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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깨어나자, 그리고 싸우자! - 민통련 민족학교

“아니, 뭐하자는 거예요? 우리가 시위를 했어요, 농성을 했어요? 우리는 그냥 배우자고 찾아온 사람들이란 말이예요.”

아줌마 한 분이 큰소리로 항의를 했다. 

마이동풍. 한겨레신문 광고란에 손톱만큼 난 ‘민통련 부설 민족학교’ 강좌 소식을 듣고 온 사람들은 강의실이 있는 분도회관 앞에 모여 입구를 막고 있는 전경들과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무전기를 든 사복 경찰이 삐삐거리며 쉴 새 없이 어디론가 통신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학교장인 조그만 체구의 문학평론가 김병걸 선생이 나와 “시민을 대상으로 강좌를 여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이처럼 막는단 말이오?” 하고 젊잖게 소리를 쳐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저녁 6시에 열기로 되어있는 강좌 시간은 벌써 일곱 시를 넘기고 있었다. 

“태수야, 어떡하지?”

대학생 동철이 친구 태수에게 걱정스런 눈빛으로 물었다. 겁이 많은 태수는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까 조마조마했던 것이다.

“걱정 마. 아까 저 사람 말처럼 배우자고 찾아온 사람들한테 무슨 일이야 있겠니? 일제 강점기에도 학교를 열어 사람들 가르치는 것은 막지 않았잖아.”

“하긴 그렇긴 하지만.....”

평소 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로 마음에 차지 않아 좋은 강좌가 없을까, 하고 찾고 있던 태수는 한겨레신문에 난 작은 광고를 보고 어렵게 같은 과 친구 동철을 꼬셔서 함께 왔다. 그런데 첫날 개강도 하기 전에 이런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민통련 부설 민족학교

일제시대 뜻있는 항일 애국지사들이 사제를 털어 만주에 세웠던 민족학교와 같이 새로 다가올 민주시대에 걸맞는 시민을 키워내자는 야심찬 기획으로 만들어진 학교였다. 자원봉사로 나설 실력있고, 명망있는 강사는 충분했다. 하지만 장소가 문제였다. 돈도 돈이었지만 어느 누가 선뜻 그런 좋은 일에 쓰라고 장소를 빌려줄 건물주가 없었다. 설사 그런 뜻이 있거나 아무것도 모르고 빌려주었다 해도 다음엔 당국의 집요한 협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가까스로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분도회관 지하를 얻었는데 그것마저 이 꼴이 나고 만 것이었다. 옥신각신하던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가벼운 와,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쪽을 보니 한복을 입고 뿔테 안경을 쓴 노인이 다른 사람 몇 명과 함께 걸어오는 게 보였다.

“문익환 목사님이다!”

태수가 동철의 귀에다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응? 문 목사님?”

태수의 말에 동철은 자기도 모르게 약간 흥분되는 가슴을 누르며 그쪽을 쳐다보았다. 뛰어난 신학자이자 1980년대의 중심을 온 몸으로 싸워온 투사 문익환. 흔히 ‘문목’ 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그 사람.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키가 크고 잔주름이 많은 넓은 이마엔 부드러운 미소 같은 게 흐르고 있었다. 문익환 목사는 당시 민통련 의장을 맡고 있었는데, 민족학교가 개강도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던 것이다.

“여러분!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어 찾아와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강의실은 막혀있고, 우리는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만 그것 또한 우리가 우리 시대를 배우는 귀중한 시간이고 여러분은 그 증인입니다.”

계단에 서서 문익환 목사의 즉석 연설 겸 강좌가 열렸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우리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먼저 무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무지의 상태로 두려고 하는 저 못된 권력에 대항해 싸워야합니다. 무지란 노예 상태를 말해요. 주인은 언제나 노예가 뭘 알까 노심초사하죠. 알면 대드니까요.”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래서 민족학교를 열어 통일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보고, 자주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경제에 대해서도 공부 좀 해보자는 것인데 그게 무서운 건지 이렇게 문을 틀어 잠그고 난리를 피우는군요. 여러분! 그러나 배우고 가르치겠다는 우리의 열정이 어디 가겠습니까? 오늘 못하면 내일하고, 내일 못하면 모레하면 되지요. 안 그렇습니까?”

일제히 “예!”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두어 시간 옥신각신 하느라 답답했던 가슴이 문목사의 즉석 강의 아닌 강의에 조금 후련해진 느낌이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내일을 약속하며 삼삼오오 뒷골목 막걸리 집을 찾거나 집으로 흩어졌다. 

“오늘 문목 말씀 중에 기억에 남는 건, 주인은 언제나 노예가 뭘 알까 노심초사한다는 대목이었어. 넌?”

돌아가는 길에 동철이 말했다.

“응. 나도. 그래서 히틀러 같은 독재자는 먼저 언론을 장악하고 교육을 통제하여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아놓잖아. 알면 위험해지니까.” 

“그래도 이렇게 작은 강의조차 못하게 막는다니 좀 이해가 되질 않아.”

“그만큼 지금 이 정권이 민주화 세력에 알레르기 반응을 하고 있다는 반증이겠지.”

“암튼 문목사님 즉석 강의는 좋았어! 멋도 있었고 말야!”

동철이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1985년 3월 29일

서슬 푸르던 전두환 군사정권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무렵, 당시 여기저기에서 일하고 있던 모든 민주세력이 집결해 하나의 통일된 단체를 만들었다. 철옹성 같은 독재 권력과 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전국적인 단체였다. 그 이름이 바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즉 ‘민통련’이었다. 민통련에는 직능별 각 부문운동과 지역별로 활동하는 지역 활동가, 그리고 민주운동의 일선에서 헌신해 온 명망가가 모두 포함되었다. 그리고 의장에 문익환 목사, 부의장에 계훈제, 백기완 선생 등이 선임되었다. 모두에게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또한 신명나는 시절이기도 했다.

당시 가톨릭노동사목에서 일했던 윤순녀는 그때의 신났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하였다.

“1985년 민통련이 출범한 이후, 우리 노동사목 장충동 사무실은 점심시간이 되면 민통련 식당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문익환 목사님, 계훈제 선생님 등 운동권의 어르신들과 이창복, 임채정, 장기표, 김종철, 이부영, 박용수 선생님들이 오셔서 사무실 텃밭에서 가꾼 상추, 쑥갓, 등으로 얼마나 맛있게 잡수시는지.... 그분들의 가난한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며 점심 한 끼라도 같이 모여서 배부르게 먹으면 그만큼 서로 힘이 될 거라고 믿으며 정말 없는 반찬이지만 사랑의 마음으로 기쁘고 즐겁게 식사준비를 했습니다. 그때 같이 일했던 사람들 모두 함께 하는 공동체로서 기쁨을 느끼고 보람을 느꼈어요. 정말이지 민통련에 가면 사람 사는 세상으로 북적거렸고, 살맛이 난다는 말이 나왔죠. 데모하다 얻어맞고 터지고 와서는 다음 날 또 거리로 나서는 모습을 보면 실로 운동이 축제였던 것 같았어요. 문익환 목사님이 데모대에 앞장서서 경찰과 대치하실 때 힘이 어찌나 장사였던지 온몸으로 밀어제끼시면 젊은 경찰들도 뒤로 밀려나곤 했지요. 계훈제 선생님은 늘 건강이 안 좋으셔서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다니셨고, 박용수 선생님은 한쪽 팔에 보도사진기자 완장을 차고 종군기자처럼 거리를 누비면서 사진을 찍다가 감옥과 유치장에 여러 번 다녀오셨어요. 그래도 나오시면 곧 지치지 않고 또 훨훨 날아다니셨어요.” 

운동이 축제 같았던 시절. 모두가 배우고, 깨어나고, 싸우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신명나던 싸움의 절정은 1986년 5월 3일 인천에서 벌어졌다. 직선제 쟁취 현판식이 열리던 인천 시민회관 앞 사거리에 수천수만의 군중들이 집결하였다. 노동자에서부터 농민, 학생, 일반 시민 등. 그리고 수많은 전경 부대들과 시가전을 방불케하는 일대 공방전이 벌어졌다. 이것이 이른바 ‘5.3 인천사태’ 였다.

이날 시위를 주도하였던 민통련의 간부들은 모두 구속되거나 수배되었다. 민통련이 세들어있던 사무실은 용접기와 해머를 동원한 경찰에 의해 철문이 종이짝처럼 구겨져 떨어져나가고 산산히 부셔졌다. 어렵게 이룬 그동안의 조직력과 신명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어 날아갈 처지가 되었다.

적막강산

그러나 역사의 바퀴는 자갈길, 진흙길을 가리지 않고 굴러가는 법이다.

87년 1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터졌고, 또다시 눈물 어린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6월 항쟁을 승리로 끌어내었다. 

“그래도 그 시절엔 꿈이 있었어.”

이제 나이가 사십에 이른 태수가 친구 동철에게 말했다. 

“그랬지. 그게 지금 생각해보면 뭐 대단한 강의도 아니었는데 추운 겨울날 거기까지 찾아가 들으려고 모인 사람들, 우리도 그 틈에 있었잖아. 경찰들은 못 들어가게 막고....”

동철이 추억에 잠긴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도 그날 문목사님을 뵌 것은 행운이었어. 그때 그 분이 했던 말 기억 나? 주인은 언제나 노예가 뭘 알까 노심초사한다는 말....”

“그럼. 기억나고말고. 그 후 그게 나의 인생 좌우명이 된 걸. 배우고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우리의 역사가 말해주잖아.”

“암. 그 분은 꿈이 많았던 분이셨어. 그 꿈 한 자리 가지고 평생을 살다 가셨으니 말이야. 그 분이 남긴 시 한번 읽어볼까?”

동철이 주머니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어 읽어가기 시작했다. 

“꿈을 비는 마음, 문익환 지음. 개똥같은 내일이야, 꿈 아닌들 안 오리요 마는, 조개 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에서 저도 몰래 남도 몰래 자라는, 진주 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 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

천천히 낭송하는 동철의 목소리가 젖었다. 태수는 시를 들으며 지난날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니 벗들이여! 보름달이 뜨거든, 정화수 한 대접 떠놓고, 진주 같은 꿈 한자리, 점지해주십사고, 천지신명께 빌지 않으려나! 벗들이여.....”

글 김영현(소설가)
1984년 창작과비평사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로 등단,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해남 가는 길>, <내 마음의 망명정부>, 장편 <풋사랑>, 시집 <겨울 바다>, <남해 엽서>등이 있다. 제23회 한국창작문학상 수상, 실천문학사 편집장 역임, 한신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하다가 현재는 양평에서 창작과 공부에만 열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