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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배고파... 배가 고파...”

태일의 목소리에 소선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태일을 묻고 돌아와 태일의 친구들과 밤을 새며 앞으로 할 일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아들이 죽고 일주일째, 소선은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했다. 아들의 죽음 이후 내내 함께했던 아이들도 피로를 못 이겨 벽에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소선은 물먹은 솜덩이 같은 몸뚱이를 간신히 일으켰다. 태일의 뜻을 지키려면 따뜻한 밥이라도 먹고 어떻게든 힘을 내야 했다.

1주일 전인 11월 13일, 아들 태일은 제가 일하던 평화시장 구름다리 위에서 제 몸에 석유를 뿌린 뒤 불을 붙였다. 병원으로 후송되어 숨이 끊어지기까지 태일은 소선과 친구들에게 자신이 하려던 일을 꼭 이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태일이 원한 건 딱 여덟 가지였다.

  1. 일요일은 쉬게 하라.

  2. 월급을 법으로 보장하라.

  3. 하루 여덟 시간 근무를 보장하라.

  4. 해마다 월급을 인상하라.

  5. 정기적으로 건강진단을 하라.

  6. 여성 생리 휴가를 주라.

  7. 이중 다락방을 없애라.

  8. 노동조합 결성을 보장하라.

너무나 당연한 일이 너무도 당연하게 지켜지지 않던 시절이었다. 태일이 죽은 뒤 평화시장 사장들이 몰려와 보상금을 주겠다며 빨리 장례식을 올리라고 재촉했다. 며칠 지나자 보상금이 5천만 원까지 올라갔다. 집 한 채가 몇백만 원 하던 때였다. 그러나 소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자기가 하려던 일을 꼭 이뤄달라던 태일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일이 죽고 6일째 되던 날 마침내 사장들이 태일의 여덟 가지 요구 사항을 모두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른 아침, 소선은 평화시장 노동조합 사무실로 달려갔다.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경비들이 소선의 앞을 막아섰다.

  “못 들어갑니다! 돌아가세요!”

평화시장 사장들의 약속은 모두 거짓이었다. 그들은 빨리 장례식이 치러지고 온 국민이 태일의 죽음을 잊어버리길 원했던 것이다. 소선은 평화시장 주식회사 사무실로 달려갔다.

  “노동조합 사무실을 내준다고 약속하지 않았소?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겠다는 것이오? 좋소. 사무실을 내주지 않으면 당신들의 사무실을 노동조합 사무실로 쓰겠소. 그러니 노동자가 아닌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나가시오.”

소선의 기세에 놀란 직원이 허둥지둥 열쇠를 찾아 노동조합 사무실 문을 열어주었다. 소선과 태일의 친구들은 벅찬 가슴으로 사무실에 들어갔다. 태일의 여덟 번째 요구 사항이 겨우 이뤄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노동조합 사무실 문은 또다시 굳게 닫혀 있었다. 어제보다 많은 경비원이 소선과 태일 친구들의 앞을 막아섰다. 소선과 친구들은 몸싸움을 벌이다 밖으로 내쫓기고 말았다. 그러나 아들과 친구의 참담한 죽음을 목격한 이들이 포기할 리 없었다. 그들은 러닝셔츠를 잔뜩 샀다. 러닝셔츠 하나하나에 여덟 개 요구 사항을 붉은 글씨로 썼다. 모두 러닝셔츠를 입고 그 위에 작업복을 걸쳤다. 그들은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해 작업복을 벗었다. 윗도리에 러닝셔츠를 걸쳐 입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그들이 자신의 절박함을 알리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이내 경찰이 몰려왔다. 몸싸움이 벌어졌고 모두 경찰서로 잡혀갔다. 하지만 이 사건이 신문에 실리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각계에서 응원과 격려가 쏟아졌다.

1970년 11월 27일, 전태일이 죽은 지 14일 만에 청계피복노조 결성식이 열렸다. 노동조합에 가입한 조합원 560명을 대표한 대의원 56명이 모인 자리에서 소선은 입을 열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청계피복노동조합을 지켜냅시다. 나 또한 몸이 가루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내 아들, 태일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의 노동자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그날까지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노동조합을 지켜내기는 쉽지 않았다. 사장들은 노동조합에 가입한 사람을 받아주지 않았고, 자기 직원들에게도 노동조합에 가입하기만 하면 해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노동조합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는 아예 일을 주지도 않았다. 그러니 끼니를 해결하는 것마저 어려웠다. 소선은 노동조합 일을 하는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시장 바닥을 뒤졌다. 버린 배춧잎을 줍고 콩비지와 밀가루를 사서 노동조합 사무실로 갔다. 배춧잎과 콩비지와 밀가루를 섞어 푹푹 끓인 것이 노동조합 사람들의 소중한 한 끼였다.

소선과 노동조합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알리기 위해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노동자들을 탄압하지 말라’는 큼지막한 현수막을 내걸었다. 경찰이 달려와 현수막을 뜯어내고 노동조합 사람들을 모조리 유치장에 가뒀다. 소선이 말했다.

  “노동조합을 방해하는 경찰은 우리 편이 아니다. 그러니 경찰이 가져다주는 밥을 먹지 말자. 굶는 것도 싸움이다. 굶어 죽을 각오로 노동조합을 지켜내자.”

그 순간부터 다들 눈앞에 밥을 놔두고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닷새가 지나자 한 조합원의 입에서 회충이 기어 나왔다. 뱃속에 먹을 게 없으니 밖으로 나온 것이다. 회충이 유치장 바닥을 기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서야 경찰은 노동조합에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사업주들의 방해는 끈질겼다. 사업주들이나 경비들은 노동자들이 조합 사무실에 찾아오는 것도 방해했다. 소선은 더 많은 노동자를 만나 노동조합이 왜 필요한지 알려주고 싶었다. 궁리 끝에 떡장사를 시작했다. 당시 노동자의 절반은 점심조차 사 먹을 돈이 없었다. 나머지도 떡이나 풀빵 몇 개로 끼니를 때우고 밤늦게까지 일했다. 소선은 경비들과 매일 실랑이를 벌이면서도 떡 광주리를 이고 매일 노동자들을 찾아 나섰다. 소선은 자기 아들 같은 노동자들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내가 바로 불에 타죽은 전태일이 엄마요. 여러분, 노동자들이 사람답게 살려면 반드시 노동조합에 가입해야 합니다. 언제든 노동조합으로 찾아오세요.”

1975년 11월 13일, 태일이 죽은 지 5년째 되는 날이었다. 저녁 9시가 다가오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들기 시작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전태일 추모의 밤에 참석하기 위해 찾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 전태일의 뜻을 잊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소선은 목이 메었다.

며칠 뒤, 40여 명의 평화시장 노동조합원들이 노동청 사무소를 찾아갔다. 그들은 천막을 치고 집에도 돌아가지 않은 채 노동자들의 요구를 외쳤다.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절대 자리를 떠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여덟 시간 근로 기준 시간을 지켜라!”

  “살인적인 다락방을 쳘폐하라!”

태일이 죽은 뒤에도 노동조합만 결성됐을 뿐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은 한 층을 둘로 나눠 허리조차 펼 수 없는 열악한 공간에서 하루 열두 시간씩 일하고 있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제히 이 일을 보도하자 노동청에서도 평화시장에서 노동법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단속하겠다고 약속했다.

1975년 12월 16일 저녁 여덟 시.

평화시장 전체에 전깃불이 나갔다. 평화시장이 생기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늘 작업 끝났습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노동자들은 어리둥절한 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덟 시에 일이 끝나다니... 꿈인지 생시인지 믿기지 않았다.

소선은 며칠 뒤 한 여성 노동자의 편지를 받았다.

  “어머니, 저녁 여덟 시에 갑자기 전기가 나갔어요. 일하던 노동자들이 어리둥절해 있을 때 사장들과 경비들이 소리를 치고 다녔어요. 오늘은 일이 끝났으니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고! 그 소리가 꼭 꿈만 같아 너도나도 웅성거렸답니다...

  ”아, 나는 춤이라도 추고 싶었어요...”

고작 여덟 시에 일이 끝났다고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니, 소선은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결심했다. 노동자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그날까지 온몸을 바쳐 싸우겠노라고. 그것은 온몸에 화상을 입고 죽어가던 아들 태일의 뜻이기도 했다.

소선은 언제나 노동자들의 편이었고, 노동자들이 필요로 하는 자리에는 언제나 소선이 있었다. 1975년 박정희 정권이 인혁당사건을 조작하고 관련자들을 서둘러 사형시킨 뒤 화장시키려 하자 그 앞을 막아선 사람도 소선이었다. 소선은 헌 옷을 팔아 생계를 꾸리면서도 노동운동가나 민주화운동가가 수배를 당하면 그를 숨겨주고 먹이고 재웠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부터 평화시장의 어린 시다까지 소선을 ‘어머니’라 불렀다. 이소선의 판잣집을 거쳐간 사람들이 훗날 대통령이나 장관이 되기도 했지만, 소선은 늘 노동자 편에 섰다.

소선은 80살이 넘은 뒤에도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그러나 소선은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노동자들이 옳지 않은 일을 하면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2006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소선이 했던 말은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입으로만 노동자는 하나라고 외치면 뭐 합니까! 밑바닥에서 소외받고 고통당하는 비정규직을 나 몰라라 해서 어찌 민주노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손잡고 싸우지 않으면 얼마 못 가 정규직도 비정규직 신세가 될 것입니다.”

2011년 9월 3일, 심장마비로 쓰러진 이소선은 끝내 눈을 감았다. 가톨릭신문은 이소선의 삶을 아들 예수를 잃은 성모 마리아의 삶에 비유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약자의 편에 섰던 소선은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고, 더 나아가 모든 상처받은 사람들의 편에 서서 평생을 봉사하며 살았다. 소선의 장례는 시민장으로 치러졌으며 모란공원, 꿈에도 그리던 아들 전태일의 뒤편에 묻혔다.  약 9년의 세월이 지난 2020년 6월 10일에 열린 제33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에서 이소선은 국민훈장 모란장에 추서되었다.

정지아(소설가)
1965년 전남 구례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 1990년 실천문학에서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 출간. 창비에서 소설집 "행복", "봄빛" 출간. 은행나무에서 소설집 "숲의 대화" 출간. 이효석 문학상, 김유정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