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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로 쓴 조사(弔詞)

1977년 11월 23일 리영희 선생은 반공법 위반으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다가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 하에서 대학생들에게 널리 읽혔던 그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 을 문제 삼았다. 유신정권은 그의 책들을 대학생 의식화의 바이블로 간주했다.

그가 기소된 날 12월 27일에 그의 모친이 돌아가셨다. 임종도 하지 못한 불효자 리영희는 말할 수 없는 회한과 슬픔이 밀려왔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감옥 밖에서 변호인단과 민주화운동 동지들이 청와대에 탄원서를 넣어서 장례식에 분향이라도 할 수 있도록 힘을 썼으나 박정희 정권은 끝내 거절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밤, 그는 밥과 사과 한 알, 시인 김지하가 몰래 보내준 사탕을 놓고 감방 제사를 지내야 했다. 상주가 없는 장례식이 그의 집에서 진행되었다.

리영희 선생은 이발을 하고 나오다가 갑자기 연행되는 바람에 어머니에게 어디에 간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끌려와야 했다. 그의 아내는 아들을 찾는 어머니에게 “학생들과 제주도에 갔다가 풍랑을 만나 못 온다”고 둘러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돌아가셨으니 그의 심정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차가운 감옥에 묶여 어머니 영전에 올린 엽서 속의 눈물에 번진 글자들이 그의 슬픔을 말해준다. 발인 전에 배달되기를 바라며 엽서를 써 보냈으나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엽서에는 12월 30일자 광화문 우체국 소인이 찍혀있다.

"어머니 영전에 바칩니다. 평소에 불효자식이더니 끝내 세상을 떠나시는 자리에서 임종도 못한 죄인이 되었으니 한만이 앞섭니다. 어디로 간다는 말씀도 드리지 못한 채 나와 지금 이곳 몸의 자유를 잃고 있는 그동안 어머니가 아들을 찾는 소리와 그 몸짓을 늘 듣고 보는 듯하였습니다. 좁은 방속에 주어지는 음식, 과일을 고여 놓고 멀리서 하루 세 번 어머니의 명복을 비오니 부디 극락 가셔서 먼저 가신 아버지를 만나 영원히 행복하시옵소서."

1983년 리영희 선생이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사건에 연루되어 두 번째 남영동에 연행되었을 때 대공분실 치안감 박처원은 그를 자기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는 그의 모친이 돌아가셨을 때 최소한 분향이라도 하게끔 잠시 나갈 수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못하게 막은 것이 자기라는 무용담을 그에게 직접 들려주었다. 박처원은 1987년 6.10민주항쟁의 물꼬를 튼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의 은폐 축소 조작에 가담한 주요 인물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