과 같은 독재권력이 늘 써먹던 바로 그 수법이었다. 그래서 끝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한번 댕겨진 불길은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그리고 가슴과 가슴을 통해 바야흐로 전국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저 역사적인 1960년 4월 19일, 거대한 활화산으로 폭발할 혁명의 그 날을 향해……

글 김영현(소설가)
1984년 창작과비평사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로 등단,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해남 가는 길>, <내 마음의 망명정부>, 장편 <풋사랑>, 시집 <겨울 바다>, <남해 엽서>등이 있다. 제23회 한국창작문학상 수상, 실천문학사 편집장 역임, 한신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하다가 현재는 양평에서 창작과 공부에만 열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