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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민주화운동청년연합, 그리고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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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봄비가 온다 봄비가 온다, 메마른 산봉우리 봉우리마다
민족해방의 봉홧불로 살맞은 가슴을 사르는 봄비가 오는데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
- 민청련 사회부장 연성수 지음, ‘뱀이 두꺼비를 삼키다’ 중

두꺼비는 뱀의 몸에서 알을 까고 새끼를 낳는다. 

말하자면 새끼를 까기 위해서 두꺼비는 뱀에게 필히 먹혀야 한다. 하지만 뱀은 독을 품은 두꺼비를 먹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린다. 징그러운 놈……. 속으로 그럴 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꺼비는 포기하지 않고 뱀 앞에서 온갖 약을 다 올리고, 마침내 뱀은 덥석 두꺼비를 물고 만다. 그러면 상황은 종료된다. 두꺼비도 죽고, 뱀도 죽는다. 그리고 뱀의 몸에서 뱀의 양분을 먹고 새끼 두꺼비들이 탄생하는 것이다. 너무나 슬프지만, 너무나 처절하지만, 그렇게 하여 새로운 집,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연희패 출신의 운동가 연성수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 상징으로 두꺼비를 그렸다. 위의 시는 그가 구속되어 1986년 3월 25일 결심공판에서 최후진술 대신 읊은 담시의 앞부분이다. 폐결핵으로 약해 빠진 그는 10여 일 간 단식을 하며 맑은 마음 한 자락으로 위의 시를 쓴 것이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약칭 민청련.

1980년 광주를 피로 물들이며 들어선 전두환 정권이 서슬 퍼런 채찍을 휘두르던 그때 민청련은 바로 그렇게 한 마리 두꺼비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모든 것은 불법화되었으며, 언론은 재갈이 물린 채 양심적인 기자들은 거리로 쫓겨나고, 대신 권력에 아부하며 순한 양처럼 자본의 논리를 따르는 언론만 살아남았던 캄캄한 암흑의 시절이었다. 

그런 나날 속 1983년 9월 30일, 서울 성북구 돈암동 가톨릭 상지회관에 경찰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늙수레한 청년 59명이 모였다. 그 속에 장차 한국 민주화운동의 불꽃같은 상징으로 떠오를 김근태가 있었다. 그리고 최민화, 이해찬, 장영달, 이범영, 장준영, 박우섭, 연성수, 홍성엽, 이을호, 최정순 등 일찍이 학창시절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이들이 함께했다. 

“고통과 희망을 온 몸에 안고 억압받는 제3세계의 일원으로서, 민족사의 전진에 앞장서야할 청년으로서…… 민족의 존립 자체가 위협 받고 있는 오늘의 현실 상황은 뿔뿔이 흩어진 민주청년들이 다시 한데 모여 민중운동의 흐름 속에서 양심적인 지식인, 종교인, 정치인, 노동자, 농민들과 연대를 강화하면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새로운 사회 건설에 매진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창립선언문을 읽어나가는 김근태의 목소리가 떨렸다.

뒤늦게 달려온 경찰은 집회가 끝나자마자 연행할 준비를 하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1980년 신군부는 백기완, 고은, 김병걸 등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명망가는 남김없이 검거하여 짐승같은 고문을 가하였고, 유력한 야당 지도자 김대중은 기약없는 망명길에 오르게 한 터였다. 그런가 하면 사회정화라는 명목으로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국민들을 공포 분위기 속으로 몰아넣었다. 숨 막히는 시절, 민주화운동은 공개의 장을 떠나 언더로, 언더로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공개운동은 곧 죽음과 같은 의미였다. 바로 그 속에서 한 톨의 불씨처럼 민청련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장차 민주화운동의 활화산이 될 민청련 의장 김근태가 있었다. 전두환 정권의 가혹한 탄압이 이어지던 1985년 12월 19일. 서울지방법원 재판정.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던 그는 근 한 달여 만에 포승줄에 묶인 초췌한 모습으로 재판정에 나타났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는 찾아볼 길이 없었다. 곳곳에 피멍이 들었고, 입술에는 검은 딱지가 앉아 있었다. 재판이 시작되자 그는 천천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본인은 9월 한 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 위해 가했습니다.” 

재판정은 일순 깊이를 알 수 없는 침묵에 빠져 들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9월 4일 각 5시간씩 두 차례 물고문을 당했고, 9월 5일, 9월 6일 각 한 차례씩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골고루 당했습니다. 8일에는 두 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0일 한 차례, 13일…… 13일의 금요일입니다. 9월 13일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너 장례날이다." 이러한 협박을 가하면서 두 차례의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그 다음에 20일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차례 받았습니다. 그리고 25일날 집단적인 폭행을 당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구타를 당했습니다. 물론 잠을 못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밥을 굶긴 것도 대략 절반쯤 됩니다. 고문 때문에 13일 이후에는 밥을 먹지 못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밥을 먹지 못합니다. 가방을 갖고 다니면서 그 가방에 고문도구를 들고 다니는 건장한 사내는 본인에게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철을 만났다. ”이재문(남민전 사건의 주범, 옥사했음)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서져서 병사를 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 서줄테니까 그때 너가 복수를 해라" 이러한 참혹한 이야기를 하며 본인에 대한 동물적인 능욕을 가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본인은 알몸이 되고 알몸상태로 고문대 위에 묶여졌습니다. 추위와 신체적으로 위축돼 있는 상태에서 본인에 대해 성적인 모욕까지 가했습니다. 말씀드리면 제 생식기를 가리키면서 "이것도 좆이라고 달고 다녀? 민주화운동하는 놈들은 다 이따위야!" 이렇게, 말하자면 깔아뭉개고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고문을 할 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눕히면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습니다. 발목과 무르팍과 허벅지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매고 그 밑에 담요를 깝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하면서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와 (이때 방청석에서 울음이 터지기 시작, 본인도 울먹이며 진술함)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러한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인간적인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

방청석 여기저기에서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고문을 하면서 "시집간 딸이 잘 사는지 모르겠다." "아들놈이 체력장을 잘 치뤘는지 모르겠다."는 등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애정어린 말들을 주고 받았으며 본인에게도 이야기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고문과 폭력적 행위를 자행하는 자들이 개인의 가족들에게는 인간적인 사랑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양면성이 공존할 수도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고문을 전담하던 자 중의 한사람은 -이름을 밝히진 않겠지만- 나중에 혼자서 제 손을 잡고 이야기하기를 "고문하는 것을 보고 구역질이 났다. 여기서 빨리 나가라. 허위로라도 다 인정해라. 여기 있으면 당신은 죽는다"고 울면서 얘기했습니다. 결국 9월 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 25일에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만 더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집단폭행을 가한 후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근태의 증언은 어마어마한 태풍을 몰고 왔다. 

놀라운 기억력으로 복원해낸 증언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고 충격적이었다. 고문에 대해 막연히 소문으로만 알고 있던 국민들은 설마했던 일이 사실로 벌어지고 있음을 알고 경악했고 분노했다. 20세기 대한민국에서 독일 나찌들이나 하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문을 예술이라고 했던 세칭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실체가 어둠 속에서 햇볕 아래로 나타난 것도 바로 김근태의 이 증언에 의해서였다.

김근태의 법정 증언은 곧 외신을 타고 전 세계로 타전되었다. 세계가 분노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곤란에 빠졌다. 김근태를 간첩으로 몰아 민주화 세력의 중심을 타격하고 영구집권을 하겠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던 것이다.

뱀이 마침내 두꺼비를 물고 만 형국이었다.

뱀에게 스스로 자기 몸을 내어 주었던 ‘민주 두꺼비’는 김근태만이 아니었다.

21세의 나이로 민청학련사건으로 군사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영광입니다!”고 외쳤던 김병곤 역시 민청련의 초기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1987년 구로구청부정투표함사건으로 구속되어 감옥을 살던 중 위암에 걸려 1990년 12월 영면하였다. 그리고 1980년 봄 그 유명한 YWCA위장결혼사건의 주인공이었던, 민청련의 초창기 멤버인 홍성엽 역시 지병으로 타계하였고, 열렬한 운동가 중 한 사람이었던 안희대는 불의의 사고로 지상을 떠났다. 

김근태의 뒤를 이어 민청련 의장이 되었던 이범영도 빼놓을 수가 없다. 키가 훌쩍 큰 그는 매우 치밀하고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1980년대라는 암흑을 뚫고나가는 데 그는 언제나 김근태와 함께 하였다. 그러나 민주화의 결실을 채 보기도 전에 1994년 8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안타깝게 지병으로 타계하였다.

당시 최고의 부수를 자랑하던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을 인쇄했던 을지로 3가 대동인쇄소 사장 윤여연, 민청련 정책실장이었던 이을호 역시 김근태와 같이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정신에 상처를 입고 오랫동안 병원으로 오가며 후유증을 앓기도 했다. 

그들은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할 ‘민주 두꺼비’들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들이 자신의 목숨과 바꾸며 남겨준 새집에서 살고 있다. 이 집을 지켜나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가끔 비 내리는 날이면, 그 시절 나의 비좁은 신혼집 이층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그 사람들을 떠올리며, 혼자 가만히 그때의 노래를 불러보곤 한다.

- 뚜껍아 뚜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글 김영현(소설가)
1984년 창작과비평사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로 등단,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해남 가는 길>, <내 마음의 망명정부>, 장편 <풋사랑>, 시집 <겨울 바다>, <남해 엽서>등이 있다. 제23회 한국창작문학상 수상, 실천문학사 편집장 역임, 한신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하다가 현재는 양평에서 창작과 공부에만 열중하고 있다.