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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지침사건

1. 협박과 촌지에 눈 먼 데스크

1986년 7월 하순, 모 일간지 사회부장은 상기된 얼굴로 K 기자의 원고를 중얼중얼 읽어 내려갔다.

“문귀동 형사는 권인숙 양이 비명을 지르며 저항하자 죽이겠다고 협박하며 권양의 바지 지퍼를 내리고 …… 뒤로 수갑을 채워 책상 위에 엎드리게 한 후 …… 계속 시국수배자의 소재를 불 것을 강요했다. 권양이 모르는 사람들이라며 제발 이러지 말라고 애원하자 난폭하게 의자에서 끌어내려 바닥에 무릎을 꿇게 한 다음 …….”

사회부장의 손이 후들거렸다. 그는 원고를 책상에 팽개치며 K 기자에게 소리 질렀다.

“벌써 몇 번째 지침을 내려 보냈는데 이렇게 자세히 쓰나?”

K 기자도 상기된 얼굴로 반발했다.

“국가안보에 관한 사항도 아니고, 경찰이 여대생을 성고문한 사건까지 은폐하라는 겁니까?”

“그 성고문이란 말도 쓰지 말라고 지침을 내렸잖아! 그냥 부천서사건이라고 하란 말야!”

“정부 지침대로만 기사를 쓰려면 기자가 왜 필요합니까?”

이 해 봄, 한국일보와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 주요 일간지 기자 300여 명이 매일처럼 정부에서 내려오는 보도지침을 거부하는 결의문을 발표한 바 있었다. 기관원 출입과 홍보지침 등 일체의 외부간섭을 중단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현장기자들의 집단항의에도 불구하고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을 통한 보도지침은 여전했다. 매일 전화로, 혹은 국가안전기획부 요원이 직접 신문사로 찾아와 실어야 할 기사와 싣지 말아야 할 기사, 기사의 크기와 제목까지 일일이 지정해 주었다. 일선 기자의 다수는 이에 반발했으나 최종편집을 맡은 부장급 이상 데스크 간부들, 특히 언론사주들은 철저히 권력에 복종했다.

“이 사건에서 손 떼! 아니면 대기발령이야!”

사회부장은 버럭 고함을 쳐 K 기자를 내보냈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 이 사건을 보도 통제한다는 조건으로 문화공보부 고위관리로부터 거액의 촌지까지 받은 처지였다. 자신을 비롯한 주요 일간지 간부들이 함께 도고온천으로 불려간 자리에서였다. 

“철없는 것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

사회부장은 중얼거리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K 기자의 원고를 북북 찢어버렸다. 그리고 쓰고 있던 사설의 제목을 뽑았다.

‘재야운동권, 성을 혁명의 도구로 삼을 것인가?’

책상머리에는 ‘안전기획부 연락’이라는 메모가 적힌 그 날의 보도지침이 카메라의 눈처럼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2. 양심의 부름

열흘 후인 8월 초, 한국일보 편집국. 

김주언 기자의 시선은 아까부터 건너편 책상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서무담당 여직원의 책상이었다. 여직원을 보는 게 아니었다. 책꽂이에 꽂힌 서류철을 보고 있었다.

‘이번이 두 번째다. 여직원이 의심하지는 않을까?’

얼마 있으면 딸아이의 돌이었다. 결혼해 낳은 첫 딸의 첫 생일, 어렵게 학교를 마치고 신문사에 취업해 이제 막 소시민적 틀을 잡아가고 있는 32살 회사원에게 주어진 행복의 첫 계단이었다.

‘지금의 내 행동이 내 가정에 어떤 불행을 몰고 올 것인가?’

김주언 기자는 자신의 작은 가정에 몰아칠 것이 분명한 사태에 대한 불길한 상상으로 진저리를 쳤다.

‘과연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독재 권력의 폭력 앞에서 나의 진실, 나의 양심을 지켜낼 수 있을까?’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 왔다. 입 안은 소태처럼 썼다. 자신은 없었다. 경찰서 조사실에서 공공연히 여대생을 발가벗겨 성고문을 가하는 세상이었다. 보도지침 가운데는 안기부의 고문으로 정신질환을 얻은 이들에 대한 보도를 금지하는 내용도 있었다. 체포된다면 살아서 나온다는 보장조차 없었다.

‘어느 날 누군가에 의해 소리 없이 증발되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격리될 지도 모른다. 그 상태에서 내 목소리는 내 뜻과 반대로 조작되고 둔갑되어 발표되겠지.’

대학시절, 박정희 군사독재에 대항해 나름대로 열심히 싸웠다. 유인물을 뿌리다가 구류 살기를 수차례, 결국 구속당했다가 강제징집으로 힘겨운 군대생활을 해야만 했다. 마침내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이듬해 1980년, 이제는 민주주의가 오리라 믿고 한국일보에 입사했으나 불과 한 달 후에 신군부가 단행한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로 다시 어둠의 세상이 되었다.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은 제일 먼저 언론 길들이기에 나섰다. 무려 680여 명의 기자를 해고시켜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다음, 남은 기자들에게는 파격적인 대우를 제공하여 입을 봉쇄하려 들었다. 제5공화국 출범 이래 기자만큼 사회적 신분과 경제적 여건이 상승된 집단은 없을 것이다. 동급 학력 최고 수준의 월급 외에도 정부기관이며 대기업에서 빈번하게 들어오는 촌지는 기자들의 눈을 멀게 했다. 

눈을 감은 사람에게는 세상이 모두 평지로 보일 것이다. 구차한 양심을 접어두고 모르는 척 눈만 감아버리면, 사회의 특권층으로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유난히 언론인 출신들을 정계에 많이 진출시켰다. 좀 더 아부를 한다면 국회의원으로, 장관으로 승승장구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두 눈은 감을 수 있을지라도, 어찌 양심의 눈까지 감을 수 있을 것인가?’

양심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권력이 요구하는 대로 맹목적으로 따라가지는 않기 위해 편집 간부들과의 승강이 끝에 자그맣게나마 재야단체 집회 기사를 싣기도 했고 보도지침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학생시위를 좀 더 자세히 쓰는 것으로 자기위로를 했다.

‘이 얼마나 구차스런 자기변명인가? 이 사회를 지배하는 저 거대한 권언유착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는다면 이러한 것들은 비굴한 자기위안에 지나지 않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김주언 기자는 서무직원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먼저 번에 보았던 보도지침 있지요? 지난 두 달 간 새로 내려온 지침 좀 줘 봐요.”

편집기자의 당당한 요구에 여직원은 아무 의심 없이 서류철을 뽑아주었다. 검정색 겉표지에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평범한 서류철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지난 두 달 간 문화공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로부터 전화나 인편으로 통보받은 보도지침들이 빼곡히 필사되어 있었다. 김주언은 곧바로 7층 복사실로 내려갔다.

3. 현 정권은 최대의 범죄집단입니다.

다시 한 달이 지난 1986년 9월 9일 오전 10시.

명동성당 사도회관에는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경찰과 정보부의 추적을 따돌리고 모인 수십 명의 언론인과 기자, 천주교 신부들은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송건호 의장의 입에 시선을 모았다.

“오늘 우리는 이 나라 언론통제의 구체적 실증이요, 언론 상황의 실상을 증거하는 문화공보부의 언론사에 대한 보도지침 자료집을 공개, 발표하는 바이다. …….”

민주언론운동협의회는 군사독재를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가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에서 해직된 기자들로 이루어진 자유언론운동단체였다. 기관지로 <말>을 발행하고 있었는데 김주언 기자가 제공한 보도지침을 토대로 극비리에 특집호를 발행해 배포하는 동시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도움으로 기자회견을 연 것이다.

“이 보도지침 자료집은 현 정권의 언론정책은 물론 현 정권의 도덕성을 가늠해주는 귀중한 현대사 자료로서, 그리고 자유언론 쟁취를 위한 획기적 기원으로 기억되고 평가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자료집 발간에 협조해 준 모든 인사들에게 감사와 함께 그들의 안전이 지켜지기를 기도 속에 간구하는 바이다.”

송건호 의장이 기자회견을 마치자 <말>지 편집인 중 한 명인 신홍범이 보도지침의 성격과 구체적인 사례를 밝히는 성명서를 낭독했다. 선비풍모의 신홍범 자신이 쓴 글은 간결하고도 명쾌했다. 

“보도지침은 어떤 기사를 어떤 내용으로 어느 면 어느 위치에 몇 단으로 싣고, 제목도 어떤 표현을 사용해야 하며, 어떤 사진을 사용해서는 안 되고 또는 사용해야 하는가를 지시한다. 예를 들어 학생이나 노동자들의 폭력사용은 사진을 게재하고, 당국의 분석 자료를 어떻게 처리하라는 등 세부사항까지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예컨대 ‘농촌파멸직전, 보도하지 말 것’ ‘광주사태 유가족 인터뷰 싣지 말 것’ ‘남북 스포츠회담 조그맣게 보도할 것’ 등이다.”

신홍범의 목소리는 점차 고조되었다.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은 그 전형적인 한 실례가 될 것이다. 정부당국은 기사를 사회면에 싣되 기자들이 독자적으로 취재한 것은 싣지 말고 검찰의 발표내용만 게재하며 사건명을 성추행이라 하지 말고 성모욕 행위로 쓰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검찰발표 내용을 반드시 전문 게재하되 반체제 측의 고소장 내용이나 NCC, 여성단체 등의 사건관련 성명은 일체 보도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 

기자회견에 참석한 각 신문사의 현직기자들은 자신들이 직접 겪었던 일에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메모를 했다. 그러나 이 날의 기사는 거의 신문에 보도되지 않았다. 언론사 경영진과 고위간부를 통한 보도통제는 여전했던 것이다.

진실은 2만 5천부나 발행된 <말>지 특집호를 통해 손에서 손으로, 입에서 입으로 번져 나갔다. 경찰은 특집호를 배포중지 시키기 위해 서점들을 뒤지고 관련자와 주변인들까지 대거 연행해 혹독한 조사를 벌였으나 발 없이 퍼져나가는 진실의 힘을 막지 못했다. 처음에는 이 문제에 대한 보도지침을 지키던 신문들도 점차 재판 기사를 박스로 다루는 등 여론형성에 나섰다.

폭로의 주동자로 구속된 김주언, 신홍범, 김태홍은 재판정에서 당당히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박원순, 고영구, 한승헌, 조영래 등 인권변호사들이 총출동하다시피 한 변호인단의 지원도 이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듬해인 1987년 4월 29일에 열린 3차 공판에서 ‘보도지침을 널리 알리는 게 국민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느냐’는 이상수 변호사의 질문에 <말>지 편집인 김태홍은 당당히 말했다.

“국내 최대 규모의 범죄 집단인 현 정권이 저지른 비행의 뒷면을 밝혀 줄 이 자료를 알리는 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꼭 한 달 후, 전국은 6월민주항쟁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글 안재성

1989년 장편소설 <파업>으로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이후 대표작으로 <사랑의 조건>, <황금이삭>, <경성트로이카>, <연안행>,등의 장편소설과 <이현상 평전>, <박헌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