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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동의 그 추석, 1982년 원풍노조 파괴 작전

운명의 그 날과 다섯 명의 여성

1982년 9월 27일, 황선금은 오후 출근반이었다. 노조 사무실 옆 공동구매 조합에서 고향에 가지고 갈 추석 선물 몇 가지를 사고, 며칠 전 해고 공고가 붙은 박순애 부지부장과 이옥순 총무가 걱정이 되어 노조 사무실에 들렀다. 세상도 회사도 노조도 어수선했지만 그래도 추석은 지내야 할 것 같아서 귀향 기차표도 끊어둔 참이었다. 그때 갑자기 낯익은 남자 관리자들과 처음 보는 청년 수 십 명이 노조 사무실로 들이 닥치더니 사무실 안에 있던 조합원들을 하나씩 잡아 밖으로 내동댕이치기 시작했다. 선금도 짐짝처럼 던져졌다. 집기를 부수고 전화선도 끊었다. 사무실 안에 노조 위원장 정선순과 사무원을 남겨두고 문 안쪽에서  꽝꽝 못을 쳤다. 두 여성과 수십 명의 구사대가 사무실에 갇힌 꼴이었다.  

 “사표를 쓰라”는 구사대의 협박과 “차라리 죽여라”는 위원장의 절규가 간간히 밖으로 새어 나왔다. 200여 명의 사내들이 막고 있어서 조합원들은 사무실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갇혀있는 위원장이 들을 수 있도록 함성을 지르는 것 밖에 할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위원장은 마대 자루에 담겨 어디론가 실려 갔다고 했다.  

노조가 입장을 발표했다.  

1. 모든 조합원은 노동조합의 공식적인 발표가 있을 때까지 퇴근을 중지한다.
2.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추석 휴무 기간 동안 귀향 활동을 중지한다.
3. 모든 조합원은 우리의 정당한 주장이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끝까지 투쟁에 참여한다. 

1982년 9월 27일 원풍모방노동조합 상무집행위원회

파업결의는 아니었다. 파업이야말로 노조를 파괴할 빌미를 잡으려는 회사와 당국이 원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근무는 계속 하면서 회사 안에서 농성을 하는 것이었는데, 회사 식당이 폐쇄되었으니 강제 단식이나 마찬가지였다. 굶으면서 근무를 하고, 끝나면 다시 농성장으로 돌아오는 투쟁이었다. 선금은 농성장 안에서 간신히 구한 귀향 차표를 찢으며 우는 조합원들을 보았다.   

박순애는 구사대가 들이닥치는 순간 노조 사무실 유리창을 깨면서 저항했다. 그 탓에 손을 심하게 다쳐 병원으로 가서 상처를 꿰맸다. 그리고는 회사로 돌아가 조합원들과 합류하려 했지만 이미 경찰이 닭장차를 동원해 회사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는 꼬박 24시간을 넘긴 다음 날 저녁, 회사 철조망을 뚫고 간신히 농성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폭행과 감옥과 혹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그는 그곳으로 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양승화는 안에 갇힌 위원장이 폭력에 굴하지 않으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지만 무시무시한 사내들과 감금되어 있으니 혹시나 ‘험한 일’을 당할까 그게 걱정이었다. 사무실 밖에서 계속 큰 소리로 구호를 외쳐 위원장을 지키는 한편, 마지막 싸움을 각오하고 농성을 준비했다. 농성장은 장소가 넓은 정사과 현장으로 정했다. 오래 버티려면 지하 환기통으로 들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러면 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7시 30분 조합원들 앞에서 ‘조합을 사수해 달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9.27 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엄숙한 선언 같았다. 다음 날 새벽, 위원장이 마대자루에 실려 어디론가 갔다는 말을 들었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죽은 것은 아닐까’ 온갖 불길한 생각이 들었지만 조합원들 앞에서는 표정조차 조심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경찰이 회사를 겹겹이 둘러싸 노조를 고립시켰고 마치 미리 짜기라도 한 듯 방송국 카메라가 몇 대나 와서 회사를 찍어대고 있었다. 5공 정권은 노동운동 탄압의 마지막 제물로 원풍을 겨냥했고, 동일방직, 반도상사, 청계피복, 콘트롤데이터에게 했듯 원풍 파괴 작전을 결행하고 있었다.   

김오순은 그때 회사에 없었다. 귀향 버스표를 예매하러 터미널에 들렸다가 출근하니 귀향하지 말라는 노조의 지시가 내려와 있었다. 표 산 돈이 아까워서 표를 무르기 위해 잠시 회사 밖으로 나왔다. 돈을 돌려받은 다음 농성에 참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봉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합원들 곁을 떠날 수 없었다. 담장 근처에서 서성이며 기다리다 회사에서 끌려나온 조합원들과 합류하여 거리 시위에 나섰다. 유인물을 나눠주며 노조를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쫓아다니는 방송국 카메라에 대고 왜곡 보도하지 말라고 항의하다 그 모습이 전국에 방송되는 바람에 고향의 부모형제들이 난리를 치기도 했다. 회사는 그에게 10월 13일자로 해고를 통지했다. 그는 노조파괴가 시작된 그 날이 자신이 진짜 조합원이 된 첫 날이라고 생각했다.  

정선순은 두려웠다. 노조 위원장직을 감당할 역량이 되지 않는다고 여러 번 고사했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그에게 마지막 민주노조, 원풍을 지키는 역할을 맡겼다. 각오한 바 있었다. 이미 여러 명의 조합원이 구속, 해고 되었고 매일 갖가지 이유로 징계를 받고, 폭행을 당하고 있었다. 정선순에게 사표를 종용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박순애 부지부장을 비롯한 조합원들의 해고를 계기로 정면 대결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였다. 추석 휴가가 끝난 이후를 투쟁일로 잡고 대책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후 1시쯤 되었을까. 남자 직원들이 사무실 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선순을 감금하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뱉으며 얼굴이고 몸이고 가리지 않고 밟아댔다. 사표를 내라고 했다. 네댓 번 기절했다. 그때 마다 찬물을 끼얹어 깨우고는 다시 때렸다. 조합원이 뽑았으니 사표를 내더라도 조합원에게 내겠다고 악을 쓰며 버텼다. 17시간 사투를 벌이는 동안 내내 귀에는 조합원들의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들리는 한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화곡동 쓰레기 하치장 한가운데 버려져 있었다. 온 몸이 쓰레기 범벅이었다. 회사로 돌아가 정문 앞에 주저앉아 ‘폭력배는 물러가라’ ‘노조탄압 중지하라’ 악을 썼다. 단전단수 상태에서 잠도 못자고 먹지도 못하고 농성 중이던 조합원들에게 위원장이 살아서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야 했으니까. 

마침 추석이었다

나흘째 되던 날인 9월 30일 저녁, 각목을 든 200여 명의 폭력배가 농성장을 덮쳤다. 기진맥진한 채 남아있던 조합원들이 하나씩 둘씩 끌려나와 내동댕이쳐졌다. 대방전철역, 구로공단 주변 여기저기 버려졌다. 맞아서 병원에 실려 간 조합원도 있었다. 병원에서 치료 도중 정신이 든 조합원은 주사 바늘을 빼고 다시 회사로 달려왔고 멀리 내던져진 조합원들도 맨발로 걸어서 회사로 돌아왔다. 조합원들의 구호, 비명, 통곡 소리, 경찰들의 고함과 폭력배들의 구타 소리가 뒤섞여 지옥이 따로 없었다. 이 처절한 광경을 지켜본 대림동 근처 주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사람 죽인다고 아우성을 치기도 했고 쓰러진 조합원들을 병원으로 옮기다가 자신들이 쓰러지기도 했다. 그날 밤 모두 200명의 조합원이 주변 병원을 거쳐 갔다. 그렇게 10월 1일 새벽이 되도록 실려 갔다 돌아오고 실려 갔다 돌아오며 원풍 조합원들은 투쟁을 계속했지만, 결국은 거리로 경찰서로 병원으로 실려가 농성장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못했다. 날이 밝았다. 그 날은 마침 추석이었다.  

그 후 원풍 노조 조합원들은 세 차례에 걸쳐 출근 투쟁을 하며 생존권을, 노조를 지키고자 안간힘을 다했으나, 다시 노조사무실의 문을 열지는 못했다. 그해 12월 19일 MBC 9시 뉴스에서는 ‘원풍모방 극렬 노사분규’를 특집으로 내보냈다. 쓰러진 노조를 확인사살 하는 듯 했다. 아마도 그들은 그것으로 모든 것을 끝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원풍 사람들은 2년 후 해고자 복직투쟁위원회 법외노조 활동을 시작했고, 84년에는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를 만들었다. 그들은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부활했다. 


1972년 원풍모방은 기존의 어용노조를 청산하고 민주노조를 출범시켰다. 
1974년 원풍노조는 부도 위기에 처한 회사의 경영을 정상화시켰다. 
1975년 이후 원풍노조는 소모임과 교육활동으로 강력한 민주노조로 성장 발전했다.   
1980년 5공 정부는 안기부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를 동원하여 원풍노조에 대한 본격적인 파괴공작을 시작하였다. 지부장 방용석이 수배되고, 상무집행위원 전원과 대의원의 강제 사표를 받았다. 
1982년 노조 무력화를 위해 부산 소재 원풍타이어 노조와 통합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노조는 새 조합장으로 정선순을 선출하는 등 조직을 재정비하고 노조활동을 정상화하였다.
1982년 9월 27일 마침내 정부는 폭력을 동원한 노조 와해 작전을 개시하여 10월 1일 새벽, 마치 군사 작전 같은 파괴 작전을 마쳤다. 
글  정영훈 
자유기고가. 방송작가. 인터뷰 작가. (사)한국여성연구소 부소장. 여러 매체를 통해 인간과 세상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고 있다.「새길에서 만난 사람」「여성, 나를 말하다」「얼지마, 죽지마, 페미니즘」「한국여성운동구술기록사업」「우리 젊은 날- 구로공단이야기」등 다양한 글과 영상물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