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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나 있는 사람, 이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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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좀 작았다. 150센티미터 정도. 그래서 사람들 속에 섞이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있으나 마나예요. 나는 어디 있으나 잘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그는 어디에나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인권운동사에서 그의 이름을 적지 않은 페이지가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반유신 투쟁, 기생관광 반대, 성매매 반대, 일본군 ‘위안부’문제, 부천서 성고문사건, 박종철고문치사사건, 87년 6.26국민평화대행진, 최루탄추방운동, 가족법 개정, 성폭력 관련 법 제정, 재일원자탄피해자 인권문제, 남북한 여성 교류, 평화와 군축운동, 통일운동... 2002년 5월,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도 그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한 두 부문의 일만으로도 벅찼을 엄청난 분량의 일을 그는 평생에 걸쳐 묵묵히 감당해냈다. 마치 ‘힘없는 자를 위한 일이라면 누구든 무슨 일이든 나를 마음껏 이용하십시오.’하듯 자신을 거저 내주었다. 그가 믿는 신이 그랬듯, 그도 그렇게 했다.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과 함께 민주노조운동을 했던 ​조화순 목사는 ‘동일방직·원풍모방·남영나일론·성도섬유·YH 등 여성노동자들 사건만 터지면 이우정 교수에게 부탁을 했다. 성명서 내달라, 지원 좀 해 달라, 경찰이고 법원이고 다녀달라, 오셔서 한 말씀 해 달라...빨갱이로 몰리니 무서워서 감히 아무도 나서지 못하는 그런 때였는데, 그는 언제나 부탁을 들어주었다.’ 라고 회고했다. 

모든 곳에 있는 사람

잘 알려져 있듯이, 그의 할아버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 『자유종』의 작가 이해조이다. 그의 아버지는 스러져가는 성리학의 이념을 곧추 세우고자 했던 마지막 유생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유년기와 10대 시절을 할아버지가 뿜어내는 자유와 계몽의 기운, 아버지가 애써 지키고자 했던 삼강과 오륜의 질서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며 보냈다. 그런 그가 발견한 새로운 세계는 기독교였다. 친구를 따라 간 교회에서 그는 평등, 평화, 생명, 민족의 독립 등 세상을 살아갈 자신만의 키워드를 찾아냈고, 그것은 그의 평생을 지배하는 바탕이 되었다. 

그는 김재준 목사의 권유를 받아들여 캐나다의 엠마누엘 신학대학으로 유학을 갔고, 1953년 돌아와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교수로 임용되었다. 1970년 학내 문제로 사표를 내기까지 그는 학생들에게 헬라어와 성경을 가르치는 교수로, 기숙사에 입소한 학생들을 따뜻하게 보살피는 어머니 같은 사감으로 그야말로 조용하게 살았다. 그는 신학생 시절에도 유난히 말이 없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의 옛 이름) 시절, 여학생은 단 둘 뿐이었는데, 시각장애인이었던 양정신의 손을 잡고 함께 다니는 이우정을 두고 신학대학 동창들은 시각장애인과 농아장애인이 함께 다닌다고 생각했다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1970년 해직 교수가 아닌 사직 교수가 된 내력을 보면 그의 품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한신대 학내 분규로 모든 교수가 사직서를 낼 때, 이미 다른 일로 ‘찍혀서’ 사직서를 내기 곤란하다는 한 교수를 이우정이 설득했다. 이후 분규가 해결되어 다들 사직서가 반려되었으나 그 ‘찍힌’ 교수만 반려되지 않았다. 이우정은 자신이 설득한 책임이 있다며 다시 사직서를 냈다. 

그렇게 신학대학의 교수직에서 물러났지만, 그때부터 그는 이전의 이우정이 아닌 새로운 이우정이 되어 거리의 교수, 세상의 교수가 되기 시작했다. 여성노동자의 친구를 자청했고, 민청학련 관련자의 후원자가 되었다. 1976년 3월1일, 명동성당에서 종교인과 정치인, 지식인이 모여 유신독재를 비판하는 민주구국선언을 할 때는 앞장서서 선언문을 낭독했다. 정부가 실제적으로 주도하다시피 하던 기생관광을 앞장서서 반대하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기도 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여성운동의 중요한 의제로 만들어 전시 성폭력 반대 평화운동에 기여한 것도 그였다. 가정폭력, 성폭력 등 여성관련 폭력을 막는 특별법 제정에는 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한국여성단체연합의 대표로, 또는 국회의원으로 그 역할을 해냈다. 거리의 교수로 나섰던 1970년부터 그가 세상과 작별한 2002년까지 30년 넘는 세월을 그는 ‘짓밟힌 자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는 사람’으로 살았고 그가 한 일은 평화, 통일, 생명, 인권이라는 결실을 하나씩 맺기 시작했다. 

역사적 장면 두 개

그가 있었던 수많은 역사적 장면 중 두 가지만 되짚어 보자. 

1987년 1월 대학생 박종철의 죽음에서 시작된 반군부독재의 작은 물결이 대중과 함께 하는 거대한 파도로 바뀌는 데 그는 큰 역할을 했다.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대표단이었던 이우정은 국본에 최루탄추방대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독재타도라는 구호에는 아직 무언가 두려움을 느끼는 국민들도 ‘최루탄 쏘지마’라는 구호에는 용기를 내서 동참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최루탄을 쏘는 전경도 누군가의 자식이고 그 최루탄에 맞아 죽고 다치는 것도 누군가의 자식이니 더 이상 자식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호소가 대중적 파급력이 클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후 언론에는 여성들이 전경들의 총구에 꽃을 꽂는 장면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이는 많은 국민들에게 이 시위의 정당성을 호소하는 상징이 되었고, 실제로 6.10국민대행진의 참가자는 24만명이었는데, 6.18 최루탄추방대회는 참가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150만명에 이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물론 ‘사람이 죽는 판국에 꽃이 웬 말이냐’며 반대한 여성운동가도 있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대중적 확산이라는 면에서 이우정의 판단이 옳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또 한 가지 역사적 장면. 27년 전, 남북 평화 교류의 첫 물꼬를 튼 것도 이우정이었다. 

1991년 5월 일본 도쿄에서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북한 대표로 려연구 등이 참석했고, 이우정도 이효재, 윤정옥과 함께 참가했다. 이우정은 남과 북의 여성이 한 자리에 모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동서 냉전 구조의 종결과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는 남과 북이 진실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며, 다음 모임을 서울에서 갖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분단 이후 남과 북이 서로 오가며 교류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그 제안은 그저 ‘꿈’처럼 들렸고 듣기 좋은 덕담으로만 들렸다. 

서울로 돌아온 이우정은 가는 곳마다 이 계획을 이야기했다. 통일원 장관을 만나 설득하고 여성운동가들에게도 열띤 어조로 설명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교회여성연합회, KNCC 여성위원회 등을 모아 실무 집행위원회를 꾸리며 적극적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이전에 없던 일이기에 풀어야 할 일이 첩첩산중 같았다. 

하지만 꿈같은 제안이 있은 지 약 6개월이 지난 1991년 11월 25일, ‘2차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가 서울에서 열렸고 이 자리에 북한최고인민회의 부의장 려연구를 비롯한 열다섯 명의 북측 대표단이 참가하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이우정은 ‘구태여 손님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따지고 보면 혈연이요, 친척입니다.’라는 뜨거운 환영사를 남겼고 남과 북의 여성들은 가부장제, 통일, 평화로 토론하며 분단 이후 첫 민간 교류를 이어갔다. 이 서울 방문에서 북의 려연구는 도봉구 우이동에 있는 선친 여운형의 묘소에 참배하고, 모교인 이화여자대학교도 방문할 계획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당국의 반대로 모교 방문은 무산되었다. 이를 빌미로 북의 여성들은 30일까지로 예정되어 있던 일정을 당겨 29일 조기 귀국했다. 

천신만고 끝에 마련한 대화와 통일의 만남은 그만 끊어지고 만 것일까? 그렇지는 않았다. 약 10개월 후, 이번에는 북의 여성들이 평양으로 초대한 것이다. 1992년 9월 1일, 이우정을 단장으로 하는 30명의 방북단이 판문점을 지나 군사분계선을 넘어 육로로 평양 방문 길에 올랐다. 남한 주민으로는 최초로 여성들이 서울 평양 간 육로 방문을 이룬 것이다. 물론 이 길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통일원은 방북단 명단에서 조화순 목사를 빼라고 요구했고, 이우정은 모두 함께 가지 않으면 아무도 가지 않겠다고 방북 예정 전날인 8월 30일까지 버텼던 것이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려움이 있었기에 평양 토론회는 더욱 성공적이었다. 남과 북, 일본의 여성들은 서로 공감대를 찾고자 노력했고, ‘종군 위안부’ 문제에 뜻을 같이했다. 이우정은 이것이 ‘평화로 가는 첫 걸음’이었다고 평가했다. 

이후 국내외적 상황에 따라 남북 여성 방문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고 평화적인 교류를 염원하던 이우정의 뜻은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의지는 27년이 지난 2018년 현실이 되고 역사가 되었다. 이우정의 말대로 그 때 그의 제안은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  

힘없는 사람들의 곁에 서서 그들과 함께 울고 함께 싸우고 함께 노래 부르는 삶, 그것이 그가 택한 삶의 방식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우리 역사에서 어디에서나 늘 뚜렷하게 보이는 소중한 빛을 하나 얻었다. 

글  정영훈 
자유기고가. 방송작가. 인터뷰 작가. (사)한국여성연구소 부소장. 여러 매체를 통해 인간과 세상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고 있다.「새길에서 만난 사람」「여성, 나를 말하다」「얼지마, 죽지마, 페미니즘」「한국여성운동구술기록사업」「우리 젊은 날- 구로공단이야기」등 다양한 글과 영상물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