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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수를 기억하다
1986년 5월은 광주항쟁에 대한 추모와 분노의 열기가 정점에 달한 시기이면서 동시에 민주화운동에 대한 정권의 탄압이 극에 달한 때였다.
1986년 5월 20일, 서울대에서 5월제 행사의 일환으로 문익환 목사가 "광주항쟁의 민족사적 재조명"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었다. 이때 학생회관 4층 옥상 난간에서 "파쇼의 선봉 전두환을 처단하자" "폭력경찰 물러가라" "미제국주의 물러가라" "어용교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고, 곧 한 사람이 불덩이가 되어 아래로 떨어졌다. 문익환 목사는 자신의 눈앞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가 뛰어내리는 장면을 보고 숨이 막혀버릴 것만 같았다. ‘제발 죽지 말고 살아서 싸우라는’ 어머니 김신묵 여사의 말씀을 학생들에게 전하려던 참이었다. 이재호 열사, 김세진 열사를 보낸 5월이었다.
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진 이는 원예학과 1학년 이동수였다.
이동수는 운동권 학생이 아니었지만 최루가스가 난무하고 경찰이 교내에 상주하는 현실에 숨막혀했다. 그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정치나 사회현실에 대한 대화를 나눌 때, 말없이 들어주는 편이었다. 자신의 신념을 밖으로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불의에는 굴복하지 않았고 폭압적인 시대의 요구에 맞섰다. 그가 군복무 중이던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당시 군간부들은 야당을 찍은 '반란표'가 나오면 철저히 응징하겠다고 공언하고 다녔다. 이동수는 고분고분하게 여당에 투표를 하느니 차라리 구타당하는 쪽을 선택했다. 복학 후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유인물을 돌리다가 경찰에 잡혀 운동권 학생으로 오인되어 고문을 당한 일도 있었다.
5월제 행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이동수가 자신은 학교를 그만둘 것이라고 하며 친구들에게 이별주를 마시자고 해 학교 뒷산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고 과대표에게 편지 한 통을 건넸다. 그것이 유서였음을 그때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언론은 이동수의 죽음을 ‘비운동권의 죽음’이라고 보도했다. 학생운동 조직에서 활동해 본 적 없는 대학생이 왜 분신했는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불의한 시대를 고뇌하고 성찰하며 시대의 부름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 열사였다. 그가 남긴 유서를 통해 시대의 부름에 응답하지 못하는 혹은 자기의 방식으로 응답하기 위한 고뇌의 시간이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자기결정에 이르는 과정 또한 그러했음이 짐작된다. 그의 유서 중 일부를 옮긴다.
"이 몸이 현실을 극복한 것은 아니지만 어떠한 논리의 테두리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논리 자체를 아무런 근거없이 거부하거나 추종한다면 그러한 사람의 대학생활은 맹목적인 행동으로 표현될 것이고 그 결과 떨져버릴 수 없는 과거만이 그 사람을 반길 것입니다.
우리는 제도의 불합리와 불의를 한탄하며 앉아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도에 맞선 자기 실존의 의식의 문제이며 그리고 제도에 앞선 자기 실천의 문제이며 자기의 의식이 지향하는 바를 표현할 수 있는 용기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1987년 이한열의 장례식에서 문익환 목사가 온 몸으로 절규하며 외친 26명의 ‘열사여’는 민주영령들에 대한 초혼가이자 진혼곡이다. 언제 다시 들어도 가슴 깊숙한 곳에서 되치고 올라오는 어떤 묵직한 덩어리이다. 슬픔이라고 해도 모자라고 분노라고 해도 모자라고 폐부를 찌르는 절창이라고 해도 모자란다.
(…) 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장준하 열사여, 이동수 열사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