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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화사업

전두환 정권은 시위을 주동한 학생을 비롯하여 학생운동과 관련된 학생들을 강제 징집해 학생운동의 경력을 반성하고 군사독재 체제를 긍정하도록 역 의식화한 다음 학원프락치로 이용했다. 이를 두고 그들은 녹화사업이라고 불렀다. 사상이 불온하다고 지목한 학생들을 강제로 징집해 특별교육을 시키고 학생운동도 차단하겠다는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문제 학생으로 규정한 학생들, 특히 시위현장에서 체포된 학생들을 경찰서에 연행하여 조사한 후 바로 입대시켰다. 학생들은 병역법에 규정되어 있는 정상적인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가족들과 단 한 번의 만남도 가지지 못하고 수사기관에서 곧장 입대하게 되었다. 신체검사로 받지 않은 채 강제 징집된 학생들은 대부분 시위현장에서 체포된 시위단순 가담자이거나 뚜렷한 혐의 사실도 없이 문제 학생으로 지목 당한 학생, 야학활동을 했던 학생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개인의 건강 등 신변상의 조건이나 문제로 현역입영 대상이 되지 않는 학생도 포함되었다. 현역 대상이 되더라도 재학 중에는 입대를 연기할 수 있었지만, 모든 정상적인 규정과 절차에서 배제되어 강제로 자원입대동의서를 쓰도록 강요당했다.


이렇게 느닷없이 군대에 끌려간 학생들은 ‘특수학적변동자’가 되어 녹화사업의 대상이 되었다. 학생들은 보안부대에서 15일에서 30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많은 양의 자술서를 반복적으로 써야 했고 입대 이전의 활동사항, 선후배 관계, 동아리의 활동에 대해 집중적인 조사를 받았으며 가혹행위를 당하기도 했다. 일부에게는 특별휴가가 주어져 학교 선후배를 만나 학내외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그들은 수집한 정보를 보안부대에 보고해야 했다. 이른바 학원프락치로 활용되었다.

녹화사업은 보안사령부, 치안본부, 안기부, 문교부, 검찰, 대학 등 권력기관이 총동원되어 진행되었다. 강제 징집된 학생들은 협박과 회유, 고문 등으로 심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공포를 겪어야 했고 프락치 공작에 노출되거나 이용된 것에 대한 양심의 갈등에까지 내몰려야 했다. 

녹화사업으로 강제 징집된 6명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이에 한국기독교학생회총연맹(KSCF),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등 8개 학생 청년 단체로 구성된 강제징집조사위원회는 1984년 4월 12일, 강제징집 문제에 대한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정부에게 책임 있는 진상규명과 해결을 촉구했다. 그러나 6월 11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국방장관 윤성민은 "문제 학생들의 징집은 강제징집이 아니라 본인의 지원의사에 따라 조기입영 조치되었다"고 하여 강제징집의 불법성을 은폐하고 오히려 강제징집에 대하여 국민들의 오해가 없도록 적극적으로 홍보하겠다고 했다. 국방장관이 녹화사업을 계속하겠다는 뜻을 표명하자 강제징집조사위원회는 윤성민 국방장관 발언에 대한 긴급 성명을 발표하여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의 즉각 중단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였다. 녹화사업은 공식적으로 1981년부터 1983년까지 진행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노태우 정권 시기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