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글자 크기 조절

사상계와 삼류 시인

그는 분명 삼류시인이었다. 아무도 그가 쓴 시를 본 적도 없었거니와 심지어는 그가 자칭 시인이라는 사실을 극히 주변의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는 이도 없었다. 아니, 그렇게 인정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분명히 시인이었다. 1980년대에 결성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모임은 물론 그 후의 ‘작가회의’ 모임에도 어김없이 절룩거리는 다리를 끌며  나타나곤 했던 것이다. 그는 한쪽 다리를 지독하게 저는 장애인이었다.

“저 친구, 등단한 시인은 맞아? 어디로 등단했는지는 알아?”

등단한 자격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퍽이나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곳이 문단이란 바닥이었다. 등단을 했다하더라도 유력한 신문의 신춘문예나 유명한 문예지를 통해 했다면 대우가 달라지는 것이 또한 문단의 풍토였다. 그러니 아무런 검증 과정도 거치지 않은 지방 동인지 수준의 시인이라면 멸시는 아니더라도 푸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몰라. 들리는 말로는 사상계 출신이라고 하더라만...”

“사상계...?”

“응. 그렇다더만.”

사상계라면 좀 달랐다. 비록 전문적인 문예지는 아니었지만 아직 『창작과 비평』이나 『문학과 지성』과 같은 문예지들이 등장하기 전에는 발표할 지면에 굶주려있던 문인들의 숨통이기도 했고, 소통의 장이기도 했다. 1953년 전쟁의 상흔 속에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국민을 위해 민족의 앞길을 예비한다.”는 명분으로 장준하 선생의 주도로 창간된 『사상계』는 담론 부족으로 허덕이던 당시 지식인 사회의 유일한 수원(水源)이었다. 거기에는 사회, 역사, 철학뿐만 아니라 시와 소설을 비롯한 문예란의 비중도 적지 않았다. 초대 편집주간으로 소설가 김성한을 앉힌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상계는 나아가 1952년 2월호를 문학 특집으로 엮으면서 ‘사상계 신인상’ 제도를 신설했다고 사고(社告)로 알렸다. ‘문학계의 고질화한 파벌의식을 타파하고 올바른 민족문화의 문을 열어보자’는 뜻이었다. 그 이후 ‘사상계 신인상’이라는 관문을 통해 유능한 문인들이 배출되었다. 이청준, 서정인, 황석영 같은 쟁쟁한 소설가와 강태열, 임종국 같은 시인들이 바로 그곳을 통해 배출되었다. 그 중의 임종국은 후일 ‘친일문학론’을 정리하여 친일문학 연구의 길을 열어준 사람이었다.

그가 그런 사상계를 통해 등단했다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상계는 1970년 5월 통권 205호로 폐간된 지 오래였다.

“저 친구가 언제 나왔대? 정말 사상계 출신은 틀림없어?”

“몰라. 자기 말로는 그렇다고 하는데... 나도 직접 들은 건 아닐세.”

그런 쑥덕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민주화 열기로 뜨겁던 1980년 내내 문학인들의 집회 장소에 절룩거리는 다리를 끌고 꼭꼭 얼굴을 내비추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시를 낭송하거나 연설을 하는 역할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머리수나 채웠다가 뒤풀이에서 술에 취해 떠들다 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는 늘 빈털터리로 가난하였고, 유식하지도 않았고, 가방끈도 짧아서 선배니 후배니 하는 그룹도 없었다. 따라서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는 외돌토리 늙은 노총각 삼류시인이 분명하였다. 

“어이, 정 시인. 정 시인이 등단할 무렵 사상계의 형편은 어땠나요?”

어느 날 나는 우연히 그와 술집에서 마주 앉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그와 말을 나눌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었다. 내친 김에 나는 평소 궁금해마지 않았던 바를 지나가는 투로 슬쩍 떠보듯이 꺼내어보았다.

“사상계 시절이라...”

그러자 그는 막걸리로 입술을 한번 축인 다음, 마치 긴 회상에 잠기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 나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요. 십대 후반이었으니까 소년과 청년 중간쯤이랄까. 그때 나는 문정제책사라는 작은 제책사에서 직공으로 일하고 있었지요. 당시에는 책을 만드는 일이 귀할 때라 출판사나 제책사나 모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지요. 그런데 사상계 잡지를 바로 그 문정제책사에서 만들었습니다. 거기 박종호 사장이랑 장준하 선생은 각별한 동지적 관계였으니까요.”

그는 한동안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이어서 말했다.

“사상계는 그 당시 정말 지식인과 대학생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언론다운 언론도 없고, 잡지다운 잡지가 없었던 시절이라 정론에 목말랐던 사람들에게 정말 한 가닥 젖줄 같은 존재였지요. 함석헌, 정병욱, 천관우, 법정, 김동길, 안병무, 계훈제 같은 분들의 글을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잡지였고, 이승만, 박정희 정권에 정면으로 맞서서 민주주의적 가치를 외치던 유일한 공간이었습니다. 처음엔 3,000부에서 시작한 발행부수도 나중엔 1, 2만부 4.19무렵엔 5, 6만부를 찍었다는 말을 들었어요. 지성인이 되려면 사상계를 읽으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걸 끼고 다니는 것이 대단한 자랑거리였지요.”

그는 마치 자기가 발행인이나 편집자라도 된 양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러니 자연 당국의 감시와 핍박이 집요하게 따라 붙었지요. 제가 아직 거기 제책사에 들어가기 전,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6.3데모가 한창이던 때 1964년 4월호에 ‘한일회담반대 선전 유인물’을 삽입하고 제본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를 탐지한 경찰 정보계통에서는 이를 저지시키려고 잡지 출고 전 날에 시경과 각 경찰서에서 차출한 시경정보계 형사를 포함해 총 9명이 들이닥쳤다더군요. 사상계 출고 금지 명령이 떨어졌던 거죠.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제가 있을 때도 사상계 잡지 제작과 판매에 관련된 업체 곧 인쇄소, 제본소, 도소매 서점 등 관련업계에 대한 방해와 압력이 더 거세져서 제작을 할 수가 없게 만들었어요. 관련업계에서는 불가피하게 제작을 기피하게 되니 잡지를 발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세무사찰 한답시고 제책사의 장부를 압수해 가는 등 압력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악명을 떨쳤던 박정희 정권의 정보당국은 사상계를 언론정책상 정면으로 탄압하지 않고 잡지발행의 근본을 끊는 방법으로 서점에서 팔지 못하게 하고 그 잡지를 월말에 다시 출판사로 되 보내는 반품작전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반품 받은 잡지는 제작 출고했던 문정제책으로 되돌아와 재단기에 다시 토막 내어 파지로 버리는 신세가 되었는데 바로 그 일을 그때 제가 하게 되었지 뭡니까.”

그의 얼굴이 다소 비장하게 변했다.

자금 회전이 안 되니 정기간행물인 사상계는 매월 정기적으로 발행하지 못하게 되고, 사정을 모르는 정기독자(그 당시 2만 정기독자)들로 부터는 강한 비난을 듣게 되었다. 이리하여 정기간행물 등록이 취소될 처지가 되자 급한 대로 우선 50페이지짜리 납본용을 몇 부만 인쇄 제작하여 납품함으로써 잡지의 명맥을 유지하고 판권을 지킬 수 있었다고 했다. 당시 정기간행물은 연 3회를 발행하지 못하면 당시 문공부 출판규정에 의하여 잡지는 폐간이 되었다.

“그땐 나도 젊었고, 젊은 열기가 정의감으로 불타고 있었지요. 게다가 심부름 차 사상계 사무실을 찾아갔다가 사상계를 창간하신 장준하 선생을 비롯한 어른들을 뵈었는데 그 분들이 풍기는 인품에 나도 모르게 저절로 마음에 깊은 감동을 느끼곤 했답니다. 그리고 저도 그 잡지에 글을 실을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영광일까 하고 생각했어요.” 

그의 얼굴이 소년처럼 밝게 빛났다.

“그래서 독자 투고로, 일부러 다른 이름으로 어쭙잖은 시를 한편 써서 보냈는데... 아아, 그게 실렸지 뭡니까?”

그는 스스로 감동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시다시피 나는 별다른 재주도 없고, 그 후 시라고 할 만한 것을 발표한 적은 없었지만 그 순간부터 스스로 사상계 출신 시인으로 자처하게 되었지요. 비록 기성 빛나는 시인들에게야 비교할 바도 못 되지만... 괜히 저로 인해 문단에 누를 끼친 것이 있다면 죄송합니다만... ”

그리곤 쑥스럽게 웃었다.

“아, 아뇨! 무슨 말씀을...”

나는 마치 문단을 대표하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황급히 그의 말에 손을 저었다. 

말을 마치자 그는 다시 절룩거리면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쫒다가 불현듯 어쩌면 그이야말로 진정으로 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숨은 시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 김영현(소설가)
1984년 창작과비평사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로 등단,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해남 가는 길>, <내 마음의 망명정부>, 장편 <풋사랑>, 시집 <겨울 바다>, <남해 엽서>등이 있다. 제23회 한국창작문학상 수상, 실천문학사 편집장 역임, 한신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하다가 현재는 양평에서 창작과 공부에만 열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